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중세
중세란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의 몰락(395경)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시기(르네상스 시대의 출발점은 유럽 내의 지역과 요인들에 따라 13, 14, 15세기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됨)를 말한다.
중세의 명칭과 그것에 따르는 관례적 의미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나쁜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적인 학문과 문화를 부활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1,000년에 걸친 암흑과 무지의 시대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와 자신들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은 인문주의자들의 업적과 이상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특출함을 내세우기 위해 중세라는 시대를 창안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세는 중요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시기였으며 인문주의자들이 활약한 르네상스 시대 사회변혁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다.
410년 여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서방세계의 정치구조와 사회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은 유럽 대부분과 아시아·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대해 사회적 응집력의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유럽 남부와 서부로 이주한 게르만 부족들은 결국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지만 자기들의 관습과 생활양식을 대부분 유지했다. 그들이 새로 들여온 사회조직형태의 변화로 중앙집권적 정부와 문화적 통일은 불가능해졌다. 로마 제국시대에 이룩한 비교적 효율적인 농경술이라든가 광범위한 도로망, 급수체계, 선박 운항로 같은 질적으로 향상된 대부분의 생활방식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고 예술적·학문적 성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퇴보현상은 로마의 몰락부터 1000년에 이르기까지 암흑시대라고도 하는 초기 중세에 지속되었으며 다만 샤를마뉴 대제가 확립한 카롤링거 왕조의 개화기에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었다. 막간의 그 시기를 제하고는 한시도 거대한 왕국이나 어떤 다른 정치구조가 유럽에 자리잡고 안정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통일성의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이었다. 따라서 중세는 정신적인 기반 위에 정치구조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혼란스럽고도 모순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조차도 르네상스 시대 직전에 세속사회에 확고하게 뿌리 내린 예술적·상업적 활동들이 이루어지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유럽을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리스도교 왕국은 성직자단과 세속통치권자들이라는 2개의 뚜렷이 구별되는 직능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론상으로 이 두 집단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서 각기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세속적 요구를 충족하는 역할을 했다.
이중 첫번째 영역에서는 교황이 지상권(至上權)을 행사했으며, 2번째에서는 황제가 행사했다. 실제로는 이 두 권력이 서로 끊임없이 분쟁과 불일치에 직면하거나 공공연한 전쟁을 벌였다. 황제는 종종 성직임명권과 교리문제에 관여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교회활동을 규제하려 했다. 한편 교회는 도시와 군대를 소유할 뿐 아니라 국정문제에까지 간섭하려고 했다. 예컨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죄악이 저질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proratione peccati) 적대하는 군주들간의 세속적인 분쟁을 중재할 권리가 교황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다른 교황들은 파문을 지배도구로 사용했으며 황제의 지위를 박탈할 권리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12세기에 문화적·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이 시대에서 찾고 있다. 경제력의 중심은 서서히 지중해 동부지역으로부터 서유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딕 양식이 발전했다. 도시가 번창하고 여행과 교통은 더 신속하고 안전하고 손쉽게 되었으며 상인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농업의 발전도 이러한 발전의 한 가지 밑바탕이 되었다. 12세기에는 콩의 경작이 이루어져 사상 최초로 모든 사회계층이 균형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것은 결국 낡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다.
13세기는 중세문명의 절정기였다. 고딕식 건축과 조각의 고전적 정형이 확립되었고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사회적 단위 등이 생겨났다. 길드라든가 조합, 시회의, 수도회 등이 결성되어 각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적 대표 개념이 발달하여 자신들을 선출해준 공동체와 결부된 문제에 관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회의체가 생겨났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도하는 지적 생활 분야는 스콜라 철학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 뛰어난 대변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교부들에 관한 저작을 통해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위대하게 한데 묶은 개념 하나를 이룩해냈다. 중세에 이루어진 봉건적 사회구조의 붕괴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 및 스페인·프랑스·잉글랜드 등지의 국민국가의 등장과 아울러 세속교육의 발달과 같은 문화적 발전들은 새로운 정신을 지닌 자의식적인 새 시대의 탄생을 가져왔는데, 이는 곧 고전적 학문을 자기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였다.
신과 자유의지
에라스무스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 루터와 가까웠다. 하지만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당의 문에 “95개조 논제”가 게시되기 이전부터 에라스무스는 1516년 12월 프리드리히의 지도 신부였던 슈팔라틴으로부터 루터가 자신의 로마서 해석을 논의하면서 율법 전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이후 이미 루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95개조 논제를 본 후 루터주의자에게 편지를 썼다. 연옥에 관한 몇가지 점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일정부분 루터의 경해와 동일함을 나타냈다. 하지만 루터의 과격한 개혁과 극단적인 태도에서는 충고를 남기기도 했다. 1520년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내통하였다. 루터파라고 화살이 쏠리게 되고 그 오해는 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럴수밖에도 없었던 것이 에라스무스가 1522-1524년동안 교회의 관행을 풍자로 비판하는 내용의 저서를 썼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자이며 런던 주교였던 커스버트 턴스톨이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를 반박해 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많은 주교들이 그랬기에 할 수 없이 에라스무스는 ‘자유 의지’에 대해 편지를 썼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의 내용의 각각 이러하다.
에라스무스
플라톤적 이원론에 입각하여 인간이 육체와 혼으로 구성되었고, 인간의 혼은 다시 이성과 의지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라고 한다. 자유의지가 구원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선악을 판별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선을 행하고 추구하는 것은 자유의지이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가 구원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은총’을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정도 은총 또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신명기 30:15-19절을 한 예로 들어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16절 –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자유의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주장을 내 놓았다. 첫째는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선택권이 없는 인간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둘째로는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구분되었다고 주장한다. 마가복은 14장의 말씀을 통해 만약 신이 모든 것을 한다면 유다는 필연적으로 배반했겠지만 유다는 자신의 의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루터의 관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일부분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루터
루터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신의 선물이라는 점에서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입장이지만, 타락의 결과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신의 뜻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을 신과 사탄 사이에 놓인 예속적 존재라고 설명한다. 선을 행하는 것 또한 루터는 은총의 개입 여부로 보았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신에게든 사탄에게든 속해져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 은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할 것은 루터와 에라스무스 둘다 ‘은총’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구원’이 차지하는 비중에 차이점이 있다. 에라스무스는 은총을 상대적으로 판단하였고, 루터는 은총을 절대적으로 파악하였다. 루터 또한 성경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로마서 1장 18절 말씀을 통해 “신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모든 인간이 신의 진노 아래 있음을 뜻한다고 전제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루터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는 무가치하다고 이야기한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통해 “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인간이 율범이나 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 거듭나게 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점차 그리고 불균등하게 두 가지 새로운 요구,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분석과 사회의 전반적인 재편을 위한 정치 강령과 결합되게 됐다. 이런 새로운 사상은 사회경제적 변화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사상의 변화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분명 이런 물질적인 원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명예혁명). 이런 변화는 익숙한 세계가 붕괴하는 사태를 이해하고자 정치사상가들과 셀 수 없이 많은 보통 사람들이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였다. 사람들이 집단적 소유와 협동적 생산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재고의 결합 속에서 갖가지 사회주의 사상이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사회’라는 접두어와 ‘민주주의’가 결합돼, 다른 정치와 뚜렷이 구별되는 노동계급 정치의 명칭이 됐다. ‘사회민주주의’는 신흥 자본주의와 명백히 대비되는 새로운 사회 형태를 의미했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개인들의 경쟁’에 바탕을 두는 사회가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사회라는 사상’을 뜻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사유재산 자체가 각종 사회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레닌과 소비에트
조만간 유럽 전체를 격랑에 빠뜨린 바로 그 요인들이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에서도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빵 가게 앞에 길게 줄서서 기다리는 데 지친 여성들과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전투적 시위, 거대한 파업 물결과 병사들의 반란이 혁명을 이끌었다. 반란의 와중에 노동자들과 사병들은 이미 1905년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바 있는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와 사병 평의회)를 다시 건설했다. 그 결과 러시아에는 한편에서 임시정부가, 다른 한편에서 소비에트가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원 권력’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처음에 소비에트를 이끈 정당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다를 바 없는 ‘온건 좌파’였다. 이들은 대중의 개혁 요구를 거부했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옹호했고, 계속해서 전쟁을 지지했다. 이는 탁월한 자기 절제이며 현실적 대처였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대중의 염원이 부르주아 혁명(필자는 광주 항쟁을 이 범주에 넣고 싶다)의 규범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고(한국의 좌 지도부—사회주의 혁명) … 자신의 정책 때문에 체제 편입이라는 무기력한 논리에 사로잡혀 헤매고 있었다. … 그러면서 그들의 관점에서는 응당 혁명의 주역이어야 했던 사회 세력,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대리하려 애썼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전쟁을 끝내라는 대중의 요구를, 토지를 원하는 농민의 요구를, 임금 인상과 물가 안정과 산업 통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해결책을 끝끝내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이 여느 혁명과 달랐던 것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 1917년에는 “이원 권력을 해소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압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만이 이런 해결책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볼셰비즘은 이러한 대중의 급진화를 조직해서 권력을 차지했다. 실제의 볼셰비즘은 흔히 생각하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전위 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오직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만이 실질적인 친농민 정책을 갖고 있었다(중국의 모택동도 친농민 정책으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비볼셰비키 좌파(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최악의 실수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바라는 농민의 요구와 행동을 거부한 것이었다. 1917년에는 오직 볼셰비키만이 농민들을 중요한 세력으로 대했다.
1917년국제 정세상,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노동자·병사·농민의 혁명적 에너지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멘셰비키의 성공은 자유주의 온건파들의 승리가 아니라 군 최고사령부(코르닐로프식 쿠데타를 다시 한 번 시도했을)와 러시아 기업주들로 대표되는 극우파의 승리에 길을 터 줬을 것이다. 막대한 인명 손실이 따르는 전쟁도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상대로 잔혹한 유혈 탄압이 자행됐을 것이다. ‘이원 권력’ 상태는 지속될 수 없었다. 소비에트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원 권력을 해소했다면 대중 혁명이 이룬 성과는 무無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레닌이 더 ‘온순’했다면 멘셰비키와 타협했을 것이고, 혁명이 목 졸리도록 방치했을 것이다. 레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각을 세운 덕분이었다. 올바른 관점이라면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필요하다면 분열까지 감수한 덕분이었다. 그러니 정적들의 영향력에 도전받지 않았다면 혁명은 패배했을 것이다.
2-30년대 정치사상
양차 대전 사이 시기는 유럽의 좌파와 민주주의에 재앙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이 체제의 근간은 자본주의가 활성화 되어 복지비 충당이 필요충분 조건이 되야한다)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 붕괴했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가 승리했다.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수중에 넘어갔고, 스페인에서 공화국이 패배했고, 급기야 세계는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더욱 야만적인 학살극에 빠져들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룬 성과의 바탕에는 “개혁주의의 난제”가 있었다. 즉, “이 성과들은 결국 자본주의의 번영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전략은 결코 없었다.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도를 따라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나치에 맞서 싸울 잠재적 동맹 세력이 아니라 히틀러 세력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적인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선언했다. 독일 공산당은 정신나간 ‘초좌파’ 노선을 따랐다. 독일 노동자 운동을 단결시키기는커녕 분열시킨 것이다. 독일사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일리는 이러한 재앙을 막지 못한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의 책임을 전혀 따져보지 않는다. 이 사건만큼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 결과에 대한 여러 좌파 세력의 책임을 따져봐야 할 사건이 또 없는데도 말이다.
볼셰비키는 위로부터 사회를 변혁하면서, 1929년 이후 소련의 공업화 드라이브에서 혁명 주체의 역량이 어마어마하게 동원됐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공업화 드라이브는 노동자 임금을 대폭 삭감하고, 1917년 혁명 때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를 다시 빼앗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했음을 감안하면 “반혁명 주체의 역량”이라는 문구가 더 적합할 것이다. 또한 혁명적 볼셰비키와 스탈린의 공산당 기관원들 사이에 의미 있는 정치적 연속성이 있다는 생각도 매우 의심스럽다. 일리는 옛 소련의 현실, 옛 소련 지도자들의 정책과 그들이 자행한 숙청을 유럽 각국 공산당이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일, 인민전선 정책과 스탈린-히틀러 협약의 폐해 등에 관한 일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언급하기는 하지만 옛 소련에서 그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 때문에 20세기 좌파의 역사가 그토록 비극적이었는가? 옛 소련의 지배자들은 항상 모종의 좌파였는가, 아니면 좌파가 극복해야 할 문제의 일부로 변모했는가? 옛 소련 지배자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에 편입된 것(김대중, 문재인의 정치철학은 사회주의 이지만 대통령이 된후 친미 자본주의에 편입된 정책을 편 것으로 보인다)은 아니었는가?
그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중요한 일부로 발전했다면, 좌파는 그들에 맞서 싸웠어야 했다. 그러나 좌파는 대부분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탓에 엄청난 혼란과 사기 저하에 거듭거듭 시달렸다. 원칙적으로 이는 독일 사민당이 구질서에 집착한 것이나, 상당수 영국 노동자들이 보수당에 투표하는 현상 등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스탈린주의가 두 세대 동안 세계 노동계급과 ‘진보’ 정치에 끼친 영향은 착취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의식에 지배계급의 사상이 일상적으로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 경우에는 문제의 ‘지배계급’이 외국(소련)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공산주의’는 아마도 1924년의 ‘일국사회주의’ 노선 채택을 기점으로 자본주의에 위협이 못 되는 무기력한 정치가 됐고, 이후 영국 총파업과 중국 혁명의 대실패를 거치고 ‘제3기’ 정책을 거치면서, 결정적으로는 인민전선 정책에 이르러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포용하는 정치로 변질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러코뮤니즘과 그 계승자들의 행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공산당들은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실상의) 반혁명적 세력이 됐다. 그래서 1936년 이후의 스페인, 1944년 이후의 동유럽과 서유럽, 1956년 헝가리,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매번 민중 혁명에 반대했다.
그러니까, 1930년대는 좌파에게 끔찍한 시대였고 결국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야만이 뒤따랐다. 아마도 “20세기의 한밤중”은 스탈린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와 불가침조약(곧 파기될)을 맺어 폴란드를 함께 분할했을 뿐 아니라 ‘일국 사회주의’의 끔찍한 종결부로서 독일 공산당원 명단을 실제로 게슈타포에 넘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념대립의 해소
과거에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사상과 연결돼 있고 ‘포디즘’(그 핵심은 대공장과 케인스주의다)에 바탕을 뒀지만 이제는 바로 그 정체성 기반 자체가 사라지면서 정치적 구성체인 노동계급 자체도 함께 사라졌다. 사회주의 정치의 기초로서 ‘계급’이 끝났다면 도대체 오늘날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계급에 바탕을 둔 급진 정치가 ‘신사회운동’의 정치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관점은 유럽 좌파 대부분이 ‘초좌파주의’에서 벗어나 처음에는 사회민주주의에 타협하고 점차 ‘시장 사회주의’에 타협하고 급기야는 ‘시장주의’에 타협한 흐름의 지적인 반영이었다. 또한, ‘노동계급’은 유효한 정체성으로서 ― 집단행동을 고무하고 서로 다른 범주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연대 안에서 단결시킬 수 있고 정치적 효능을 유지하는 사회주의 전통의 조직 신화로서 ― 자신의 동력을 잃고 있었다. 1980년대 노동계급 조직의 중대한 패배들은 결코 사회적 과정의 자동적 결과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러한 패배 중 가장 큰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영국 광원들의 패배는 양차 대전 사이 파시즘의 승리처럼 ‘물리칠 수 있는’ 패배였다. 파업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고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연대 행동을 확산시키지 않아서 대처가 광원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면 좌파는 변화의 옹호자들과 신념의 수호자들로 나뉘었다. 승리를 거둔 쪽은 변화의 옹호자들이었다. 1990년에 이르면 일리가 말한 “변화의 옹호자들”이 자본주의에 굴복해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좌파, 즉 “신념의 수호자들”이 1990년에 매우 약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애처로운 보수파로 취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21세기 초에 전 세계에서 등장한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은 “변화의 옹호자들—김대중, 문재인” 사이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신념의 수호자—이재명”들이 이 운동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1990년 전후, 유러코뮤니즘은 좌파에게 급진민주주의의 공간을 더 크게 열어주면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동유럽 공식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했다. 이는 서유럽 공산당들이 ‘급진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로 자신들의 우경화를 살짝 가린 것이었다. 게다가, 우경화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몰락하는 스탈린주의 사이에서 바람직한 경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떤 좌파가 매력을 느끼겠는가!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각국 혁명에서 공통된 조직적 매개체는 ‘포럼’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서 혁명이라는 격렬한 순간은 창발적인 대중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이례적인 실험실이었다 ―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대중 반란이 대표적인 경우였지만 협상을 통해 이행을 이룬 다른 나라들의 대중 소요도 그 무대가 됐고, 동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사소하고 일상적인 반란과 존엄의 표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89년에는 무언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적 기관을 만드는 주도력이었는데, 그 자체가 대중의 민주적 반란의 필수적 요소라 할 수 있다. 포럼은 이것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는 ‘거리’를 협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원칙 문제라고 선언하면서 이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동유럽 혁명은 스페인·아르헨티나·브라질 등지에서 일어난 ‘협상을 통한 체제 전환’과 공통점이 상당히 있다. 즉, 대중 시위에 참가하라고 호소할 때를 제외하면 대중은 대체로 배제된다. 실제로 동독에서 대중은 시민포럼의 정치와 그 계급적 가정들을 명확히 거부했던 듯하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의 정부들이 사유화와 시장화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공유한 것이 좌파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다. 사적 소유, 시장, 자본주의, 이것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전복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모종의 케인스주의적 혼합경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의 시장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춘 것은 심대한 변화였다. 이러한 준비는 동유럽 개혁의 공통된 지반이 됐다. 당시 동유럽 지식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였고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주의’는 여하튼 대체로 공허하거나 도덕적 열정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유’와 시장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에필로그
로마시대는 정치 사상의 실험실이었다. 주목할 만한 체제는 공화정, 왕정, 삼두정 쯤으로 나열해 볼 수 있다. 미국을 포함한 현 세계는 과거에 비해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으로 통계에 잡힌다. 현 중국은 왕정으로 기울고 있다. 다만, 왕정이 여유치 않으면 삼두정으로 약간 민주적 스탠스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완전 민주정은 서방 세계가 환영하겠지만 당분간 힘들 것이다. 이쯤해서 북한도 짚어보자. 지난 70여년간 김씨 왕정 유일 체제가 분명하다. 다만, 북한이 개방화가 가속화 될 경우 영국식 왕정도 염두해 둘만 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이념은 진보와 보수의 대결보다는 좌우 이념 대립이 더 정확하다. 좌 지도부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함은 애초 복지 예산의 충당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는 모양새가 나올 수가 없는 구조다.
참조문헌
중세 브리태니커
현대 진보사상 조류
《더 레프트 1848~2000》의 중도 걷기
콜린 바커
중세 유럽의 주요 사상(르네상스, 기계적 세계관, 계몽주의-기독교 사상 후반부, 조덕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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