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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에서 벌어진 젊은이의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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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나른한 오후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아침이 아닌가 밖이 어두어져 있었다. 또래 아이들처럼 시간이 왜 이리 더딘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시간을 쪼개 공부하느라 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에서 꿀같은 휴식으로 심신 충전하며… 어떤 애들은 장래 꿈도 꾸며 보람찬 하루를 보냈겠지. 나는 아니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다. 형제들과 띠앗을 나누며 자란 나지만, 그네들과는 달리 나는 밖으로 안돌았다. 집에서 동화책을 보거나 흙놀이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버지는 먼지 묻는다고 나무랐지만, 이건 부모님께 양보 안했다. 
 
 
 왜이리 귀신이 무서웠던지 밤에 상당히 떨어져 있던 화장실 가는 게 어려운 일과였다. 아버지의 아우라에 가려 나는 내 성향을 죽이며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감정 표현이 좀 둔했다. 
 
 
 어렸을 적 일이다. 유치원은 안다녔지만, 그때쯤으로 기억한다. 몇 살 위 형은 기회있을 때만 되면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온 개미와 사냥꾼 화보를 내개 보여준다. 나는 개미가 다리를 물어 사냥꾼의 무섭게 일그러진 모습에 울었다. 틈만 나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도 어머니 손을 놓치면 울었다. 그래서 불행중 다행인지 나는 미아 아동이 될 염려가 없었다. 


한편,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지 않은 아이는 성격이 모나게 자란다는 것을 커가며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자주 다녔다. 꽃샘 추위에 손이 트자 어머니는 구리세린을 손에 발라 주셨다. 딸이 없는 지라 내가 딸 역할을 한 것 같다. 지금도 어머니는 무슨일이 생기면 나부터 먼저 찾으신다. 
 
 
 아버지도 무서웠지만, 어머니도 무서웠다. 성인이 된 나지만, 어머니는 잔주름이 서려 있는 얼굴을 거울에 비쳐 보시고 처진 눈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셨다. 순간 나는 어릴적 무서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들었지만, 친구에 적응하여 이제는 제법 힘이 약하게 보이는 아이들을 을러대며 을의 입장을 떠나 갑의 입장도 취할 줄 알게 되었다. 1학년 때는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를 꼼꼼이 해 가 항상 칭찬을 받은 나였지만, 아이들고 어울리는 재미에 빠져 2학년 때는 받아쓰기 점수가 낮게 나오면 어머니께 보여주기 싫어 길가에 버린 적도 있었다. 나의 교활한 면이 여지없이 드러난 때이도 했다. 
 
 
 이런 나의 악한 면은 중학교에 들어가며 여지없이 철퇴를 맞게 되었다. 변성기가 온 아이들과 근육을 길러가는 애들, 나는 신체적으로 약해서 그들을 대적하기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염없이 공부만 했다. 내게는 데미안 같은 친구는 없었다. 그 역할은 어머니가 대신 해 주신 것 같았다. 
 
 
 청소년기 즈음에는 어른들이 어떻게 벌어먹고 사는지 가끔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옆에 세들어 사는 아저씨는 태권도 단증 소유자였는데, 앞으로 도장을 차려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허풍 아닌 허풍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말을 이어갔다. 그럼 현재 무슨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중학교에 적응하고 있을 즈음 고등학교를 우리 지역으로 배치받아 우리 주인집에 같이 세들어 살며 통학하려는 어느 여학생이 들어왔다. 어머니 말로는 우리와 먼 친척 지간이란다. 나는 초저녁 잠이 많아 밤늦게 까지 공부하는 날이 많지 않았다. 가끔 자정이 넘어서 책상을 지킬 때 창문 너머로 그 누님 집에 여전히 전등이 켜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 누님 덕분에 내가 좀 더 늦게까지 책상에 않아 있는 일 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날 밤새 비바람이 일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날 아침에 밤새 도둑이 들었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었다. 옆집 누님이 뜬눈으로 울고 있었다는 말이 어깨 너머로 들려 왔다. 마루를 살펴보니 산적같이 두툼한 맨발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머리가 좋아 성적은 좋게 나왔다. 한 학년이 올라가자 달마다 반장을 돌아가며 맡게 되는 행운이 찾아와 나도 월 반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로 해마다 반장이 되는 건 당연한 현상이 되었다. 어떤 때는 전교 회장이 되기도 했고, 선생님은 나를 무한 신뢰하셨다. 하지만, 그런 나를 두고 주위에서는 나의 독선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폄하하는 아이가 많았다. 급기야는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아이도 나왔다. 선생님은 무한 신뢰를 거두시고 수업시간에 나의 고집스런 성향에 딴지를 거셨다. 선생님의 제자에 대한 사랑,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 성향이 모났다는 것을 학창시절에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고등 학교 때는 왜 이리 선생님과 안맞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등 학교 입학시험에 좋은 성적이 나올 것을 담임 선생님은 기대하셨지만, 운 나쁘게도 내가 평소 시험쳐 왔던 경향의 시험이 아니라, 대학입시 본고사형 문제로 출제하여 어떻게 시험에 합격했는지도 몰랐다. 중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많이 나무랐다. 고 2때 일이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제일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이걸 부모님이 아시면 좋아 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집으로 성적표가 안왔다. 보름전 선생님이 화분에 물좀 주라 하신걸 내가 너무 자주 주면 뿌리가 썩지 않나요, 반문했다. 어쨌거나, 나는 장유유서를 모르고 어른을 대했나 보다. 
 
 
 고3은 그야말로 스파르타 식으로 얘들을 가르쳤다. 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좋았다. 혼자 공부하는 것을 선호한 나는 그 방침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자꾸 성적은 떨어지고, 급기야는 선생님으로부터 무당에게 굿 한번 벌여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황당해서 나는 목표를 대폭 낮춰 현상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자 선배들은 왜이리 데모에 열을 내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연스레 학교 공부는 등한시하고 기숙사 사생들고 어울렸다. 내가 학교에 적응못하는 것이 내 탓인가 의구심이 들어 명동에 있는 리쿠르트에 찾아가 심리검사를 받아봤다. 관계자는 이렇게 좋은 점수는 보기 힘들다며 나를 다둑였다. 그 뒤로 청춘 에 자신감이 붙어 무슨일을 해도 잘 해 낼 마인드가 형성된 것 같다. 그렇게 청춘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었다.
 

 1. 
 
 91년 2월에 상경해서 기숙사에 입사했다. 숙모가 이불과 베게를 사 주시고 구두 한 켤레 맞춰 주셨다. 학교 오리엔테이션은 안 간 대신 소주 한병을 사다 마셨다. 이 걸 총무가 봤다. 아래층 학교 선배가 나를 초대해 대화를 좀 나눴다. 나의 외골수는 기숙사 선배들과의 담화로 많이 사라져 갔다. 기숙사에 온 건 참 잘한 일이다. 뒤늦게 깨달은 일이지만, 학창시절 부모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가 성인 예비 시기인 대학시절에는 통하지 않았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성숙한 지성인이 되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5월 경 기숙사에 여학생이 입사해 오픈하우스를 열었다. 그날 저녁 정장입은 선배에 샴페인을 터뜨리며 얄궂게 놀았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남선배가 아직 모습을 안보인 여학생좀 데려 오라고 부탁했다. 호실에 찾아가 보니 문이 반쯤 열려 있어, 나와서 사람들고 어울리라고 말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좀 있다가 그 여학생이 현관에 나타났지만, 바로 다시 자기 호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전철역으로 가는 도중 한 여학생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 그 여학생(앞으로는 ‘을녀’란 별칭을 쓴다)이란 걸 직감했다. 나는 걸음이 빨라, 을녀을 제치고 나아가야 해서, 인사를 하고 멀찌감치 앞서 갔다. 그러나 웬걸 그 여학생이 운동화를 끄집으며 뒤 쫒아 왔다. 어제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내심 불쾌했다. 
 
 
 누군가가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며 많은 담화를 즐겼다. 남학생 여학생 가리지 않았다. 무릇 예비역 선배들은 나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성인영화를 안본건 아니기에 여자가 성적 대상으로 보임즉도 하다만, 내 머리속에는 그런 계산이 없었다. 
 
 
 장마가 끝나고 피서철, 내 어릴적 소꿉친구가 속초에 살던가. 무작정 그 친구를 찾아갔다. 고속버스를 탈 때 일부러 여학생이 있는 곳에 동석했다. 이말 저말 나오고 꽤 친해졌다. 대관령 휴게소에 내려 그 친구와 무언가 주섬주섬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중에 그 친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의미인지 햇갈렸다. 더이상 진전된 관계는 없었고 그대로 헤어졌다. 거리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울려 퍼졌다. 청춘이라… 죽마 고우 집은 바닷가와 가까운 석호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천해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웠다. 매년 찾아와야지…. 헤어질 때 그 녀석이 손수 동판에 찍은 라운드 티를 한장 선물 받았다. 흑백으로 염색한 브룩실즈의 얼굴이 드러난 티였다. 귀사하여 그 티를 입고 선배들과 족구를 즐겼다. 한참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을녀가 산 책 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얄궂게 나는 볼이 브룩실즈의 이마가 닿는 가슴 트레핑으로 공을 받아 넘기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을녀는 학생운동하는라 기숙사에 가끔 모습을 비춘다. 나는 학생 운동이 마음에 안들었다. 나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였다. 왜이렇게 기숙사 식당밥이 맛있던지, 어린시절 음식 가린 내가 무색할 정도로 편식이 사라졌다. 어릴적 어머니가 멍게를 사 오셨다. 다들 가난한 형편이지만 어머니는 자식에게 만큼은 푸짐하셨다. 멍게를 한입 먹어보라하셨지만 역겨워서 뱉어 냈다. 형은 날름 날름 잘도 먹는다. 
 
 
 골고루 먹는 것은 좋은 징조라 군대에도 적응 잘하겠지. 군대는 없어서 못먹지 닥치는 대로 먹어야 힘든 일상을 견딘다. 다들 군대에 가면 군대 분위기에 흠뻑 젖어 사회와는 다른 일상을 산다. 하지만 나는 사회 일상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선임과 불화가 잦았다. 복학했을 때 예비역으로 보이는 어느 학생이 내가 장교 출신이 아니냐고 말할 만큼 나는 군대 문화에 젖어 보낸 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나를 많이 좋아 하셨다. 시험 성적이 좋은 날 집에 와 보면 아버지가 나무로 뚝딱 뚝딱 무엇을 만드시고 계셨고, 그 이야기를 하면 함박 웃음을 지으셨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 고등학교 때 성적이 떨어지니 아버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쩌다가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항상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대학은 다니고 있지만 데모하는 학교는 다니기 싫고 기숙사에서 끄적 끄적 고등학교 때 배운 문제집을 들춰 내었다. 열정은 없었다. 킬타임이었다. 운동은 열심히 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대 훈련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S대 시험 한번 쳐볼까… 당연히 낙방했고. 그 소문이 을녀에게 들어갔나 보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눈이 내릴만한 조건 은 갖췄으나 내리지는 않는 겨울날, 선배와 현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배 뒤로 을녀가 계단을 올라오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로부터 한참후 을녀가 혼자 저녁 식사하는 테이블에 동석을 시도했지만, 서로 건네는 말은 없었다. 그렇게 을녀에게 무디어져 갔다. 


2.

92년 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하고 계단으로 올라가던 중 내려오는 을녀와 마주쳤다. 오른쪽을 비켰더니 막아 서길래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시 막아 서길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다시 막아섰다. 다시 왼쪽으로… 그제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실수인가 고의인가 한참후에 고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해 여름 내 절친은 전방 철책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더위가 잦아들 무렵, 무작정 그 친구 부대로 찾아갔다. 위병들 하는 말이 현재 전방 근무라 만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 차비가 아까워 서울까지 히치하이크로 돌아왔다. 청춘이니까… 


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나중에 해주었다. 그 녀석 무언가 아는 놈이다. 95년 내가 자대 배치를 받은 첫 봄에 그 친구가 내게 면회를 왔다. 얼차려 받던 중에 외박을 얻어 그 친구 집에서 자고 이튿 날 부대 복귀했다. 


부대장은 꿈이 큰 사람이라 부하들을 잘 부린다. 매일같이 노역하거나 운동하는 것으로 부대 일상을 꾸린다. 나는 최 북단 포병부대에 근무한지라 무장 공비가, 그러니까 철책을 넘어서 침투하는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봄 대침투 작전 훈련으로 야간에 사단 수색대가 우리 부대를 상대로 가상 침투 모의 훈련을 벌였다. 잠을 안자고 초소에서 무장 공비가 침투 못하게 하는 게 임무다. 나는 졸음이 오면 초소 철조망 밖으로 머리를 내 밀어 상황을 주시했다. 그렇게 아무일 없이 날이 샜다. 


이곳 전방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칼바람이 인다. 들은 얘기지만, 내가 배치받은 전 해에 눈이 사람키보다 높이 왔더란다. 그 이듬해에도 나는 무릅까지 내린 눈속에서 혹한기 훈련을 받았다. 


봄에 진지공사 때 떼 작업을 하는데 왜이리 배가 고픈지 모르겠다. 주머니에 건빵을 들고 살다시피 했다. 최 전방인지라 PX 도 없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격 지휘부로 인사 이동되었다. 주로 하는 일은 포 낙하지점을 컴퓨터로 계산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그런대로 적응을 잘했다. 


92년 가을 기숙사에서 지방 향우회를 주관한다는 이유로 사감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즉시 향우회를 해체시켰다. 다행히 빨리 처리를 해서 사감이 퇴거 요구는 하지 않았다. 잠시 사생들과 대화를 멈춰야 해서 대학생활은 야간에 수업을 받았다. 한 학기를 주간에는 도서실에서, 야간에는 수업을 받고 귀사하면 자정 전후가 되었다. 


그 해 겨울 기숙사 현관에서 선배와 담화하고 있는 중 현관 유리 너머로 을녀가 브라자 차림으로 화장실을 들락 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상황을 무시하고 선배와 말을 이어갔다. 그 즈음 기숙사에 도둑이 들어 사감과 사생들간 대화 후 1층 여학생을 2층으로 옮기자는 데 합의했다. 그 여파로 나는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3. 

93년 5월 경,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전, 여느 휴일과 마찬가지로 J.H. 영문과 교수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운동장에서 운동권 학생으로 보이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일상사가 궁금해서 창문을 통해 관찰해 보았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그들의 연예인 방불케 하는 자유분방함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해 여름 6월 장마기간 중 일주일 정도 귀향했다가 상경했다. 기숙사에는 몇 안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103호에 살고, 102호 연세대 선배는 낮으로 자고 밤으로 공부했다. 장마비가 소강 상태일 때는 일년 중 가장 공부하기 좋은 날이다. 그날도 선선한 바람에 달빛은 구름사이로 간혹 비치고 더 공부해야 하는데 억지로 일찍 잠을 청했다. 그러다 잠결에 남자의 단발의 신음소리(허허 억! — 외치는 소리 같았다.)를 들었다. 밤에 뭐하지! 별 다른 생각없이 잠을 청했다. 


그해 어느 초가을 형님으로부터 어떤 여학생이 낙태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기숙사에 관심 끊은지 오래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러 보냈다. 몇 주 후 저녁 식사하러 가는 데 102호 선배와 을녀가 자판기에서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다. 


그해 늦가을 어느 밤, 밤 8시 정도 나는 전철역에서 기숙사로 걸어 오고 있었다. 잠시 후 뒤에서 신발 끄집는 소리가 들렸다. 왜 저러나 싶어 잠시 멈춰 섰더니, 을녀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다. 무슨 할 말이 있나? 


며칠 후 어느 저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 밖을 보고 있던 중 후배들이 을녀를 뒤따라 오면서 토끼 몰이라고 해야 하나, 을녀가 급한 걸음으로 쫓겨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왕따 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쯧쯧… 


12월 초순 경, 어느 날 졸업반인 을녀에게 KBS 관현악단 정기 연주회를 같이 보러 가자고 편지함에 글을 남겼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12월 20일경, 하트 모양을 그려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녀의 편지함에 보냈다. 그래도 응답이 없어, 전화를 걸어 한 번 만나자고 했더니 날짜와 장소(사당 역)를 알려 주었다. 


즐거운 성탄절 만나러 나가기 몇 시간 전 왠지 오늘이 내 제삿날이나 되는 듯 기분이 별로 안좋았다. 사당역 출구를 나와보니 멀찌감치 을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보였다. 


계단 올라갈 때 선제 제압으로 어깨로 어깨를 밀쳤다. 올해가 졸업 반, S대 환경 대학원에 입학 했다나! 엘리트라고 축하해줬다.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주로 툭 쏘듯이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분위가가 얼음같아 장난끼가 발동했다. 그녀의 웃음에 누런 이가 드러났다. ‘담배도 피우나!’ 


그러던 중, 그녀는 기숙사에 도는 소문을 모르느냐고 물었다. 고 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이 분위기는 아니다 싶어 그냥 헤어지자며 카페 밖을 나왔지만, 그녀의 콧방귀 는 끊임없이 들렸다. 


기숙사에 들어와서 며칠 후 카페에서 만나 얘기한 이야기가 가십 거리가 된 걸 직감했다. 일주일 정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았다. 이대로 놔두면 안되겠다 싶어 묘수를 기획했다. 


4. 

94년 신정날 아침에 식판에 음식을 채우고 나오던 중 을녀가 몇 미터 뒤에 줄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때다 싶어 그녀 옆에서 코 바람을 길게 뺐다. 그러고는 남선배들과 식당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식판에 음식을 채운 친형님은 을녀가 밥먹는 그곳을 예의 주시하며 쳐다보고는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뒤돌아 걸어와 한 쪽에 자리잡았다. 그 상황에 남학생들이 우왕좌왕 들썩이며 을녀에게 대시하는 학생들도 나오고, 여학생 중에는 밥먹다 말고 그냥 나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을녀도 식사 도중에 그냥 나갔다. 확실히 복수는 했지만, 그날 이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을녀는 귀사 인원 체크부 내 이름란에 그녀가 평소 체크하던 방식대로 하트표시를 대여섯번 굵직하게 반복하여 남들이 다 알아보도록 뚜렷히 기입하였다. 참 이상하였다. 을녀의 현 애인인 102호 선배도 아니고, 4년 터울의 친형님이 1층에 기거하고 있는데 나한테 왜 그 표시를 했는지 의아해 하였다. 더 이상한 건 후배들이 내 출입문에 침을 뱉고 다닌다는 것이다. 큰 형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 상황이 지속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104호 선배방이 침을 뱉는 후배들의 아지트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선배 방에 크게 노크를 해서 내 방으로 불러 들였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그 선배가 뭐라 말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고, 퇴거 해 주싶사 요청했고 안 나가기에 밀쳐 내 보냈다. 하트 표시가 문제야… 인원 체크부에 하트를 끼적이는 상황이 3일 지속되자, 형님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연출이라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심 안심하였다. 을녀는 신정날 일에 대해 나를 용서해 주었나…. 어쨋든 나도 장난끼가 발동하여, 그 날 저녁 8시 경 저녁 식사하러 가는 도중에 현관에서 2층으로 올 라가는 그녀를 발견하자, 계단 너머로 그녀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동요 옹달샘 한 소절 ‘새벽에 토끼가 눈비비고 내려와’ 를 읊어 대고는 식당으로 갔다. 


다음날 오전에 식당에 물 마시러 가는 도중에 을녀와 102호 선배 두 사람만 1층 남학생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참 이상하다. 두 사람 다 평소 화장실 청소는 안하는 사람들이었고 왜 여학생이 남자 화장실 청소를 하는지… 그 날 점심 먹으로 식당으로 가던 중 현관 유리문 너머로 그 두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 아침 먹으려고 문을 열고 나오자 기숙사 남학생들의 기이한 행동이 눈에 들어 왔다. 정신 병동에서나 볼 만한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그자리에서 앞으로 한발짝 뒤로 한발짝 옆으로 한발짝 빙글 빙글 제자리에서 돌고 있었다. 식당 쪽을 보자 을녀가 웃으며 현관으로 잽싸게 나가는 장면을 보았고 102호 선배는 문을 열고 닫고를 반복하며 나를 주시했다. 나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머리 회전이 급하게 돌았다. 내 기억으로는 어제 청소하던 장면과 그제 옹달샘 노래가 전부였다… 이런 걸 기적이라하나, 갑자기 지난 여름 장마통에 잠자다가 들었던 단발음 소리가 그 두사람과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고, 나는 식당으로 가며 그 두사람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로 102호 문 앞에서 옹달샘 노래를 크게 불러댔다. 


이게 웬일인가. 다음날 또 다시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참 이상하다. 나는 을녀에게 흠 잡힐 일은 안했다. 그럼 두 사람의 정사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는 얘긴데, 요 몇 주 사이 기숙사 돌아가는 형편을 보니, 내가 모르는 일이 기숙사에서 벌어졌다는 얘기다. 내가 아니라 내 큰형님…. 형님이 을녀에게 흠잡힐 일을 벌였단 말인가. 만약 형님이 일을 벌였다면, 지난 여름에 그 두 사람이 벌인 일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이건 내가 노력하여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지난 여름에 일어났던 일을 모른 척하며 이 기괴한 좀비 상황을 멈춰 주기를 을녀에게 내 속마음은 바라고 있었다. 


사회 통념을 넘어서는 이 상황이 8일여 지속되자 나는 인생 정리를 해야할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을녀는 내가 모른다고 확신이 들었는지 그 이후로는 좀비 상황 연출을 멈추었다. 참 희한한 건 공무원인 총무가 그 상황을 지켜 보며 제지를 안했다는 점이다. 좀비 상황은 멈추었지만 사생들이 식당에 출두를 안 한다는 점이다. 나는 지난 여름에 벌어진 일은 가슴속에 묻어둬야 된다는 생각을 했고, 며칠 후 아침 식사를 먹으로 식당으로 가는 데, 2층 계단에서 내 뒤를 따라 붙는 을녀를 보았다. 식당 아주머니는 둘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물어보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순간 을녀는 스터디하는 친구 사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녀는 음지 구석 지에서 나를 관찰하며 식사했고, 나는 양지 구석지에서 벽을 보며 식사를 마쳤다. 


일주일여 시간이 지나자 기숙사는 제 모습을 찾게 되었고, 104호 선배가 1층 복도에서 식당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을녀의 앞을 가로막는 묘한 신경전을 보게 되었다. 또한 며칠 전 학교 선배가 내 방에 와서 을녀와 무슨 사이냐고 물어 보았는데, 대답하기 참 곤란해서 매력있는 여성 연애인의 바디 랭귀지를 흉내내 빙그래 혀를 돌렸다. 어쨌거나 을녀는 언젠가는 말이 나오겠지… 그럼 내가 연출한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게 러브게임인가, 102 호 선배도 친형님도 아니고, 매력있는 여성이 나하고 연문을 연출 하려 하다니 시집은 제대로 갈는지 우스웠다. 


보름 후 상황이 정리되었고, 안보이던 친형님이 점심 같이 먹자고 나을 불러 냈다. 형님한테 무슨 말이 나오기는 할텐데, 형님의 안색이 안좋아 보였고, 급기야 지난 20여일간 벌어진 일에 대한 논평은 한마디로 안했다. 


2월 하순경 귀가하여 형님과 마주하였다. 형님은 나에게 본질적 으로 나쁜 놈이라 몰아세웠고,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여자 착하더라는 말 한마디 내게 던진게 고작이었다. 을녀가 마음에 있는 건지… 


5. 

2월 말 을녀는 기숙사를 떠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지만,친형님도 3월 기숙사를 퇴거하였다.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삶의 의욕이 없어졌다. 아침 식사마다 나를 관찰하는 102호 선배의 두 눈을 피해야 했고, 나는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였다. 이제는 문제가 기숙사가 아니라 내가 다니는 대학이였다. 104호 선배에 대한 무뢰한 행동은 지역 감정을 유발시킬 만한 단초를 제공했고, 나는 학교 학생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지난 1월 기숙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긴 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게 내가 느낀 실존의 한계 상황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S대 대학원을 찾아가 을녀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다. 웬걸 나를 보자마다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을녀에게 오해를 받고 있단 생각이 들어 다시는 찾아갈 엄두를 못냈다. 


그해 여름은 찌는듯이 더웠다. 병무청에 자진 입대 신고서를 내고 가을학기에 과 선배 한 사람에게 군대간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춘천 102 보충대에 친형님과 같이 갔다. 형님은 내게서 무슨 정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말해 줄 수 없었다. 


띠앗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일까, 지금도 되내여 보지만, 형님과 나 사이는 바다만큼 큼지막한 장애물이 있음이 느껴진다. 동생 나름의 인생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자기 인생에 종속시키려는 형님은 대학 생활 내내 동생과 투닥거리는 일로 얼룩져 있었다. 


6. 

을녀와의 일이 잘 풀렸으면 내 인생은 날았을 것이다. 제대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 청춘을 만끽하며 꿈을 불태운 날이 1년이 채 안 되었다. 신병 훈련소에서 나는 다시 고등학교 때처럼 마음이 혼탁 해져 합리적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수료식이 다가오면서 대학생활은 잊혀져 갔고, 마지막 미션인 40킬로 행군은 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 후반 10킬로 남겨놓고 주저 앉고 싶었지만, 버텼다. 대학 생활 때 운동을 열심히 한 덕택이었다. 


형님과의 불화는 수료식 이후 콘도에서도 벌어졌다. 어머니도 그 장소에 계셨지만, 뜻이 안맞는 형님과는 좋은 띠앗이 뭔지…. 


일병을 달자 부대장은 태권도 단증 합격율에 부대 명예를 걸고 부대원을 지휘했다. 부대장은 대 여섯 조로 나누어 연습시키다가 한 번은 어느 정도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점검하였다. 그 중 제일 향상이 더딘 조를 골라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언제 부턴가 부대장은 오리를 수로에 내놓아 기르고 있었다. 그 수로에 일직선으로 세워 놓고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오리가 놀던 물에 잠수시켰다. 난 군대에서 희한한 일을 자주 겪었다. 많은 일들 중에 하나지만, 이 경험이 제일 기억에 남는 일화이기도 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맡은 일에 열심히 하며, 구타를 피하려고 선임 들이 맡은 임무까지 내가 도맡아 일처리 하였다. 군생활 중반기에 군대에 완전 적응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아침에 대변 볼 시간조차 여유치 않게 바쁘게 보냈다. 그래서 작업하다가 시냇가에 용변을 보기도 했다. 그 냇가의 원천이 북에서 넘어온 물이렸다. 북한 여인이 멱을 감기도 했을까, 선임들한테 여인의 향기가 느껴 지냐고 장난치기도 했다. 


대대 전술 경연대회에서 우수함을 인정받았고, 생활의 여유를 느꼈지만, 대학 서적은 부대 내로 반입 안했다. 오로지 임무에 충실하였고, 이대로 주저 앉기를 넌지시 권하는 분도 있었지만, 군에 말뚝 박기는 싫었다.


병장 때 여름 한 더위에 부대장은 부대 주변 시냇가로 부대원을 데려가 수영할 사람은 하라고 했다. 나는 수영을 못했지만 물놀이를 하고 싶어 안되는 팔놀림을 했다. 가라앉을라 치면 땅을 짚었다. 이를 두고 후임이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정기 훈련은 일년에 4번 정도 한다. 봄, 가을은 실 사격 훈련, 여름에는 유격을 받고, 겨울에는 혹한기 훈련을 한다. 내가 계산한 포탄이 목표에 맞았다면, 기분이 업되겠지. 윗선으로부터 질책은 안받았으니 제대로 계산은 되었겠지. 


귀가의 꿈을 꾸고 있던 어느날, 전역 3개월 앞두고 강릉에 무장 공비가 출현하였다. 대대 상황실로부터 보고를 들어보면 공비가 북으로 산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선임하사에게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건의했다. 공비가 산을 탓으면 지금쯤 우리 부대 부근까지 올라왔을 것이다. 그런 어느날 상황실로 급전이 왔다. 선임하사가 우리부대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말이다. 나는 통신병과 선임하사가 나누는 대화 내용을 듣다가 대대에 급히 보고했다. 보고한 후 얼마 안있어 장난 전화라는 선임하사의 말을 듣고는 대대에 번복 보고를 할까 망설이다 공비가 주변에 있을 거라는 심증을 굳히고 보고하지 않았다. 이틀 뒤 공수부대 200여명이 헬기 레펠을 타고 내려와 우리 부대에 진을 쳤다. 수색한 지 일 주일이 못되어 공비 한 명을 사살했다. 이후 우리에게도 탄약이 지급되었고 공비가 있을 법한 주변산을 수색하게 되었다. 수색한 지 며칠 후 대나무 숲 가운데에 며칠 사람이 기거한 흔적도 보였 다. 우리 국군의 매복지점인지 공비가 머물렀던 곳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오후 임무 도중 인원 점검할 때 내 직속 막내 후임이 실탄 탄창을 분실한 일이 발생했다. 부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탄창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오던 길을 돌아가 수색한 지 3시간 만에 찾는 데 성공했다.


공비는 대부분 사살했고 한 두명만이 철책을 넘어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지칠대로 지쳤다. 11월 추위에 먼 산에서 밤새 매복해야 했다. 나는 부대원이 수색하는 상황을 수시로 대대에 보고해야 해서 숙소에 부대원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혼자 상황실을 지켜야 하기에 언제 긴급 전갈이 올지 긴장하느라 용변 볼 시간조차 없었다. 강추위가 다가 올 무렵, 날씨가 너무 추워져서 상부에서 작전을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7. 

전역 당일 서울행 버스에서는 조관우의 늪이 울려 퍼졌다. 가을 학기에 복학해야 하기에 여름까지는 집에 있었다. 가끔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면 트로마에 걸렸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형님은 여름에 지방에 내려와 잠시 보냈다. 동생한테 정보를 캐는 습관은 없어진 것 같았고, 나한테 한대 맞을 것 같다고 놀려 대는 버릇은 여전하였다. 기숙사에 다시 갈까도 생각했지만 웬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학교앞 고시원에 기거할 생각이었다. 


학교 분위기는 많이 차가웠다. 이대로 다녀야 하나 고민했고 이번 학기만 다니고 다른 길을 모색하려고 시도하였다. 대선 후 신림동 고시촌 분위기는 학교보다 더 차가웠다. 98/4/19날 S대 학생들의 그날 의거를 시연하는 장면은 인상깊었다. 곧 집으로 내려갔다.


8. 

집에 내려와 요 근래에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해 보니, 을녀는 아마도 결혼했을 것이고, 기숙사 건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사회에서 갑론을박하는 과정의 구심점에 내가 위치해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나에 대한 당원들의 줄기찬 공격은 나의 잘못을 드러 내려는 의도가 보였다. 당원들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며 나를 압박했다. 내가 군대에 있는 기간 을녀가 무슨 말을 했길래 사회가 그렇게 들썩였다는 말인가… 


그해 5월 형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는 화간을 했단다. 나 처럼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큰일을 벌였다는 말을 첨부했다. 이제서야 나는 그 당시 내 추론이 맞았다는 것을 인식했고, 형님께 그해 여름에 벌어졌던 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알고 문제를 풀라는 얘기다. 


94년 그 때로 되돌아 가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해 여름에 벌어진 일을 말못한 이유는 형님이 만약 을녀에게 크게 일을 벌인 것이 사실이라면, 나로인해 형님이 다칠게 뻔하였다. 그리고 을녀도 자신이 102호 선배와 벌였던 일을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연기를 한 것으로 보였다. 형님이 일을 벌인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도 그 커플이 관계를 가졌을 거라고 가늠한 일을 사실인양 떠벌일 수 없었다. 정황증거가 부족해서 사감에게 말을 못했다는 얘기다. 또한, 그 둘이 결혼이라도 하는 날에는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된다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형님이 을녀에게 벌였다고 가늠한 생각이 사실로 드러나서 내가 어림잡았던 일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윽고 을녀가 사람들에게 소문냈었던 말들이 당원을 통해 내개 전달되었다. 을녀는 내게 결혼의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녀를 차지하려고 일을 냈다거나, 내가 그녀를 좋아해서 그 일을 벌였다거나, 내가 정치적으로 크고 싶어서 그 일을 벌였다던가, 도무지 어처구니 없는 말을 늘여 놓았다. 그 해 여름에 벌어진 일을 감추려고 나에 대해 거짓 공세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다. 


그날 102호 선배와 관계를 벌였던 장면을 내가 보았다고, 아니면 내가 을녀를 좋아해서 그녀를 죽이려 했다던가, 스릴러 소설에서나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서 사람들에게 어필했었던 것이다. 


또 기숙사에서 내가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과 로맨스를 즐겼다는 허황된 사실도 적시했다. 을녀 자신이 벌였던 스캔들을 나에게 모 조리 뒤집어 씌웠다. 내 옆방에서 그녀가 즐긴 일을 내가 즐긴 것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내가 포르노 배우라는 터무니 없는 정치 공세를 이어 갔다. 형님이 을녀 자신에게 벌인 일도 내가 한 일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지난 5년여 동안(1994-1998) 나를 형님 아바타로 둔갑시켰다는 말이다. 


더 황당한 것은 을녀가 고등학교 때 성폭행한 남성들 중 한 명이 나와 닮았다나, 아니면 그 중 한 명이 나라고 엄포를 놓거나, 말도 안되는 견강부회의 주장을 하였다. 


그해 봄에 학교에 복학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했을까, 형님을 팔면서 학교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사춘기가 막 시작됐던 그해 초가을에 먼 친척 여고생에게 벌어졌던 일을 내가 한 양 둘러대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에필로그 

을녀(실명 정상아, 연세대 가정학과, 서울대 환경대학원)는 현재까지도 그 일에 대한 명확한 자기 입장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적은 보고서이다. 많은 국민이 이 사건을 알게되면 더 나은 정치 문화를 위정자에게 요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일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점 정숙히 사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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