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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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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 메르 18에서 과거의 유물이 현재 의 정치상황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력 한 문학적 수사로 강조한 바 있다. 2 차대전 이후 독립을 성취한 대부분의 제3세계 신생국가들은 독립 이후에 도 식민지 시대의 정치사회적 유산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특히 제3세계 신생독립국가에서 군사독재나 권위 주의 정권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 를 파키스탄의 정치학자 함자 알라비 (Hamza Alavi)는 식민지 체제의 억압 기구를 유지 강화하는 과정에서 군, 경찰, 관료 등이 시민사회에 비해 지 나치게 성장하는 과대성장국가 현상 으로 설명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19세기 말 제국주 의 국가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나 동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과는 달리 스 페인, 포르투칼 등 초기 제국주의 국 가로부터 독립한 남미의 경우 독립의 시기는 달랐지만 식민지 시기에 형성 된 여러 특징들이 독립 이후의 정치 상황에 매우 중요한 초기 조건이 되 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식 민지 시기가 남미정치에 남긴 중요한 유산은 크게 언어와 인종에 따른 균 열, 식민지 본국인들에 의한 대농장 제도의 영향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콜럼버스 혹은 아메리고 베스 푸치의 노력으로 서구인들의 관점에 서 남미가발견된이후 금은보화와 무역, 기독교 포교 등을 명분으로 수 많은 백인들이 남미에 이주해 살기 시작했고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이 주시킨 흑인을 포함하여 남미는 원주 민 인디언, 백인, 흑인, 뒤늦게 이주해 온 동양인과 이들 간의 혼혈인(메스 티소, 물라토, 잠보) 등 수많은 인종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으며, 그 결 과는 지금까지도 중남미 정치의 중요 한 균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체 인구 중 백인 비율이 98%에 달 하는 아르헨티나를 제외하면 대부분 의 남미 국가에서는 소수의 백인이 지배계급을 구성하고 있으며, 나머지 인종들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정치 엘리트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제 혹은 소외는 남미의 민 주화 이후 선거정치에서 중요한 투표 결정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식민지 경 영은 철저한 중앙집권적 식민정책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그 방식은 식민 지 본국의 정치, 사회, 종교, 장원제도 를 그대로 모방해 옮겨놓은 것이었 다. 이 중에서도 남미에 가장 지속적 으로,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대 농장 제도였다. 대농장 제도는 스페 인과 포르투갈의 국왕이 정복자와 왕 실 측근에게 토지를 하사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제도로 인해 원주 민 인디오들은 노예화되어 중세의 농 노와 같은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대농장 제도로 인한 토지의 집중은 남미의 독립혁명 이후에도 지 속되어 경제발전의 장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농장 주위의 소도시를 농장주가 지배하며 소작인들의 경제 적, 정치적 발전을 저해하는 퇴행적 결과를 초래했다.

 

I.정치체제

 

중남미의 독립혁명

 

중남미의 독립과정은 영국의 식민지 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미국이나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결과 독립하게 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우와 비교 된다. 남미의 독립은 주로 식민지 본 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주의가 쇠퇴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집중되었 다. 이 시기에 남미의 독립혁명이 가 능했던 원인은 크게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중남미의 독립을 가능케 한 외부적 조건은 첫째,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남미 독 립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볼리바르 는 자신을 남미의 조지 워싱턴에 비 유했다. 실제로 존 로크, 장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 미국과 프랑스 혁명과 정에서 발생한 계몽주의 사상은 식민 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스페인 본국의 백인들과 아메 리카 태생 백인(끄리오요) 사이의 갈 등이 큰 역할을 했다. 끄리오요들은 같은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본 국인들에 의해 차별을 받았는데 이들 이 식민지에서 시의회 진출 등 정치 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본국인들에 저항하는 독립혁명의 주역으로 등장 하게 되었다. 셋째는 스페인 본국과 왕실의 발전만을 고려하여 지나치게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식민지 상품의 생산을 본국 경제의 요구에 따라 재 단했던 강압적인 식민정책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정책은 당 연히 남미의 독자적인 경제발전을 저 해했으며 끄리오요들은 이러한 식민 지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러 한 스페인 식민체제 자체의 내부 모 순과 함께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스페 인 왕실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사태 가 벌어지면서 남미는 식민지 본국으 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환경 적 요인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남미의 독립을 외부적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 다. 남미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활동 한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미에는남미 해방 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 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등 남 미 남부지역을 해방시킨 호세 산 마 르띤 장군과 같은 독자적인 독립혁명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오늘날까 지 중남미지역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고, 도처에 이들의 기념 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최근 베네 주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볼리바르 혁명정신 계승을 내세우는 등 이들은 남미의 좌파 민중세력에게 중요한 정 치적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중남미의 독립은 이들 국가에 완전한 해방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구제국주의 국 가들이 누렸던 기득권이 사라진 대신 그 이후에 등장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역의 자유와 투자를 빌미로 중남미에 적극 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새로운 차원에 서 종속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독립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각 지방세력의 유력자인 까우디죠들 이 독립 이후에는 지방의 토호가 되 어 내부 권력투쟁에 몰두한 결과 끊 임없는 정치불안을 야기하였기 때문 이다. 이들은 부패정치와 족벌정치 등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행 태로 남미정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 쳤으며, 그 폐해는 20세기까지 계속 되었다.

 

미국의 영향력

 

남미의 정치상황을 설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는 세계 유일의 초 강대국인 미국과의 지리적 근접성이 라는 지정학적 특성이다. 미국은 건 국 초기부터 멕시코 등 남미 국가들 과 전쟁을 통해 영토를 병합하는 등 미주대륙의 패권국가로서 위상을 명 확히 했으며, 이러한 영향력은 냉전 이 끝난 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미국의 제5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먼로는 1832년 먼로 독트린을 통해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먼로 독 트린이 국제사회 문제에 미국이 개입 하지 않겠다는 순수 고립주의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었다. 먼로주의는 당 시 구대륙인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패권 경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조 건으로 유럽열강이 신대륙인 아메리 카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미국은 자국 의 정치, 사회, 경제 제도들이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실현하는 데 가장 훌 륭한 제도이므로 이를 다른 나라에 전파시키는 것이 미국의명백한 운 명이라는 논리로 남미 국가들에 개 입해 들어갔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남미 지역의 새로운 패 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1920 년대 이후에는 파시스트 세력과, 2차 대전 이후에는 공산주의 세력과 경쟁 하는 과정에서 남미를 자신의 세력권 으로 유지하기 위해 공세적인 외교정 책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열거하면, 19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 전복을 위 한 미군 파병, 1961년 쿠바의 카스트 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피그만 침 공, 1965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보쉬 정권을 전복시킨 미 해병대 파병, 1973년 CIA 공작에 의한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80년대에는 ‘위대한 미국’을 내 세운 레이건 정권이 니카라과 소모사 독재정권의 방위군 주축인 콘트라 반 군을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1983년 에는 그라나다에 침공하였다. 1989년 에는 미국이 지배하고 있던 파나마 운하의 국유화를 시도한 노리에가 정 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파나마를 기습 공격하였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없지는 않았 다.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 통령은 1933년 미국이 종래 유지해왔 던 개입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주변국 가들과의 선린정책을 추구하였으며,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1977년 파나마 의 또리호스 대통령과 운하협정을 맺 고 1999년 파나마 운하의 반환을 약 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미국에서 진보 적이라고 평가받는 대통령들에 의해 수행된 특수한 예외에 불과할 뿐 미 국의 일반적인 정책은 중남미 국가들 에 대한 공세적인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에 대한 반발로 남미의 지성계에서는 종속이 론 등 미국의 패권을 비판하는 이론 적 연구가 성행하기도 하였으나 1990 년대 소련의 붕괴와 냉전 해체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사실 상 소멸함에 따라 다시 한번 중남미 는 미국의 뒷뜰로 간주되고 있는 실 정이다. 결국, 미국의 노골적인 개입과 종속 상황에 대한 남미 민중들의 분노가 오랜 세월 축적되면서 남미의 반미감 정은 이 지역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쿠바 의 카스트로,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등 남미의 좌파 지도자들이 최근 반미를 기치로 내걸 고 있는 것은 중남미 민중들의 이러 한 반미감정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중주의와 군사독재 20세기의 전형적인 남미정치를 이야 기할 때 거론되는 특징은 민중주의라 불리는 포퓰리즘과 군사독재의 횡행 이라 할 수 있다. 다분히 좌파적 성격 을 띠는 민중주의와 우파적 성격이 강한 군사독재 체제가 20세기 남미역 사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 것은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남미가 처한 현실이 극약처방을 요구할 정도 로 심각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남미의 민중주의는 통상 한국의 언론 에 의해 ‘경제적 포퓰리즘’으로 소개 되며 일종의 새로운 좌파적 낙인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실상 중남미 민중주의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그러한 형태의 정치가 출현할 수 있었던 남미의 사회 현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30년대까지 남미의 정치는 식민지 체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대농장 에 기반한 지주과두세력(까우디죠)간 의 권력투쟁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기존 지 배세력이 쇠퇴한 후에도 영미 자본과 의 협력 아래 대중들을 끊임없이 수 탈하고 정치적으로 배제하며 엘리트 과두체제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남미의 민중주의 는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중남미 민중 들을 돌보는 가부장적 이미지를 내세 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사회복지와 노 조 조직을 제공했고, 이들에게 처음 으로 국민으로서의 사회적 시민의식 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기층 국민들 사이에 지지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중남미 민중주의는 기존의 지배층에 의해 포섭된 정당이나 의회 등 대의제도를 불신하고 직접 민중과 소통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중남미 정치를 ‘사인화’하고 민주주의의 제도 적 안정성을 훼손시킨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민중주의의 의해 사인화되거나 파당 화된 중남미정치의 스타일은 민중주 의 지도자들이 50년대 이후 군사정권 에 의해 축출된 이후에도 중남미의 중요한 정치적 특징으로 남게 되었으 며 군사정권 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 후에도 페론 등을 추종하는 정당과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 로써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해 좌우되 는 정당운영과 고질적인 파당정치를 지속시켰다. 민중주의 정부를 대체한 것은 칠레의 피노체트와 같은 현역 군인들의 쿠테 타에 의한 군사독재 정권이었다. 노 조와 민중 부문의 이익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직접 대변하는 민중주의 와 달리, 군사독재 하에서는 군부 장 성과 이익집단들이 특혜를 향유했다 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정당과 의 회 등 대의 민주주의의 제도적 매개 를 무시하고 훼손했다는 점에서는 민 중주의와 군사독재의 사이에 일정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경제정책에 있어 서도 중남미 민중주의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외채위기가 누적되었으며 이러한 경제위기는 199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다시 군사독재정권이 권력 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개혁 중남미의 군사정권이 민주화를 통해 민간정권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중남 미의 군사정권은 1989년까지 집권한 파라과이의 알프레도 스토로에스너 를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했으며 칠레 는 1990년까지 피노체트가 집권했지 만 1989년 12월의 대선에서 야당연 합의 파트리시오 알윈 후보가 승리하 여 정권교체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남 미의 군사정권은 1980년대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중남미 대 부분의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중남미지역에 는 정치의 민주화와 더불어 경제적 측면의 세계화와 개방화의 거대한 물 결이 밀려들었다. 이것은 남미국가에 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면적인 실시를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적인 종속이 론의 대부였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전도사로 변 신한 브라질의 카르도주 대통령, 대 표적인 페론주의자였음에도 집권 이 후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단행한 아 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 멕시코의 살리나스 대통령,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추종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 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라 불리는 급진적 개방화와 세계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 재무부를 비롯한 워싱턴 정가 뿐 아니라 IMF나 세계은 행 등 다국적 금융자본이 공유하는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외채위기에 대한 처방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리고 그 핵심은 정부의 규제나 개입 의 배제, 국내시장 개방, 민영화, 재정 긴축 등 시장만능주의적 정책을 중심 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급진적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 진한 중남미의 민간정부들은 일견 중 남미의 고질적인 초인플레이션 현상 을 잠재우고 공기업 매각을 통해 정 부 부채를 해소하는 등 일정한 성과 를 거두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개혁은 외국자본의 원리금 상환 에 주안점을 두고 선진국 금융권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 을 뿐 개발도상국인 중남미의 성장 잠재력을 회복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소농민, 노동자, 원주민들은 일 방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강요당하였 다. 이것은 다시 고용없는 성장 (jobless growth)으로 이어져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킴으로써 사회적 약 자들이 겪는 고통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1차 핑크타이드 1990년대 중남미의 민주화 열기를 바 탕으로 선출된 민간정부의 과격한 신 자유주의적인 시장만능주의 정책은 중남미 민중들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으며, 그 결과 다시 새로운 좌파 적 대안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 다. 이에 따라 2000년 이후 남미에는 넓은 의미의 ‘좌파’로 불릴만한 정치 세력들이 잇달아 집권에 성공하며 1990년대 유럽에 이은 남미판 ‘좌파 의 열풍’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평 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독일의 슈뢰더 등이 주도했던 유럽식 ‘제3의 길’흐름과 달리 21세기 남미 좌파들 의 실험은 한 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유 럽의 제3의 길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가 추구하는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 화의 대세를 일부 수용하면서 그 대 응방향을 좌파적 시각에서 모색하는 ‘타협적’수준에 머물렀다면 남미의 좌 파 세력들은 강경하고 극단적인 반신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입장에서 부터 ‘제3의 길’과 유사한 온건 대응 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극단적인 대응의 대표적인 사례는 베 네주엘라와 볼리비아의 예를 들 수 있다.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 대 통령은 세계 3위의 풍부한 석유자원 에다가 이라크전쟁 이후의 고유가 특 수를 바탕으로 새로운 ‘석유사회주 의’를 주창하고 있다. 집권과 동시에 에너지 국유화 정책을 단행한 볼리비 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이들의 자원민족주의 혹은 석유사회주의 노선과 단호한 반 미정책은 미국 대자본의 이해와 직접 충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 게 평가할 수 없는 흐름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브라 질의 룰라 대통령은 집권 후 온건한 제3의 길 노선을 걸었다. 룰라는 집권 후 안팎의 예상와는 달리 소위 ‘다이 어트 룰라’를 표방하며 중도 좌파로 변신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협상에 참여하는 한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으로 구성되는 남미공동시장 (MERCOSUR)을 강화하면서 좌우를 아우르는 제3의 길을 지향했다. 이것 은 중남미의 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의 폐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문제의식 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대응 방식은 각국의 상황과 권력주체의 성 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남미의 좌파열풍은 브라질의 룰라, 베네주엘 라의 차베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등으로 이어지다가 페루와 멕시코 대 선에서 우파 후보가 승리함에 따라 다소 주춤해지는 듯 하다. 좌파와 쇠락과 융성 2022년 6월 19일 치러진 대선에서 구 스타보 페트로(Gustavo Francisco Petro Urrego)가 콜롬비아 역사상 첫 번째 좌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외신들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두 번 째 ‘핑크 타이드(Pink Tide, 좌파 물 결)’가 밀려오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 다. 냉전이 종식되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선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전 례 없는 정치사회적 변화로 소용돌이 쳤다. 대륙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 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주도한 세력 들은 자신들을 좌파 혹은 중도좌파로 규정했다. 학계와 언론은 좌파의 등 장을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차별하기 위해 ‘핑크 타이드’라고 불렀고, 베를 린 장벽이 무너지고 ‘역사의 종언’이 선언된 시점에 나타난 시대착오적 현 상이라는 점에서 ‘좌파 도미노’, ‘좌파 휘몰이’라는 우려와 조롱이 뒤섞인 언사를 사용하기도 했다.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던 첫 번째 핑크 타이드는 21세기 두 번째 10년 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밀려올 때만 큼이나 빠른 속도로 퇴조했다. 대륙 전체의 정치적 변화의 전위에 섰던 베네수엘라는 2013년 우고 차베스 (Hugo Rafael Chávez Frías)가 사망한 이후에 친(親)차베스 진영과 반(反)차 베스 진영으로 분열되어 극심한 혼란 을 겪고 있고, 브라질 좌파 진영은 노 동자당 출신 룰라 다 시우바(Luis Inácio Lula de Silva) 전 대통령의 뒤 를 이어 집권했던 지우마 호세프 (Dilma Vana Rousseff) 대통령의 탄핵 으로 심각한 정치적·도덕적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2015년 이후 치러진 아르헨티나(2015), 칠레(2017), 브라 질(2018), 페루(2018), 파라과이(2018) 대선에서 보수우파 정권이 잇따라 승 리하면서 대륙 전체의 정치 지형은 급격하게 우경화되었다. 그러나 ‘핑크 타이드’를 밀어냈던 우 파 세력은 큰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 고 부서졌다. 2018년 멕시코 대선에 서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가 승리하고 아르헨티나(2019), 볼리비아(2020), 페루(2021), 칠레(2021)에서 연달아 좌파 정권이 재집권함으로써 두 번째 ‘핑크 타이드’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구스타보 페트로의 합류로 더 욱 뚜렷해 졌다. 아마도 2022년 10월 룰라의 대선 승리는 이러한 흐름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융성했던 좌파의 퇴조 지난 20여 년 동안 롤러코스터처럼 좌파와 우파의 조류를 만들고 있는 시대의 바람은 무엇인가? 첫 번째 핑 크 타이드의 퇴조는 ‘신’좌파의 실패 를 의미하는가?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우파의 조류가 순식간에 소멸된 이유 는 무엇인가? 두 번째 핑크 타이드의 출현은 우파의 실패 때문인가, 좌파 의 혁신과 새로운 가능성 때문인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틴아메리 카는 1960~1970년대의 군부 독재와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 정치에서 벗 어나 민주화로 이행했다. 그와 동시 에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실험장 이 되었다. 외채위기의 수렁에 빠져 있던 라틴아 메리카 국가들은 워싱턴 컨센서스 (Washington Consensus)가 제시한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선거 캠페인 내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당들도 정권을 잡자마자 공약을 곧바로 공약 (空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과정에 서 세계화라는 외피를 쓴 신자유주의 적 시장근본주의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강력한 신탁(神託)을 유포하면서 사회적 배제와 경제적 양 극화를 심화시켰다. 그 결과는 빈민 계급(pobretariado) 혹은 불안정계급 (precariat)으로 불리는 대규모 사회집 단의 출현이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 었지만 조직되지 않고 동원되지 않았 던 빈민계급/불안정계급은 신자유주 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의 대열에 합 류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지형을 바꿔 놓 은 첫 번째 핑크 타이드는 멕시코 사 파티스타(Zapatista) 반란,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 볼리비아와 에콰도 르의 원주민운동, 아르헨티나의 피케 테로스(Piqueteros)운동, 칠레의 국민 적 저항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결과물이었다. 불평등하고 가난한 민 주주의라는 역설적 상황에서 동시다 발적으로 활성화된 비계급적이면서 탈정치적이지 않은 사회운동은 정치 를 확장하고 공공성 영역의 회복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을 좌파로 규 정한 세력들의 시급한 목표는 계급투 쟁을 통한 사회주의의 건설이 아니라 재정 정책을 통해 부의 재분배를 강 화함으로써 빈곤을 퇴치하는 것이었 다. 룰라가 실시했던 ‘기아 제로(Fome Zero)’, ‘가족 기금(Bolsa Familia)’, 빈 민층 취학지원 프로그램이나 차베스 가 추진했던 다양한 ‘사회적 미션’ 프 로그램이 대표적인 선별적 복지정책 의 사례였다. ‘사회적 미션’ 프로그램 은 교육과 보건, 고용과 식품 보급 등 에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었고 빈곤율을 감소시키는데도 크 게 기여했다. 좌파 정부가 이런 프로그램들을 실천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 이 가져온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 덕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시장 과 국제금융기구에 종속되어 있는 라 틴아메리카 경제는 2008년 세계금융 위기로 세계경제가 후퇴하고 국가 교 역 조건이 크게 악화되면서 경제적․ 사회적 혁신의 동력을 상실했다. 핑 크 타이드의 퇴조는 좌파 정부가 정 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불평등 사이 의 괴리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파 정권의 실패로 권력을 가져간 우파 정권 역시 이러한 괴리를 좁히 지 못했다.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네가 진다’는 냉소적 인 표현처럼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이름의 시장근본주의는 제3세계인 라틴아메리카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 다. 더 나아가,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 주의의 신탁은 세계를 전 지구적 북 부(the global North)와 전 지구적 남 부(the global South)로 재편하고 있 다. 전 지구적 북부와 전 지구적 남부 는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정치적 위 치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지 구적 북부와 전 지구적 남부를 가리 지 않고 사회적 배제와 경제적 양극 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브라질의 페 르난도 카르도주(Fernando Enrique Cardoso) 대통령이 사임(2002)하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세계화 내부에는 대안이 없고, 세계화 외부에는 구원 이 없다”. 시민들이 무장투쟁보다 단 호한 선거혁명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음에도 불 구하고, 상황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좌파 이데올로기의 남미식 정의 ‘신’좌파는 ‘민주주의=자본주의=자 유주의’ 대(對) ‘사회주의=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이해 되지 않는다. ‘신’좌파의 역사적 의미 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관 점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를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20세기 역 사에서 1950년대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Juan Jacobo Árbenz Guzmán) 정권, 1959년 혁명 이후 쿠 바, 1970년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 데(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정권, 그리고 1979년 니카 라과 산디니스타(Sandinista) 정권을 제외하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자 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20세기 초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 협한 것은 외부의 공산주의와 파시즘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 체 제 내부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부딪히고 있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 의 급진화, 즉 고강도 민주주의(highintensity democracy)를 지향한다면, 자유주의는 저강도 민주주의(lowintensity democracy)를 주장한다. 사 회주의와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체제 에 포괄되며, 민주주의 내부에서 민 주주의와 적대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로 본 것은 루소의 영향으로 보인다. 즉, 자유주의의 핵 심은 국가로부터 개인과 개인의 사적 이익을 독립시키는 것이며, 루소의 민주주의적 기구와 국민주권의 원칙 을 상정하는 것은 전체주의에 가깝 다. 부연하자면, 국민 개개인의 의지 의 총합이 공화정이라면 파시즘 체제 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고강도 민주주 의는 차베스 대통령의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제기하는 사회주 의는, 누군가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 주의와 반목하지 않는다. 지나간 시 대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제기하는 사 회주의와 달랐다. 다른 현실, 다른 상 황이었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프롤 레타리아 독재는 지금 베네수엘라에 서는 실현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우리가 제기하 는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이 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 는 민중 민주주의(democracia popular), 참여 민주주의 (democraciaparticipativa), 주체적 민 주주의(democracia protagóica)이 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루소의 전체 주의 색채를 띠는 발언이다. 이 발언 과 동일선상에서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에는 토지 이용의 민주화, 천연자원으로부터 얻어진 지대의 재 분배, 공공성이 강한 산업의 재국유 화 등이 포함되었다. 남미 정치에서 신좌파 출현의 이해 ‘신’좌파 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세력과 사회운동의 역학 관계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사회운동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가 속화시킨 경제적 불평등 사이의 괴리 를 통해 활성화되었다. 정치세력과 사회운동의 역학 관계는 공세적인 투 쟁과 수세적인 투쟁이 혼합되는 상황 을 만들고 있다. 공세적인 투쟁에서 국가는 투쟁의 주체인 반면에, 수세 적인 투쟁에서 국가는 투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차베스가 주도한 베네수엘라의 볼리 바르 혁명,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 령 에보 모랄레스(Juna Evo Morales Ayma)의 볼리비아와 원주민운동의 지지를 받은 에콰도르의 변혁적 신헌 법의 제정, 천연자원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둔 자원민족주의는 파시즘 색채 를 띤 국가가 주체가 된 공세적인 투 쟁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반면에, 국가가 투쟁의 대상이 되는 수세적인 투쟁의 사례로는 사회운동 의 지도자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 고 기소함으로써 사회적 항의를 범죄 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 대륙 전 체에 만연된 준군사주의 (paramilitarism)와 정치적 암살에 맞 서는 투쟁, 2009년 온두라스의 군사 쿠데타가 촉발시킨 군부의 정치적 개 입에 대한 저항, 언론 장악을 통해 점 진적인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과두자 본가 세력에 대한 저항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자본가에 대항하여 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내 건 투쟁이라 고 본다. 남미 좌파의 합리화 도구 ‘신’좌파는 대의민주주의, 법, 인권, 입 헌주의 같은 헤게모니적 정치 도구를 이용하여 대항-헤게모니를 만드는 일 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근대 법치 국가에서 정당성과 통치성을 보장하 기 위해서는 헤게모니적 정치 도구가 중요하다. 헤게모니적 도구가 자본주 의 계급 사회의 확대 재생산을 보장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처럼, 민중계 급이 공동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대 항-헤게모니적 도구가 필요하다. 요컨대, ‘신’좌파는 자유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경제적 틀을 넘 어서서 자신들의 정치적 어젠다를 발 전시키기 위해서는 헤게모니적 도구 를 창조적으로 전유하여 대항-헤게모 니, 즉, 진보의 색채를 띤다. 새로운 입 헌주의(new constitutionalism), 여성, 원주민, 아프리카계 후손의 집단적 권리에 대한 인정, 대의민주주의와 병행되는 참여민주주의 촉진, 성차별 과 인종 차별의 종식을 법률적 개혁, 천연자원의 국유화(파시즘적 정책) 등은 대항-헤게모니의 대표적인 사례 들이다. 신좌파와 문명 논쟁 ‘신’좌파의 출현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문화적 차원으로서 문명 논쟁 이 존재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되는 문명 논쟁은 아메리 카 정복과 동시에 시작되었지만 식민 지 시기에는 원주민 학살과 복음화, 독립 이후에는 동화(assimilation)와 인종 민주주의 같은 수단을 통해 계 속해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흑인)이 중요한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면서 문 명 논쟁이 정치적 의제에 포함되었 다. 원주민의 문명은 서구의 근대적 세계 관과 비슷하지만 독특한 문화적,정치 적 세계관에 근거한다. 부연하자면, 서구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동일한 세계(우주)를 문화적으로 의미가 서 로 와 닷게 인식한다. 언어 차원에서 예들 들어보자면, 근대 서구인이 천 연 자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원주민은 파차마마(Pachamama, 대지의 어머 니)라고 부르고, 발전(development) 이라는 서구적 개념은 에콰도르 신헌 법(2008)에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로 명시되었다. 수막 카우사 이는 ‘살림(살리다)’이라는 뜻으로 ‘죽 임(죽이다)’의 반대말이다. 즉 발전이 생산을 토대로 한다면 수막 카우사이 는 생명을 지향한다. 이는 건국 신화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의 잉태 가 햇빛인 것처럼 원주민도 햇빛으로 잉태한 이야기 속 신화가 있다. ‘상품으로서의 토지(land)인가, 정체 성과 존엄성의 근거로서의 영토 (territory)인가?’, '시민사회인가, 공동 체인가?’ 같은 또 다른 많은 이항대립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민주주의 대 파시즘)이 문명 논쟁을 구성한다. 문 명 논쟁은 헌팅턴이 예언했던 ‘문명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 내 융화를 의미한다. 신좌파 정치 스펙트럼의 다변화 최근 30~40년간 진행된 사회 내 행보 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대한 저항 이면서, 아메리카 정복 이후 300년에 걸친 식민주의, 정치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내적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신’좌파의 출현에는 정치 구조와 경제정책에 대한 단기적인 처 방과 문명의 이행에 관한 장기적인 실천의 문제가 절속되어 있다. 그 결과, ‘신’좌파의 정치적 목표도 하 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권력을 획득 하고 국가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것 이 핵심적 목표가 되기도 하고, 원주 민운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반(反)국가적 주장도 있다. 국가가 처해 있는 역사 적·정치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신’좌 파를 구성하는 사회적 기반과 정치적 의제 또한 다양하다. 요컨대, 최근의 핑크 타이드의 귀환은 기존의 지배적 인 일원론적인 좌파 이론으로는 독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 요가 있다.

 

II.남미 정치 체제에 수반된 경제위기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 시 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고질적인 병폐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금융불 안이었다. 중남미 국가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대외채무가 누적되면서 경 제불안정을 겪기 시작하였다. 공업화 동안의 경제성장은 외자와 결합한 도 시 일부 산업자본 혹은 수출자본에 혜택이 돌아갔을 뿐 국민경제 전체의 산업기반은 여전히 취약하였다. 이러 한 경제성장이 국내 여타 부문 및 지 역으로 파급되지 못한 채 수출산업 혹은 도시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고립성장을 결과한다는 의미에서 당 시의 이러한 성장모형을 가리켜 흔히 비지경제(飛地경제, enclave economy)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73년 중동 산유국의 자원민 족주의와 함께 세계경제에 불어닥친 오일쇼크, 다시 1978년 이란의 호메 이니혁명과 함께 시작되는 제2차 오 일쇼크는 세계경제 전체를 불황에 빠 뜨렸고 이와 함께 국제금리 인상, 국 제원자재 가격 하락이 이어졌다. 이 것은 자원을 비롯한 1차 산품 수출비 중이 높았던 중남미 각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금리인상에 따른 외채상환 부담은 더욱 큰 압박이 되 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각국은 국제수지 방어를 위해 자국통화 가치 를 절하하는 환율인상에 나서는데 이 러한 움직임은 다시 자본도피 현상을 초래하여 1980년대 초 중남미의 외채 상환 연기(moratorium) 혹은 불능 (default) 선언을 가져왔다. 이는 다시 이들 국가에 신용을 제공한 선진국 다국적 금융기관들의 채권회수 불능 으로 이어져 세계 금융시장 전반을 위축시키는 이른바 ‘외채함정’(Debt Trap)으로 확대되었다. 흔히 시장개혁의 성공사례로 일컬어 지는 이 시기 칠레의 경우도 금리자 유화, 은행의 민영화, 신용배분에 대 한 규제철폐 그리고 금융시장의 개방 등을 도입하였다가 심각한 투기와 버 블을 경험하였다. 칠레는 1980년대 금융위기로 인해 금융부문 총자산의 거의 반에 이르는 금융기관들이 파산 하고 말았다. 당시 중남미 외채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양하였으나 대체로 이러한 위기가 일시적이라기보다는 중남미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에 기인하는 것 이라는 진단이 우세하였다. 이에 따 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중남미 국가 들은 무역자유화와 자본자유화 등 강 도 높은 시장경제적 체질개선에 나서 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재정수입 증대 를 위해 에너지부문 등 기간산업의 공기업 매각을 서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자유화에 따 른 해외자본 유입이 급증하면서 경제 의 불안정성은 더욱 증폭되었으며 1980년대 중반 다시 외채위기, 1990 년대 중반 멕시코의 외환위기, 1990 년대 후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외 환위기 등 단속적인 금융불안에 시달 렸다. 이러한 금융불안 때문에 중남미 일부 계층에서는 90년대에 걸쳐 자국 통화 의 불안정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달러 예금의 비중을 높였다. 이는 특히 자 국 통화의 평가절하에 대비한다는 측 면이 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통화 대체(currency substitution)는 다시 중남미 금융위기를 증폭하여 반복시 키는 역할을 하였다. 즉 자국 통화 및 금융의 달러화 (dollorization)가 확대되면 외부충격 으로 금융불안요인이 발생했을 때 금 융시스템의 반응이 신속하게 나타난 다. 그 결과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 면, 은행시스템에 달러표시예금이 많 은 경우 이는 이미 약한 상태인 은행 시스템에 환율 익스포져를 증가시키 기 때문에 미래의 위기가 더 길게 이 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중남미국가들은 소득 양극화가 심하 고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외부 요인의 변화에 매우 취약한 경제체질 로 인하여 세계경제가 출렁일 때마다 금융불안을 반복하였다. 이 때문에 1990년대 후반 세계경제가 침체를 보 이자 원자재 가격이 다시 폭락하였고 국제금융자본이 중남미로부터 철수 하면서 다시 금융위기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금융불안과 그에 따 른 정치불안의 바탕에는 라틴아메리 카 각국이 수입대체공업화에 실패하 고 1차산품 위주의 수출구조를 유지 하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이 놓여있 다. 같은 개발도상국이면서도 중남미 국 가의 공업화 비중은 동남아 개발도상 국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진다. 이 때 문에 세계경제가 후퇴하고 그에 따라 국제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면 중남미 국가는 대체로 교역조건의 악화에 따 른 경제위기를 반복하여 왔다. 이들 국가의 주요 수출품인 원유, 커 피, 구리, 바나나, 육우, 소맥 등은 공 산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탄력성 이 낮기 때문에 환율인상을 통해 수 출가격 경쟁력을 제고하여 국제수지 를 만회하려 하여도 큰 효과를 발휘 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금융위기 의 충격을 쉽게 상쇄하지 못하였다. 또다른 구조적 요인으로는 중남미 정 치경제를 지배해온 대농장의 지주계 급을 중심으로 하는 과두제적 지배구 조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중남미 각국의 농지개혁은 매우 부진하였다. 이러한 취약한 구조는 다시 국내 자 본축적을 미흡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 에 외자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것이 외부 경제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귀결시켰다. 중남미국가의 과두제적 정치지배구 조는 이들 국가의 소득 양극화에 직 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 인해 다시 경제개혁의 국민적 동력을 확보 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경 제성장기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고통이 수반되는 재정긴축 및 통화긴축 정책이 불가피 하다. 그리고 사회구성원 간에 이러 한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정치적 합 의구조가 전제되어야 하고 이러한 합 의구조를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인 프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은 70 년대와 80년대에 걸쳐 군부독재체제 하에서 안정된 정치적 합의구조를 도 출하기 어려웠으며 각국의 군부정권 들은 중장기에 걸친 경제안정화정책 을 펼칠 만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가 지고 있지 못하였다. 각국의 군부정 권은 이 시기에 정권 연장을 위한 팽 창적 재정운용, 단기 외자도입을 통 한 외형적 경제성장을 추구하여 중남 미의 취약한 경제기반을 더욱 악화시 켰던 것이다. 군부정권에 이어 등장한 1990년대 중 남미 민간정부는 당시 세계경제를 지 배하던 신자유주의의 시장친화적 경 제정책을 추구하여 이른바 “민간주도 형 개방경제”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그대로 둔 채 개방을 추구함으로써 외부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가 반복되었고 이는 90년대 말 또다시 외환위기를 초래하 는 원인이 되었다. 남미의 토지문제와 양극화 라틴아메리카 농촌의 빈곤 율은 대부 분의 나라에서 50%를 넘고 있고, 많 은 나라에서 1970년대 이후 농촌빈곤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농촌 빈곤은 많은 나라에서 전체 빈곤의 50%를 넘고 있는데, 특히 과테말라에 서는 72%, 엘살바도르에서는 67%, 코스타리카에서는 59%, 파라과이에 서는 56%, 온두라스에서는 54%, 니 카라과에서는 53%, 볼리비아에서는 51%에 달한다. 대단히 높은 도시화 수준에도 불구하고, 농촌빈곤은 여전 히 거대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다. 이 러한 농촌빈곤의 뿌리에 대토지소유 제가 있다. 지난 80여년간 라틴 아메리카 각국 정부는 대토지소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해왔다. 토지개 혁은 멕시코(1917), 볼리비아(1952), 니카라과(1979) 등에서는 혁명의 결 과의 일부였다. 그리고 페루(1969-75) 와 에콰도르(1964)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하였고, 칠레 (1964-73), 콜롬비아(1961-), 과테말 라(1952-54), 온두라스(1973-), 엘살 바도르(1980-),와 도미니카(1961-)에 서는 민주정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하 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는 여전히 두 가지 토지문제가 남아 있다. 첫째, 많은 농 가들이 여전히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둘째, 토지를 가진 사람들은 그 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 다. 즉 라틴 아메리카의 경작지의 90%는 총 농장의 26%에 달하는 대농 장이 소유하고 있는데, 이들 농장의 농지는 불완전하게 이용되거나 놀고 있다. 반면에 총 농장의 50%에 달하 는 영세농은 오직 농지의 2%만을 보 유하고 있고, 이들 생계농의 농지는 과도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의 무소유 혹은 불충 분한 접근으로 인해 빈곤이 만연하고 있다. 농촌세대의 55%가 빈곤으로 고 통 받고 있고, 그들의 60%는 극빈층 이다. 이는 도시의 빈곤세대율 34% (이들의 35.3%는 극빈층)에 비교해도 매우 높다. 많은 나라에서 농촌빈곤 은 정치불안정의 원인, 경제의 불안 정 요인이 되고 있다. 농촌빈곤은 또 한 이농을 가속화하고, 이것은 다시 도시 임금을 억제하고, 도시의 사회 간접자본과 복지비용을 가중시킨다. 뿐만 아니라, 토지에 대한 불충분한 접근은 토양악화, 열대우림의 파괴 등 환경 문제를 낳고 있다. 이처럼 라티아메리카의 대토지소유 제는 라틴아메리카의 양극화, 사회불 안, 도시빈곤, 환경 파괴, 경제정책의 왜곡 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중남미전문가오피니언라틴아메리카 신좌파 줄현에 내재된 복합적인 의미 김은중

라틴아메리카 정치체제 변동에 관한 조사연구_ 김윤자(한신대학교 국제경제학과 교 수) 김상조(한성대학교 무역학과 교수)

중남미 고대문명과 환경-창세신화를 통해 본 중남미의 자연 재난_ 박 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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