모랄리스(Moralis)
목차
프롤로그
1.무한한 자연과 일원론
2.새로운 합리성
3.진정한 자유와 윤리
4.인간 행동의 동기와 연민
에필로그
참고문헌
프롤로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양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둘러싼 중요한 질문들을 놓고 고심해 왔다. 많은 해답은 종교와 하나 이상의 신 숭배에서 나왔다. 신의 뜻을 점치는 것이 철학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폭풍, 전염병, 또는 기타 재난이 신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때 신을 설명하거나 달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암스테르담의 작고 어두운 방에서 한 젊은이가 신을 완전히 다르게 정의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정의를 일련의 수학적 증명으로 구체화하여 모든 합리적인 논증을 넘어 신과 자연이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이 그의 시작이었다. 우주처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정의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자신이 우주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주는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변을 둘러보면 우주와 같은 것은 힘, 사물, 존재와 같은 다양한 유한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서로 다르다고 인식될 수 있지만, 존재와 분리될 수는 없다. 산은 결코 참나무가 될 수 없지만, 산과 참나무는 어쨌든 분명히 존재하며, 참나무는 산에서 자랄 수도 있으므로 어떤 면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제 스피노자는 신을 고찰한다. 신은 무한한 속성을 가진 무한한 존재, 즉 동시에 무한을 구성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무한하기 위해서는 정의 가능한 시작이나 끝이 있어서는 안 되며, 다른 것과 비교하여 파악되어서도 안 된다. 사실, 시작이나 끝이 없는 존재가 되려면 무한한 존재는 시간과 공간 자체를 넘어서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간단한 정의, 공리, 그리고 명제로 제시된 이러한 주장에서 시작한다. 나머지는 다소 급진적이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어진다. 몇 가지 핵심 개념을 확립하는 일련의 명제들이 이어집니다. 처음 열다섯 개의 명제는 신의 기본 속성을 존재, 무한, 그리고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눌 수 없음으로 정의한다. 다음 세 명제는 첫 번째 명제가 참이라면, 신은 우주에서 분리될 수 없는 유일한 실체라는 결론이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신과 우주를 비교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둘 중 어느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과 우주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신은 모든 자연과 동일하며, 따라서 존재 그 자체와도 동일하다. 따라서 만물은 무한한 속성, 즉 자연이나 신의 현현이며, 동일하고 무한한 실체, 즉 신성에서 비롯된다. 스피노자의 신 개념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인격적이고 법칙을 부여하는 창조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다신교와는 거리가 멀다. 스피노자에게 무한은 명백하고 그의 주변에 있었다. 단지 볼 수 있는 눈과 추론할 의지만 있으면 되었다. 한편, 신에 대한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넘어 현대 심리학의 공감에 대한 연구와 감정이 도덕적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연구는 쇼펜하우어가 시작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 동기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니체,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은 그의 의지, 감정, 윤리에 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그의 사상은 우리가 현대 사회의 과제들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을 하는 가운데, 쇼펜하우어가 연민에 집중하는 방식은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기계가 인간처럼 고통을 빠르게 감지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을까? 그의 인성 발달에 대한 통찰력은 복잡한 도덕 세계에서 교육과 개인적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현대 신경과학은 그의 관찰 결과 중 많은 부분을 실제로 입증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마치 그 고통을 직접 느낀 것처럼 뇌가 활성화된다. 이는 쇼펜하우어가 생각했던 것처럼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우리 생물학적 본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연구는 또한 오늘날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논쟁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와 환경이 행동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의 섬세한 인성과 선택에 대한 관점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모든 행동을 직접 선택하지는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연민으로 반응하는 인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미래를 내다보며 지구적 과제 해결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기후 변화, 불평등, 갈등은 우리가 당장의 이기심을 넘어 관심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어떻게 개인의 성장을 더 나은 세상 건설로 연결하는지에 대한 그의 비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곧 그를 만나보게 된다.
1.무한한 자연과 일원론
존재한다고 할 수 있고 무한한 속성을 지닌 참된 실체가 오직 하나뿐이라면, 이 실체는 모든 것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단순한 결론에서 우주의 유신론적 모델을 계속해서 풀어내고 과거의 인간 중심적 신학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일원론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이 철학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것, 즉 자연과 신 안에 있는 전체 우주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우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 즉 자연 위에 존재하고 자연 세계의 지배자라는 관점을 생각해 보세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이러한 생각은 상상할 수 없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무한의 속성이며 단지 서로 다른 표현 방식으로 간주된다. 참나무, 갈색 곰,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하나의 보편적 실체, 즉 우주 그 자체의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물은 몇 가지 유한한 속성에서만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은 모두 우주에 속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우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는 서양 철학에서 훨씬 후대의 사상, 특히 18세기 후반 독일의 범신론 운동과 괴테와 같은 후대 문필가들의 사상을 예고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속성, 양태에 관한 명제와 정의에는 더 많은 통찰력이 숨겨져 있다. 예를 들어, 자연이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이러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무한한 방법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구상에서 우리의 삶을 정의하는 감각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종교의 많은 부분이 인간에게 존재의 고통이나 쾌락을 무시하라고 촉구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그러한 고통이나 쾌락을 우주의 속성을 경험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무한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찰은 이러한 무한한 속성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나아가 현실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음악을 생각해 보세요. 음악은 개별적인 선법, 화성,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함께 음악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구름, 개구리, 풀잎은 자연의 무한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표현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속성들과 그것들이 존재하는 무한한 실체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후대 사상가들이 그의 저서에서 일종의 초기 생태 선언을 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류를 존재의 중심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을 구성하는 생태적 그물망으로 되돌려 놓은 선언이다. 그리고 그의 급진적인 사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원성을 넘나든다. 존재와 의식의 본성을 다루는 철학 분야인 형이상학에서 가장 끈질긴 논쟁 중 하나는 심신 이원성이라는 개념이다. 이 논쟁은 스피노자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 플라톤은 의식을 두 마리의 매우 다른 말을 몰고 다니는 마부로 비유했다. 하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이고, 다른 하나는 저속하고 동물적인 말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에서도 정신은 비물질적인 반면, 신체는 단지 육체로 이루어진 탈것이라고 선언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수 세기 동안 서양 사상을 지배했지만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여기에서도 놀랍도록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우주가 무한한 속성과 무한한 표현 방식을 가진 단일 실체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정신과 신체는 단지 같은 것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정신은 우리가 인체라고 부르는 물리적 표현과 병행하여 작용하는 관념적 표현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함의는 매우 놀랍고, 의식을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 여겼던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연구에 직접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신체적 과정에는 항상 인지적 측면이 있었다. 다시 말해, 의식은 자연 어디에나 존재한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데 깊이 동의하지만, 17세기에는 여성과 어린이조차도 남성보다 의식이 부족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더 나아가 정신도 자연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과 법칙에 따라 존재하며, 모든 정신적 사건에는 물리적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주장은 자유 의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핵심에 다가간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존재는 신체를 통해 감지하고 선택함으로써 환경에 반응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 의지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자연 세계의 인과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환상을 제공하는, 인간에게 위안이 되는 허구이다. 즉, 모든 것은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연 세계에는 우연이란 없으며, 모든 사건은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행동 역시 이러한 자연의 인과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자유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자신의 행동과 욕망은 의식하지만 그것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원인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외부의 정념(수동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필연성(결정론)을 이해하고 그것에 순응함으로써 얻어지는 내면의 평화와 능동성이다. 즉, "자연 세계의 인과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그 인과 관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발현하는 것이 스피노자적 자유이다. 각설하면, 스피노자는 심신 이원론 대신, 신체와 정신을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으로 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지식 자체라는 개념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다. 거기에는 이원론도 없다. 사실 스피노자에게 지식은 삼위일체이다. 첫 번째 유형의 지식은 감각적이고 상상적입니다. 존재는 후각, 촉각, 미각, 또는 시각을 통해 주변 환경을 감지하고, 과거 경험을 지침으로 삼아 이 새로운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이 무엇일지 상상한다.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유형의 지식은 개인적이고 부분적이며 불완전하며, 개인마다 가변적이다. 두 번째 유형의 지식은 직관적 또는 본능적 지식이다. 이는 복잡한 상황이나 개념을 전체론적이고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으로, 마치 의식 아래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어떤 인식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성격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좋은 감정은 이러한 유형의 지식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에게 이는 인간 의식과 자연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더욱 확증하는 증거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형의 지식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이다. 이러한 유형의 지식은 르네상스의 이상들이 계몽주의적 합리성으로 자리를 옮기던 스피노자 시대에 막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러한 지식은 우리를 신성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 직접 인도할 수 있다.
2.새로운 합리성
우리는 스피노자가 몇 가지 엄선된 정의, 공리, 그리고 증명을 시작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으로 독특한 형이상학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주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여기서도 우리는 시대를 수 세기 앞서가는 듯한 결론들을 마주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인간 감정에 대해 논할 때, 인간 고통의 많은 원인은 사실 진정한 이해의 부족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사람이 감각이나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서만 세상을 경험할 때 두려움, 절망, 증오와 같은 강력한 감정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 더 큰 진실을 인식하기 위해 추론을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러한 진실은 그와 대조적으로 긍정적이고 치유적이다. 이러한 더 큰 진실이 바로 이성적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성성은 인간의 직관을 불러일으키고 개인적인 경험을 더 보편적인 이해, 즉 연민, 공감, 그리고 평등이 가능한 이해와 연결한다. 이성적 지식은 단순히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감각이나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에서 더 큰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적 추론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연역적 확대 해석이다. 스피노자에게 어떤 감정은 너무나 부정적이고 강력해서 마치 우리를 진정한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종의 속박인 새장과 같다. 그 치료법은 억제되지 않은 열정을 이성으로 조절된 감정으로 대체하고, 엄밀한 사고와 함께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삶과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더욱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치료법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지식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지혜라고 부른다. 이 지식은 순간적인 열정이나 지적인 상상력을 넘어선다. 특히 명상과 같은 체화된 수행을 통해 체화된 지식이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이 지식은 종종 전체론적으로 다가온다. 존재의 핵심에 있는 깊은 내면의 평화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고차원적인 이성과 체화된 지혜와의 이러한 교감을 통해 자연과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에 대한 법률적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도 복잡한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민주주의는 자연을 돌보는 것처럼 논리적이다. 과학은 신성의 더 많은 측면을 인식하는 수단이 되어, 삶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하고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다. 합리적 사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일시적인 두려움이나 증오를 넘어 연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끄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새로운 것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낯선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스피노자 자신의 치밀하게 구축된 논증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성은 이해, 소속감, 연민과의 연결, 그리고 의미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 신성과 유한성이 하나가 되는 세계 말이다. 한편, 19세기 초, 도시가 확장되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 격변의 시대에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인간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유럽 철학계를 지배했던 한 인물, 임마누엘 칸트가 있었다. 그는 도덕적 행동은 합리적 규칙과 사회적 의무를 따르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중요한 것은 원칙이다"라고 말하거나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규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사고방식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쇼펜하우어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학계 바깥에서 생활하며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했다. 그의 통찰력은 단순히 책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의 번화한 거리에서 펼쳐지는 삶을 관찰하면서 비롯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 때, 그것은 정말로 이성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깊은 유대감에서 비롯되었을까? 이 질문은 그가 당대 주요 사상가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추상적인 이론에 집중하는 동안, 그는 실제 인간 경험을 살펴보았다. 윤리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연구는 그의 사상이 주류 철학에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과학 협회로부터 보기 드문 인정을 받았다. 어쩌면 당신도 이러한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한쪽으로 쏠리고 규칙은 다른 쪽을 가리킬 때 말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모든 감정적 충동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진정한 도덕적 행동이 우리의 동기, 성격, 그리고 연민의 능력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앞으로 쇼펜하우어가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타인을 돕도록 진정으로 이끌고 있는가? 그의 답은 당신을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들을 탐구하면서 타인을 도울 때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라. 의무감, 이기심, 아니면 진정한 연민? 도덕적 행동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정직한 자기 관찰에서 시작된다. 쇼펜하우어의 통찰력은 감정과 이성,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 사이에서 당신이 어떻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3.진정한 자유와 윤리
오늘 아침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정말 당신의 자유 선택이었을까? 답은 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죠.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그는 모든 선택은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아침 루틴을 생각해 보세요.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지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은 실제로는 당신의 취향, 습관, 주방에 무엇이 있는지, 시간적 여유 등 수많은 요인에 달려 있다. 심지어 커피나 차에 대한 취향조차도 과거의 경험과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된다. 쇼펜하우어는 행동이 두 가지 원천, 즉 개인의 성격과 각 상황에 존재하는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격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와 같다. 다양한 동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형성한다. 어떤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본능적으로 달려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주저하거나 외면한다. 이는 선택된 반응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바로 여기서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이 진정한 당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낀다.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친절하게 행동할 때, 당신은 당신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성격은 당신의 도덕적 책임을 형성한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실제로 해방감을 줄 수 있다. 각각의 결정을 별개의 싸움으로 보는 것을 멈추고 더 큰 그림,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신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물론 당신의 행동은 당신이 누구인지에 의해 결정될 수 있지만, 당신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각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한 당신의 반응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기록하세요. 무엇이 당신의 연민을 촉발하고 무엇이 그것을 막을까? 이러한 패턴을 이해하면 성장할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 넘어져 인도에 식료품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도움을 주려고 달려갈 때, 머릿속으로 복잡한 도덕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처지를 알기에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이러한 즉각적인 인식, 바로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연민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서 예를 들어 그의 연민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파고들어 봅시다. 붐비는 기차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동료를 돕기 위해 밤늦게까지 기다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당신과 그들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의 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관찰은 수 세기 동안의 도덕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등 거장들은 모두 감정이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한 이성이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윤리학에서 감정을 불신하고, 합리적 틀과 논리적 원리를 선호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성이 도덕성만큼이나 이기심에도 쉽게 기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똑똑한 사람들은 타인의 필요를 무시하면서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할 논리적 이유를 찾는 데 능숙하다. 니체와 프로이트 같은 후대 철학자들도 이 개념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종종 논리를 사용하여 하고 싶은 일을 정당화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도덕적 행동은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자신의 기쁨과 고통처럼 직접 경험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결은 정의와 진정한 친절의 기반을 형성한다. 타인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처럼 진정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돕고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들게 된다. 이는 도덕성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규칙을 암기하는 대신, 연민을 느끼는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통찰력을 실천하려면 타인의 경험에 공감할 때와 공감하지 못할 때를 살펴보세요. 무엇이 그 차이를 메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세요. 이를 이해하면 도덕적 선택이 더욱 진실되고 윤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4.인간 행동의 동기와 연민
마지막으로 도덕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바쁠 때 누군가 도움을 요청했거나, 길거리에서 돈이 가득 든 잃어버린 지갑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당신의 마음은 아마도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행동을 이끄는 세 가지 근본적인 힘을 제시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흔한 것은 이기심이다. 자신의 필요와 목표에 집중할 때 이를 경험하게 된다. 지쳐서 집에 가고 싶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칠 때 느끼는 감정과 같다.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마세요. 이는 인간 본성의 일부일 뿐이다. 두 번째 힘은 악의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이다. 허풍쟁이 동료가 실수를 해서 지적을 받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당신은 아마도 이러한 악의를 조금씩 느껴봤을 것이다. 혹은 더 어두운 시기에는 복수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인정하기는 불편하지만, 이러한 동기는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그리고 세 번째 힘은 연민이다. 앞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무엇이 이득이 될지 생각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순간들을 기억하세요. 다른 사람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쁨을 느끼거나, 그들의 슬픔에 울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배고프다는 것을 아니까 식사를 제대로 즐길 수 없을 때, 이 세 가지 동기는 당신의 성격 속에서 복잡하게 뒤섞인다. 예를 들어 자선 단체에 기부할 때, 당신은 순수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베푸는 것에서 오는 좋은 감정도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규칙을 따를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걱정 때문일까, 아니면 들킬까 봐 걱정하기 때문일까? 이러한 다양한 동기를 이해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자신을 성인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이기심과 연민은 종종 함께 작용한다. 부정적인 충동을 부정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꼭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삶에서 이러한 힘들이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면 패턴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동기가 당신의 첫 반응을 이끄는지, 또는 얼마나 자주 연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지 파악하는 것은 당신의 전반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자기 성찰은 지혜로 이어지고, 각각의 통찰력은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당신의 역할을 다하게 해 준다.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성격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면, 연민이 어떻게 당신의 행동을 인도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쇼펜하우어를 매료시켜 도덕적 발달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얻게 했다.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습득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음악가는 악기를 다루는 연습과 경험을 통해 발전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행동은 실제 상황을 경험하고 반응하면서 발달한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타인의 필요에 반응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연민을 경험하는 모든 순간은 흔적을 남긴다. 타인의 고통이 당신의 고통만큼이나 현실적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할 때, 당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변화한다. 이러한 순간들이 쌓여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반응하는 방식을 천천히 변화시킨다.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번역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력 없이 그 언어로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연민 어린 행동은 처음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연민을 윤리의 기초이자 목표로 여겼던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우리의 행동이 인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타인이 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계발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타인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반응할 때마다 진정한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이 강화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전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공동체, 문화, 그리고 관계는 연민 어린 행동을 위한 기회를 만들어낸다. 삶이 항상 우리가 상황을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 주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 참여하고, 자신의 경험이 도덕적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순간적인 선택보다 더 깊은 자유를 보여준다. 자신의 인격이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함으로써, 의식적인 주의와 실천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함께 성장할 때, 이는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 연민이 윤리적 삶의 기본 패턴이 되는 공동체를 조성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지속적인 통찰이었다. 진정한 도덕적 자유는 외부에서 부과된 규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하는 인격을 계발하는 데서 온다.
에필로그
눈을 감고 이렇게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팽팽한 줄 위를 걷고 있습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마다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칠 수 있는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이 줄 위에서 한쪽은 과도함을, 다른 한쪽은 부족함을 상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지혜를 통해 이러한 삶의 길을 정복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한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황금의 중용"이라고 부르는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이는 두 극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최적의 지점, 평형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균형은 덕행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유지된다. 그렇게 덕은 줄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둥과 같다. 올바른 방식으로, 적절한 시기에, 그리고 가장 정당한 이유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덕은 우리 각자 안에 있는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핵심, 즉 인격의 본질을 보여준다. 용기를 예로 들어 보겠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까? 순수한 두려움 없음은 무모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지나친 용기에 불과하다. 반면 지나친 소심함은 비겁함으로 변질될 수 있는데, 이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균형 척도에 따르면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행동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용기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인정하고 행동으로 꿰뚫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분별력 있는 접근 방식, 즉 감정과 행동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을 덕 있는 삶의 초석으로 여긴다. 이제 이 고대의 지혜를 크고 작은 모든 결정, 가볍고 무거운 모든 결정이 있는 현대 사회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은 혼란을 가른다. 모든 일에서 탁월함을 목표로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덕 있는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으로 가득 찬 삶이나 고난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오히려 그는 다른 종류의 행복, 즉 깊은 성취감과 가치, 그리고 가장 깊은 자아와 일치하는 목적을 묘사한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 삶은 관계로 가득 차 있으며, 그중 가장 의미 있는 것 중 하나는 우정이다. 하지만 모든 우정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정은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공리주의에 기반한 우정, 쾌락에 기반한 우정, 그리고 미덕에 기반한 우정이다. 그는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바라는 미덕의 우정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만족스럽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균형이란 중간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 즉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이제 지혜와 지식의 영역으로 넘어가 봅시다. 우리가 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정보에 대한 접근은 빠르고 끝이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보를 지혜로 오인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실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지혜는 더 깊다. 보편적인 진리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포함한다. 바로 이러한 깊은 사고와 합리적인 삶의 접근을 통해 우리는 심오한 배움과 개인적인 성장을 경험한다. 본질적으로, 그것이 우리의 개인적 가치관이든, 관계든, 혹은 삶에 대한 이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메시지는 변함없이 유효하다. 그는 우리에게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의 의도, 반응, 관계, 그리고 가치관을 면밀히 살피며, 균형, 윤리적 행동, 그리고 건전한 판단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라고 끊임없이 촉구한다. 이러한 사려 깊은 삶의 방식은 우리 자신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우리 개인의 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파급 효과를 일으킨다.
참고문헌
윤리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윤리학
바룩 스피노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