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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유럽 중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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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프랑크 왕국

 

피핀과 교황의 거래 의의

 

751년에 피핀(PippinⅢ, 751-768)은 쿠데타를 단행하여 메로빙가 최후의 왕 힐데리히(ChilderichⅢ)를 왕위에 서 축출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이 로써 메로빙가를 대신하여 피핀의 가 문인 카롤링 가문이 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8세기 중엽은 향후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의 유적지 인 로마시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티움 황제, 로마교황, 롬바르드인이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 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 다. 이곳에서 패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서 유럽 역사의 향방이 좌우될 운명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지정학 적으로 지중해 세계와 유럽대륙을 연 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외형적 인 중요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로 마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였다. 로마 는 고대 제국의 수도로서 세계의 중 심이라는 사상이 전통으로 전해내려 왔다. 그러므로 그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보다 넓을 세계를 지배할 수 있 는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 다. 사실 교황이 로마를 베드로의 유 적지로 그렇게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여러 세력들간의 각축장이 된 이탈리 아 반도에서 주도권을 교황이 쥐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 단독으로 주 도권을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교황은 자체의 군사력이 없었 기 때문에 롬바르드의 무력에 효과적 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교황청에서 꾸준히 발달시켜 온 이론만으로는 교 황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 였다. 사실 로마를 지배할 수 있는 권 리에 대해서도 교황보다는 비잔티움 황제가 훨씬 더 역사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은 당시의 유럽 에서 급격히 부상하는 세력인 프랑크 인들을 통해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 하였다. 요컨대 피핀의 쿠데타를 계 기로 프랑크 왕국과 제휴함으로써 교 황은 향후 중세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교황은 8세기 중엽 당시에 롬바르드 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 었으며, 이 위협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롬 바르드인들이 로마시를 정복한다고 할지라도 교황을 폐하고 로마를 파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은 정통의 로마 카톨릭을 신봉하는 기독교도들로서 교황을 베드로의 계 승자로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 리우스 2(GregoriusⅡ, 715-731)가 비잔티움 황제 레오 3(LeoⅢ, 717- 741)와 이탈리아 과세문제를 놓고 충 돌하였을 때에도, 그리고 성상파괴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을 때에도, 롬 바르드인들은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 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로마를 점령 한다고 하더라도 교황을 폐위하거나 교황의 종교적 기능을 박탈할 까닭은 없었다. 교황이 염려하였던 것은 로마시가 롬 바르드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갈 경우 에 자신의 신변에 닥칠 사적인 위험 때문이 아니라 좀더 높은 차원의 이 유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교황은 기 독교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교회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 으로 교황은 로마를 중심으로 서방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세속적 지배자 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교황은 기독 교 세계의 종교적 수뇌로서의 역할은 물론 서방 기독교 세계의 정치적 수 뇌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 교황령의 시초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 (274~337) '밀라노 칙령'(313)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신앙의 자 유를 인정해주었다. 이후 독실한 그 리스도교 귀족들의 기부로 교회 재산 은 점점 불어났다. 콘스탄티누스 1세 는 순교한 성인(聖人)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해 교 황에게 바쳤다. 이후 바티칸은 로마 교황이 거주하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다. 6세기 이후 로마 귀족들이 너도나도 자기 재산을 기증하면서 교회는 더욱 부유해졌다. 이렇게 해서 쌓인 교회 의 토지 재산을 '베드로의 세습령'이 라고 불렸다. 교황은 점차 영토 안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인 지배력 을 갖게 되었다. 교황이 세속적인 지배력을 갖는 지역 을 뜻하는 '교황령(敎皇領)' 754년 프랑크왕국의 초대왕 피핀이 이탈리 아 북동부 라벤나 지역 등을 교황에 게 바친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다. 이 사건을 '피핀의 증여'라고 부른 다. 당시 교황이었던 스테파노 2세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게르만족의 하나)으로 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교 황은 프랑크왕국의 새 왕조를 연 피 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피핀 은 안정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교회와의 결탁이 필요했다. 한참 후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서 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전개돼 1861년 로마와 베네 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왕국'이 탄 생했고, 1870년에는 베네치아와 로 마 교황령을 모두 합친 '통일 이탈리 아'가 완성됐다. 당시 교황 피우스 9 세는 합의되지 않은 합병에 반발했으 나 결국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다. 이 후 교황들은 바티칸 내 성 베드로 성 당에서만 지내게 됐고, 이탈리아 정 부와 교황청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 다.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 불편한 관계가 해소된 것은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무솔리니(1883~1945) 때다. 무솔리니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 해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 다.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청 특사 가스파리 추기경 사이에 '라테란 협 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으로 바티칸 시국은 교육, 세금, 주교 임명, 교황 선거 등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인정 받았다.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에 바티칸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교황령 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 도 받았다. 이때부터 교황령은 바티 칸시국으로 한정되었고, 현재 전 세 계에서 몰려드는 특별 헌금과 바티칸 박물관 입장료, 관광 수입으로 국가 를 유지하고 있다.

 

샤를마뉴 대제

 

샤를마뉴의 제국과 더불어 출현한 새 로운 유럽은 고대 로마의 라틴 문화 와 로마가톨릭 신앙을 토대로 다양한 종족과 언어와 왕국 들을 초월하여 어떤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하나 의 문명으로 발전할 늦이 보였다. ‘아 시 아 문명이라든가아메리카 문 명과 같은 말들은 공허하고 막연한 데 비 해, ‘유럽 문명이라는 말은 분 명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아시아 연합’이라든가 ‘아메리 카 연합’ 같은 것은 현재로서는 생각 하기 어 려운 반면에, ‘유럽 연합 (EU)’이 어쨌든 하나의 현실로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대 단히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유럽 문명’이라는 것이 실재하며, 따라서 ‘하나의 유럽’이 있을 수 있다는 의식 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유럽 연 합’은 필시 공상에 그치고 말았을 것 이다. 물론 샤를마뉴 시대에 등장한 최초의 유럽으로부터 오늘날의 유럽 연합이 나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 다. 샤를마뉴의 제국에 관한 기억은 유럽의 분열과 전쟁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민족주의적 선 동에 동원될 수도 있었고, 현대의 샤를마뉴가 되고자 스스로 황제의 관 을 쓴 나폴레옹이나 심지어 히틀러의 야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었다. 또한 오늘날의 유럽 연합은 심지어 이슬람 국가의 가입을 놓고 저울질할 정도로 지리적 범위는 물론 이고 그 정체성 면에서 샤를마뉴의 좁은 유럽과 충돌할 소지도 없지 않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의 강압에 굴복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 하고 비로소 유럽의 일원이 된 작센 인들이 훗날 그 정복자를 자신들의 사도로 찬양하고 그 제국의 상속자를 자처하면서 유럽사의 한 주역이 되었 듯이, 그리고 샤를마뉴의 영광을 서 로 다투면서 오랫동안 반목해 온 프 랑스와 독일이 또한 그 공동의 역사 적 운명을 상기하며 서로 화해하고 마침내 유럽 연합을 견인하는 파트너 가 되었듯이, 샤를마뉴는 분명 민족 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 유럽사 와 유럽 문명의 차원에서 사유하고 미래를 상상하도록 이끈 기억의 유산 이었다. 샤를마뉴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1200여 년에 걸친 후세의 역사가 그를 ‘유럽의 아버지’로 자리 매김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날 유럽 연합의 본부와 의회가 자리 잡고 있는 브뤼셀과 스트라스부르 일 대가 바로 샤를마뉴의 본향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마르텔 - 피핀- 샤를마뉴>로 이어 지며 영원할 것 같던 프랑크 왕국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샤 를마뉴 대제가 죽은 바로 직후부터 멸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제국 자체가 여러 부족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강 력한 왕인 샤를마뉴가 있을 때에는 모두가 충성하는 듯 보이지만, 이 강 력한 왕이 죽은 뒤 각 부족들은 충성 할 구심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두 번 째 이유는 메로빙거 왕조가 망한 이 유가 같다.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 제라는 점이다. 샤를마뉴 대제가 죽 은 뒤 재산 분할과 왕위 계승을 둘러 싼 내분이 발생하였고, 이것은 3왕자 에게 각각 국가가 분할되어 상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세번째 이유는 샤를 마뉴가 죽은 시점이 제 2차 민족 이 동기라는 점이다. 샤를마뉴라는 강력 한 왕이 죽으면서, 노르만족, 마자르 족 등의 활동이 가속화되었고, 이슬 람 세력도 다시 영역을 확장하기 시 작했다. 샤를마뉴가 죽으면서 제국의 상속은 막내인 루이 경건왕에게 넘어갔다. 프랑크족의 상습기준에 의한 것이자, 샤를마뉴가 아끼었던 아들에게 넘어 간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였고, 형제간 내분이 지속되었다. 그 결과 <베르됭 조약> 으로 영지는 분할 상속되었다. <베르 됭> 조약의 내용으로 서부프랑크는 찰스 대머리왕에게, 동부프랑크는 루 이 독일왕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중 부 프랑크와 이탈리아지방은 장자 로 테르에게 넘겨졌고, 로테르가 프랑크 왕국의 전체 황제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자 로테르가 사망하면서 또 다시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번에는 <메르센 조약>으로 영토를 다시 재정리했다. 그 내용은 로테르 의 땅이였던 중부프랑크를 동프랑크, 서프랑크가 나눠갖는다는 조약이다. 이로서 영토는 동프랑크, 서프랑크, 남이탈리아로 나뉘게 된다. <메르센 조약>으로 나뉜 영토는 오늘날 프랑 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동프랑크는 10c 오토 1세에 의해 신 성로마제국이 된다. 서프랑크는 카롤 링거 왕조가 단절되면서 카페 왕조가 14c까지 아주 미약하게 버텨나갔다. 남부이탈리아는 카롤링거 왕조가 단 절된 이후 수없이 분열되어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3개의 프랑크는 하나라는 인식이 남아있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동프랑크 왕국)은 옛 로마의 영토를 통일한 책임이 있다며 로마와 샤를마뉴의 후계자를 자처한 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은 끊임없이 남부이탈리아 및 기타 지역 통일을 추구하게 되며 이것은 프랑크 왕국의 지원자였던 교황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훗날 카 노샤의 굴욕은 로마 교회와 신성로마 제국 황제간의 문제였다. 9세기 이후 게르만에 이어 제 2차 민 족 이동이 시작된다. 이 민족이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 주변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부 민족인 노르만의 이 동을 말한다. 이들이 북부에서 오면 서 유럽사회는 한차례 큰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 또 동부에서는 마자르족 이, 남부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서유 럽을 위협하면서 유럽은 또 다시 사 면초가가 된다. 먼저 이슬람의 침입 부터 보자. 이슬람은 시칠리아를 정 복하면서 지중해 연안을 통일할 계획 을 세운다. 그들은 <지중해에는 크리 스트교인의 배는 널빤지 1조각도 띄 울 수 없다>고 호언하면서 밀고 올라 왔다. 시칠리아는 10c 동로마 제국에 의해서 유럽사회에 환원되었지만, 이 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이 오랜시간 정 복하면서 지중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끝없는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슬 람 세력보다 더 광범위하게 유럽사회 를 흔든 것은 바이킹이라 불리는 노 르만족이다. 이들은 민족이동을 통해 유럽 곳곳에 국가를 성립시킨다. 슬 라브 땅에는 노브고로드 공국, 키예 프 공국을 세운다. 특히 키예프 공국 은 최초의 러시아 국가로서 러시아의 기원이 된다. 그들이 시칠리아 왕국 과 노보고로드 왕국을 세움으로서 하 천과 해로에도 내륙교통로를 개척하 였다. 진정한 바이킹의 후예다운 업 적이다. 덴마크계인 데인족은 영국에 침입하면서 활약했다. 그들은 영국 북동부를 점령하였는데, 훗날 크리스 트교로 개종하게 되어 앵글로-섹슨 족에 융화되어 버렸다. 노르만인 중 일부는 아일랜드에도 침입하였는데, 게르만인도 막아낸 아일랜드의 캘트 족들은 노르만마저 격퇴한다. 이들 노르만인들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북미대륙쪽으로 진출했다. 이 당시 노르만족의 세운 국가중 가장 문제가 되는 국가는 <노르망디 공국>이다. 이 노르만족들은 영국, 프랑스 해안 을 약탈하면서 해안을 따라 이동하였 다. 이들의 영토는 프랑스 북부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광대했다. 서프랑 크의 카페 왕조는 이들을 막을 힘이 전혀 없어서 이들에게 봉토를 수여하 고, 노르망디 공국을 인정하였다. 즉, 이들은 서프랑크왕에게 땅을 받는 댓 가로 충성하는 봉건영주화 된 것이 다. 그래서 왕국이 아니라, 공작이 다 스리는 <공국>이다. 하지만, 노르망 디 공국의 힘은 서프랑크를 훨씬 능 가하였다. 이들은 11c 시칠리아를 이 슬람에게서 탈환한 뒤 남이탈리아에 시칠리아 왕국까지 세운다. 또 영국 을 정복한 이후에는 노르만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문제는 이 노르망디 왕국의 영토가 프랑스 지방의 1/3에 이르고, 영국땅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 누구를 첫 번째 왕으로 모시는가, 또 는 누가 이 공국의 공작이 되는가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이 바뀔 지경이었다. 이 문제가 하나의 원인 이 되어 14c 영국과 프랑스는 116년 에 걸친 백년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 렇게 노르만족이 이동하면서 유럽사 회는 다시 한번 파탄난다. 게르만의 이동 이후 가까스로 정리된 유럽의 질서는 다시 박살나고, 샤를마뉴 이 후의 문예부흥은 좌절당한다. 마자르 족, 노르만족,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침입으로, 유럽 사람들은 강한 기사 나 제후, 국왕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 또 국왕과 실권계급은 실력있 는 기사에게 땅을 주어 노르만족의 침입을 격퇴할 구실을 찾았다. 또는 노르만족 자체를 봉건영주로 인정하 여 국왕과의 협조체제를 꾀하기도 한 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제도가 바로 유명한 유럽의 <봉건제도>이다. 즉, 노르만족의 이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 으라고 한다면 유럽사회의 봉건화다. 봉건제도는 유럽이 다시 회복하기 위 해 마련한 사회안전장치이며, 이 제 도 속에서 유럽사회를 복구한 이후 다시 문예부흥과 도시성장이 이루어 진다. 도시가 다시 성장하게 되면서, 이 봉건제도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

 

2.봉건제도

 

노르만족 스웨덴 출신 바이킹 바랑기족은 동쪽 의 발트족과 핀족 그리고 슬라브족의 땅(오늘날의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 라루스, 우크라이나)에 진출한 후 토 착민들인 동슬라브족에 동화되며 루 스인(the Rus)으로 불렸다. 루스란 슬 라브말로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 말에서 러시아(Russia)라는 나라 이 름이 생겼다. 그 후 바랑기족의 지도 자 류리크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 도 키예프에 최초의 루스인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을 쌓았는데 슬라브말 로 고로드(gorod)라고 했다. 오늘날 은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노보 그라드, 볼가그라드 등의 지명에 나 타난다. 그 후 드네프르 강을 따라 흑 해,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 비잔티움 제국까지 진출하였다. 이들 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자리한 스칸 디나비아반도와 덴마크가 있는 유틀 란트반도를 중심으로 부족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었다. 부족 간의 크고 작 은 세력다툼이 줄어들어 생활이 안정 되어가면서 인구가 지속해서 증가했 다.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식 량과 토지가 부족했고 이를 소유하기 위한 부족민 간의 갈등이 잦아졌다. 족장은 이런 불만을 잠재우고 대안을 찾기 위해 배를 타고 주변의 다른 부 족이나 나라로 곳곳으로 이동해서 약 탈을 시작했다. 약탈은 예나 지금이 나 물리적으로 힘이 있는 자나 세력 이 부를 이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었다. 이렇게 시작된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위해 좋 은 환경을 찾아 떠나는 민족의 이동 을 만들어냈다. 바다를 통해 이동한 노르만족은 먼저 프랑크로 향했다. 당시에는 프랑크제국이 동서로 분열 되어 있었다. 서프랑크의 북부해안은 이들의 약탈에 피해를 입었다. 더 큰 부를 얻기 위해 무자비했던 노르만족 은 파리까지 이동했다. 당시 서프랑 크를 지배하고 있던 샤를 3세는 이들 을 달래고자 더 이상의 침략과 약탈 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파리에서 먼 봉토를 하사했다. 그들이 하사받 은 봉토는 노르만족이 살게 되면서 노르망디라고 불렸다.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지척에 있던 노 르망디 공국의 실력자 윌리엄 공은 1066년 섬나라 영국으로 쳐들어간 다. 앵글로 색슨 왕 에드워드가 후사 없이 죽고 여동생의 아들인 조카 해 럴드가 왕위를 계승하자 에드워드의 먼 친척인 윌리엄공이 자신이 왕위계 승권자임을 주장하면서 이다. 이렇게 해서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이 이루어 져 200여 년간의 지배 동안 노르만 프랑스어가 영어에 영향을 미친다. 노르만족의 이동은 당시의 부가 노르 만족에게 집중되는 것 외에도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어놓는 계기였다. 봉건 장원제도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샤를 마르 텔은 이슬람의 침입에 대응하여 기사 계층을 양성하기 위해 이들에게 토지 를 지급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봉 건제의 효시로 간주한다. 이후 프랑 크 왕국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봉건제 도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 되었다. 프 랑크 왕국이 쇠퇴하고 노르만, 마자 르, 이슬람 등 이민족의 침입이 이어 지는 혼란의 상황 속에서 국가적 차 원의 대응이 불가능해지자 지역 단위 의 자체 방어체제가 형성되는데 그 결과 보다 상위의 유력자에게 의탁하 여 보호를 받고 대신 충성과 봉사를 제공하는 관계가 일반화되었다. 이와 는 달리 왕 또는 유력자들이 필요에 의해 가신 층을 양성하고자 토지 등 을 분봉하여 형성된 경우도 많았다. 봉사와 충성의 대가로 토지를 지급한 것은 당시 유럽이 농업 중심의 자급 자족적 경제로서 토지 외에는 적절한 보상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지 외에 다른 보상 수단(화폐, 물품 또는 세금 징수권 등)이 있는 경우에 는 이를 지급한 경우도 있다. 또한 소 유권이 아닌 용익권을 분급하는 경우 도 있었는데, 프랑크 왕국의 경우 지 급할 토지가 부족하여 교회 소유의 토지를 지급했다(지방영주는 교황에 복속). 이 경우 소유권은 교회가 계속 가지고 봉신은 그 토지의 용익권만 갖는 방식으로 지급 했다. 이 방식은 이후 확산되어 봉토의 소유권은 주군 이 갖고 봉신은 그 봉토로부터 나오 는 수익을 자신의 수입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인 ‘용익권’만 가지며 대신 봉신은 그 토지에 대해 주군의 간섭 을 배제하는 ‘불입권’을 갖는 중세 봉 토의 특징이 형성되었다. 봉신은 주군에게 선서를 하고 충성을 바치며 주군은 그 대가로 봉신에게 봉토 등의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이 러한 봉건적 주종관계는 자유로운 전 사들 상호간의 계약관계였는데, 이 시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관계인 영주와 농노의 관계처럼 예속적인 것 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대등한 당 사자 간의 사적인 관계로서 상대방의 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얼마든지 계약 파기가 가능했다. 주종 관계는 국가 의 공식적인 행정조직은 아니지만 혼 란의 시기에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이 후 중세의 지배적인 정치 질서(기 독교의 위계질서가 영향을 줌)를 형 성했다. 한편, 게르만 부족의 농민들은 수장 에게 복속하여 처음부터 부역을 제공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러한 것 들이 중세에 들어오면서 장원으로 발 달하고, 농민들이 영주에게 복속 되 어서 장원제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 다. 특히 9~10세기는 프랑크왕국이 분열하고, 노르만 인들이 침입하는 시기였다. 즉 안전을 위하여 농민들 은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하고, 보호 받아야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기사 또는 영주에게 몸을 의탁하여 복속되 었는데, 이것이 장원제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동프랑크 신성 로마제국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인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 세(Leo III)로부터 로마황제 황제관을 머리에 얹는다(교회의 계서제는 왕권 강화와 맥을 같이함—교황은 황제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고, 성직자는 황 제에 귀속되어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 다.). 그는 300여년 전에 멸망한 서로 마제국을 부활시켜 황제에 오른다. 카를 대제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프 랑크 왕으로 수 차례의 전쟁을 치르 면서 왕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 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게르만족 지역 을 대부분 장악했고, 아시아계 유목 민족과의 전쟁에서 헝가리 지역까지 정복했다.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 국과 전쟁을 벌이고 베네벤토를 공격 하고, 로마를 원정했다. 그때마다 교 황에게 최대의 예우를 보였다. 카를 대제가 로마 황제가 된 것은 속세의 군주와 교황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카를은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 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이에 비 해 로마 교회는 동쪽의 그리스 정교 와 주도권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강 력한 세속 권력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탈리아 내의 안정을 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황제는 로마 에 인접한 롬바르드 왕국을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고, 로마교회 내 성직자들과 접촉해 교황에 도전했다. 교황은 생존을 위해서도 서유럽에서 가장 힘이 센 카를 왕의 지원이 절실 했던 것이다. 카를이 로마 황제에 오 르자, 고대 로마제국의 후계자였던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분노했는데, 카 를은 동로마황제에 깍듯이 예의를 표 해 충돌하지 않고 무마했다. 동로마 의 미카엘 1세는 812년에 카를을 황 제로 인정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카 를 황제 기간에 서유럽에선 팍스로마 나의 평화가 형성되었다. 카를 사망후 베르덩-메르센 조약 거 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분리되었 고, 오토 1세때 제국이 다시 부흥했 다. 이때가 신성로마제국의 효시로 본다. 유럽사에서 중세와 근대를 관 통하며 중부 유럽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나라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다. 제국의 범위는 지금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서 부(부르고뉴), 체코를 포괄한다. 이 거 대한 제국은 로마 교황청을 등에 업 고 서로마제국을 대체했고, 교황청과 싸우기도 했다. 한때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제국을 지배하며 유 럽 최강국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 러나 말년에는 볼테르(Voltaire)의 표 현을 빌리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 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것으로 전락 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나폴레옹에 의해 1806년 해체된다. 초기엔 다민 족의 제국이었지만, 17세기 이후 영 토가 쪼그라들어 독일어를 쓰는 단일 민족의 영역으로 좁혀졌다. 독일인들 은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프로이 센 호엔쫄레른가에 의한 제국을 제2 제국,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제3제국이라 일컫는다. 영국 봉건제 도입 영국 정복(1066)이전 10년 동안 노르 만국은 그 형태를 완전히 갖추었다. 한 세기 전부터 이미 많은 분야를 통 해 공국은 주변의 제후국과는 달리 체계와 제도의 틀이 잡혀 있었다. 노 르망디 공은 젊고 현명했으며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다 른 제후국과는 차별화된 역할을 하는 체계적인 제도를 정착시켰는데, 정부 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 시기의 노르망디 공국은 유럽의 발전에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위 치에 있었으며,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의 단계에 도달했다. 소수의 노르만인이 영국을 통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노르만국이라는 당시로서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들 수 있고, 엘리트 계층의 고급문화 와 발달된 제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당시까지만해도 영국에 없었던 요새성의 건축을 통해 피지배 계층을 효과적으로 통치한 것도 정복 에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영국 은 윌리엄의 정복으로 바이킹 세계와 절연하고 대륙의 본류에 들어오게 된 다. 물론 1066년 정복 전에도 영국은 경제적인 번영과 찬란한 문화를 구가 하고 있었지만, 항상 문화적으로 열 등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먹잇감이 었다. 그런 점에서 1000년부터 1066 년까지 영국은 두 번의 외침을 받는 다. 한 번은 덴마크의 크누트가 영국 의 왕이 되어 영국을 크누트 제국에 편입시킨 일, 또 한 번은 1066년 윌리 엄의 정복으로 앵글로색슨 왕조가 종 말을 고하게 된 일이다. 노르만인들 은 영국을 정복한 마지막 이민족이었 다.

 

3.기독교 동서 교회 분열

 

이슬람교의 발흥은 유럽 기독교 사회 에 거대한 충격이었다. 많은 사람들 은 아랍인들 역시 한낱 이교도에 불 과하며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민족 중 하나라고 얕잡아 봤을 수도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지금 까지 자신들을 위협했던 그 모든 이 교도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중동 지역을 장악하더 니 이내 키프로스 섬과 북아프리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7세기 말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포위할 정도로 그 위세가 무시무시해졌다. 이들이 단순한 도적 잡떼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제국의 몰락 이 자신들의 죄과로 인해 받게 된 신 의 징벌이며, 신이 사용한 채찍이 곧 무슬림이라는 사고가 싹트기 시작했 다. 아마도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도 대체 이 새로 등장한 적이 어떤 자들 인지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다행히 도 지리적인 근접성으로 인해 비잔티 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 사이에서는 왕래도 잦았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문화적인 교류가 이뤄지면서 서로를 비교 및 대조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이다. 무엇이 가장 비슷했고 무엇이 가장 달랐을까? 이슬람교의 가르침 은 기독교 및 유대교의 가르침과 일 신교라는 점에서는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세부적인 것들은 많이 달랐 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띠게 달랐던 점 이 바로 '이미지'였다. 이슬람교의 경 전 중 하나인 '하디스(نبوي حديث'(에 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지 하는데, 이로 인해 생명이 있다고 여 겨지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금기가 되었 다. 선지자인 무함마드는 물론이요, 형체도 없으신 유일신 알라를 형상으 로 나타내는 것 자체도 금지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행위가 우상숭배로 이 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서양화법이 이슬람 세계에 도 입된 이후에도 마호메트나 칼리파의 얼굴들은 모두 하얗게 칠해지거나 베 일에 쌓인 채로 얼굴을 드러내지 못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철저했던 무슬림들 의 눈에는 기독교도들의 성화, 성상 이 혐오스럽게 보였을 것이며, 자연 스럽게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여겨 졌을 것이다. 기독교 사회가 패퇴를 거듭하고 몰락하는 대신 이슬람교가 부흥하는 것은 그들이 유일신의 가르 침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무함마드 의 가르침을 모른 채 성화와 성상으 로 대표되는 우상 숭배에 몰두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두루 퍼지게 되었 다. 이러한 생각은 비잔티움 제국 내 에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고, 위정 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일반 사람 들이 왜 신께서 자신들을 버리고 이 교도들을 성장하게 하셨는가 진지하 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슬람 교도들의 생활과 문화를 눈앞에서 목 도하던 지금의 소아시아 지방 사람들 은 이러한 생각에 특별히 더 공감을 표했을 것이다. 마침내 주로 소아시 아 기독교 사회 안에서도 이슬람교도 들처럼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성화와 성상을 모두 없애고 그런 것들을 숭 배하는 풍습을 근절하여야 한다고 주 장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는데 이 러한 움직임을 성상파괴운동 (iconoclasm)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 상파괴운동이 무조건 이슬람 제국의 발흥의 영향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하 기에는 무리가 있다. 성상을 파괴하려는 두번째 이유는 동 방 교회나 서방 교회는 모두 구원은 개인의 깨달음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 으로부터 나오며 오직 이것만이 참되 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 서 사람들이 공적 교회 활동을 그친 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국가의 부 를 창출해야 할 젊은이들을 성화와 성상 숭배의 도가니에 방치해두는 것 은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였다. 부는 더 이상 국내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 는 은밀한 수도원 창고에 쌓이고 있 었으니 이는 교회 및 국가의 재정과 도 관련된 일이었다. 비잔티움 제국 의 황제는 이러한 교회의 위기를 잘 관리해야할 책무를 느꼈으며, 이것이 성상파괴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셋째, 성상파괴운동의 이면에는 기독 론(Christology)에 대한 논쟁도 있었 다. 나중에 자세하게 소개되겠지만 성상파괴운동을 벌인 황제 콘스탄티 노스 5세(Κωνσταντίνος Ε΄)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로 그림이나 조각으 로 묘사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성화나 성상이 예수의 인격적 인 면밖에 나타낼 수 밖에 없다는 점 을 제시했다. 칼케돈 정통신앙에서 채택한 ‘인격과 신격이 구분되지 않 고 동일한 위격 안에 함께 있는’ 예수 의 속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이단적이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여겼 던 것이다 끝으로, 마지막으로 비잔티움 제국 내 지역 및 정권 분쟁도 성상파괴운 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 제국의 침입 뿐 아니라 발칸 반도를 침략한 불가르족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성상파 괴운동을 최초로 벌인 레온 3세(Λέον Γ’) 재위 당시 제국의 판도는 대부분 이 소아시아 지방이었고 콘스탄티누 폴리스와 발칸반도의 몇몇 지역, 그 리고 이탈리아 반도에 몇몇 영토가 전부였다. 당시 성상파괴를 지지한 사람들은 대체로 소아시아 지역 사람 이었고 ㅡ 레온 3세 역시 소아시아의 게르마니키아(Γερμανίκεια) 사람이 었다. ㅡ 이에 반대한 사람들은 대체 로 유럽 대륙, 특히 그리스 지역 사람 들이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한 사람들 은 주로 황제와 소수의 열심 있는 성 직자였으나 성상 공경을 지지한 사람 들은 귀족층, 수도원, 그리고 일반 대 중이었다. 때문에 황제가 누구였냐, 섭정이 어떤 편이냐에 따라 제국의 성상파괴 관련 정책은 번복되기 일쑤 였고 9세기경에는 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상파괴운동을 이용하기 까지 하였다. 흔히 성상파괴령이 동서교회의 종교 적 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묘사되 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성상파 괴논쟁이 동서교회의 대분열을 불러 일으켰다기보다는 서로의 차이점을 더욱 극명하게 서로 알게 해 주었다 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찌되었든 로 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의 성상파괴운동을 황제의 정치 권력으 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구실로 삼았 고, 때마침 서유럽에는 비잔티움 제 국을 대체할 야만족의 국가들이 강성 해지기 시작했다. 보름스 협약 교부 및 스콜라 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관과 역사관 은 그의 <신국론>에 잘 나타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하 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 두 가지 유 형으로 나누어지는데, 그중의 하나는 신을 사랑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신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사랑 하는 자이다. 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 신의 육체나 세속세계의 권력과 부를 무시하며 핍박을 받는 반면, 자신을 신보다 더욱 사랑하는 자는 육체적인 삶과 세속적인 부와 권력에 매달려 현생에서 영광스런 삶을 산다. 그러 나 전자는 택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 님의 도시의 시민이 될 것이고, 후자 는 버림을 받은 자로서 지상나라의 시민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 이 하나님의 도시를 택하는가 지상도 시를 택하는가는 그의 자유의지에 의 한 것이다. 역사는 이와 같은 하나님 의 도시와 지상도시, 택함을 받은자 와 버림을 받은 자의 대립 투쟁의 과 정으로 이루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의 역사를 하 나님의 의지가 실현되는 과정으로 해 석하였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연 속이나 유물론적 인과율의 전개가 아 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 을 통하여 하나님이 미리 계획한 목 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목표와 계획이란 아담이래로 지은 인간의 원죄를 구속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 누스의 사상은 기독교로부터 유래된 최초의 역사철학이며, 두 개의 나라 가 서로 대립하면서 역사가 발전한다 는 그의 역사관은 중세는 물론이요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 상사에 근본적인 기반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행복은 영원토 록 변함없는 진정한 행복이지만, 우 리 인간이 갈망하는 대상은 그렇지 못한다. 그러므로 행복을 찾는 마당 에서 추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 보다도 먼저 스스로 소멸되거나 없어 지지 않는 것, 즉 영원불변한 것이어 야 한다. 다시 말해 언젠가는 없어지 거나 우연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어 서는 안 되며, 우리 인간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러나 이 세상 사물들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변화와 소멸 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이 세상 사물 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과 필 연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 다. 다만 신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독 립된 영원불변한 존재이며 또한 만물 의 창조자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 로 우리 자신과 필연적 관계를 가진 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 든지 신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 사 람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 라고 하였다. 즉 아우구스티누수는 인간은 피조물로서 신의 은총속에서 만 행복을 느끼도록 만들어 졌고 자 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원죄설과 원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과 사랑의 실천으로 신 의 은총과 축복을 얻게 된다는 구원 설을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진정한 행 복은 신의 소유에 있고, 신의 소유는 지혜의 보유에 있고, 지혜의 보유는 진리의 인식에 있다. 따라서 행복은 진리의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러면 진리의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 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내 적 경험, 즉 이성적 인식행위를 통해 진리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인간 은 신의 선물인 이성적 인식을 통하 여 사물의 본질과 세계를 이해하며 나아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 았다. 한편, 스콜라 철학의 교육 내용은 과 목에 대한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비판, 검토, 토론, 분석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교육적 방법으 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스콜라 철 학의 강의방법은 교사가 교재에 대해 주석을 달고 용어를 해독하면서 읽는 방법으로 학생들은 그 내용을 바르게 필사하였다. 또 다른 교육방법은 하 나의 논리적 접근의 방법이며 대체로 다음의 네 단계를 거친다. 하나의 이 론이 제시되면, 그 이론에 대한 증거 가 주어지며, 그 이론에 대한 반대의 견이 제시되고, 동시에 제시된 반대 의견도 반박 분석되며, 권위있는 대 답이나 해결에 대해 가능한 반대 의 견을 생각해서 그것에 대한 해답과 반박의 근거를 생각하는 것 등의 논 리적으로 조직된 순서에 따라 전개하 며 동시에 사고의 정밀성과 해결책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의 방법은 학생들에게 연 역적 사고, 3단논법을 포함한 변증법 적 훈련을 시켜 중세에 있어서 지적 인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 밖의 스 콜라 철학의 교육사적 공헌은 도덕 적, 정서적 도야 위주의 교육에서 스 콜라주의의 지적 도야로 교육을 전환 시켰으며 중세 대학의 성립과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증으로 인하여 문예부흥기의 인문주의와 17세기의 실학사상을 제 기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이 13세기 말엽 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 하나는 마지 막 스콜라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스 코투스(Scotus)가 종교에 있어서 지 적 요소보다는 감정적, 실질적인 면 을 강조하면서 이성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적 신뢰가 없어지기 시작하 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 신 앙의 지적인 증명의 가능성을 거부한 의미를 가지며, 신앙은 그 때부터 전 적으로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전적인 부정을 하든가 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이 쇠퇴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 는 유명론의 인기가 올라갔기 때문이 다. 유명론의 대표자는 오캄(Occam) 이었는데 유명론자들의 주장은 스콜 라 철학을 쇠퇴하게 만들었지만 르네 상스의 과학적 발전과 종교개혁의 기 초를 세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과 질료의 관계를 활용하여 우주의 체계와 인간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 하면, 자연계와 은총계, 국가와 교회, 육체와 영혼, 세속적인 덕과 종교적 인 덕, 감각과 이성, 이성과 신앙은 각 기 질료와 형상, 수단과 목적, 하위와 상위의 관계를 갖는다. 아퀴나스는 외계는 실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 인지 될 수 있다 고 보았다. 우리 인간이 감각을 통해 외계의 사물을 수용하게 되고 다시 이성을 통해 내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지식이 성립하게 되는 데, 이와 같은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 는 부분적인 진리만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이성의 힘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궁극적 진리는 다만 영원한 신성이 나타내는 은총의 빛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 다. 본래 진리를 비추는 두 개의 빛이 있 다. 하나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빛이 고 또 하나는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의 빛이다. 이성의 빛으로 인간 은 우주의 생성, 변화, 소멸에 대한 여 러 법칙, 즉 자연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은총의 빛으로는 삼위일체설, 신인설(神人說), 연옥, 부활 등 신비에 속하는 초자연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독자 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자연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이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한 계 이상으로는 나아갈 수 없으며, 확 실한 진리의 인식이 이루어지려면 계 시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 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 앙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신앙은 계시에 의존하며 철학은 이성에 속한 다. 그에 의하면 신의 본질은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인식될 수 없으나 신의 존재, 영원성, 창조적 능력, 섭리 등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 만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 이 둘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 로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아퀴나 스는 인간이 구현해야 할 덕목을 신 학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 구별했 다. 중세 철학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가 장 중요한 문제는 신앙과 이성의 관 계이다. 넓게 보면 중세 초기에는 신 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었다. 중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조 화가 추구되었고, 말기 스콜라 철학 에서는 신앙과 이성이 분리됨으로써 르네상스와 근대 철학의 기반이 마련 되었다.

 

4.동로마 제국 군관구제, 둔전제에서 봉건제로 전이

 

군관구제의 유래는 마우리키우스 황 제가 설치한 문-무일치의 라벤나, 카 르타고 엑사르크에서 기원을 찾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디오클레티아누 스-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시작된 엄격한 문-무간의 분리를 유스티니 아누스 1세가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포기했던 것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다름 아닌 19-20 세기 시절 영국의 비잔티움 학자였던 J. B. Bury의 견해이다. 이러한 군관구 제는 630년대에서 640년대 사이에 시리아와 이집트를 위시한 제국 동부 의 상당수가 이슬람 제국 세력하에 떨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대개의 경우 이 시점을 테마(군관구제) 제도 의 출발점으로 잡는데, 테마 제도는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이슬람 세 력과의 최전선인 소아시아 지역에 우 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서쪽으로는 콘 스탄티노플 바로 건너편 칼케돈에서 부터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력과의 경 계인 타우루스 산맥까지 크게 5개의 테마가 이 시기 아나톨리아 반도에 조직되기 시작되었다. 테마라는 이름 의 유래가 완전히 확실한 것은 아니 지만, 대체로 그리스어로 (군부대의) '배치'(placement)를 의미하는 'thesis'에서 유래했다는 콘스탄티노 스 7세 황제의 기록을 따라간다. 아무 래도 황제가, 그것도 저술을 여럿 했 던 학식 있는 황제가 직접 자국의 제 도에 대해 설명한 것인만큼 신뢰도가 높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들어, 변경 테마 안쪽의 내지 테마들은 점차 군사적인 성격보다는 행정적인 성격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 인다. 물론 테마군으로 편성된 군인 들은 여전히 장부상으로 존재했으나 무장의 수준이나 전투력이 크게 떨어 져 2~3선급의 예비병력으로 취급받 았고, 실제 소집시에도 군역 대신 대 금을 치르는 경우가 늘어갔다. 정부 역시 테마군보다는 직업군인인 타그 마나 용병을 선호하였고, 생업에 종 사하는 국민들을 군역으로 괴롭히는 대신 봉급을 꾸준히 지급하면서 민간 통제의 일환으로 이용했다. 즉, 둔전 으로서의 초기 테마제도는 이미 반쯤 은 사라졌고,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형태로 기능한 것이다. 결국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중앙정부 가 통채로 사라지면서 행정기구에 큰 타격을 입었고, 점차 테마군은 모습 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이후 콘스탄 티노플을 수복한 니케아 제국은 용 병, 중앙과 지방의 프로니아군 그리 고 지방 수비군으로 국방을 꾸려나갔 으며, 이러한 기조는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시대에 도 이어졌다. 그리고 외침, 내분, 흑사 병이라는 악재가 연달아 겹치는 14 세기에 군제가 개편되면서 테마 제도 역시 완전히 사라졌다. 동로마 십자군 원군 요청 10세기경 오구즈 투르크멘 부족의 셀주크라는 지도자가 이끄는 유목민 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란의 북부지 역으로 이동하였다. 10세기 당시 이 란지역은 사만왕조의 페르시아왕조 가 압바스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세워 졌던 때였다. 셀주크가문과 그 부족 민들은 페르시아의 문화에 적응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 은 점차 세력을 키워서 11세기에 결 국 그들의 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이란지역부터 시작하여 당 시 압바스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 를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지역과 예 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 후 그들은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 그리 고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던, 지금의 터키지역인 아나톨리아의 일부까지 지배하였다. 중앙아시아 출신이 투르 크인들이 소아시아반도에 자리를 잡 게 되는 시작이기도 하다. 11세기 말에 권력투쟁으로 나라가 분할되는 때에 십자군전쟁이 시작되 었습니다. 그 결과 십자군은 점령한 지역에 예루살렘왕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십자 군 국가들도 오래 존재하지는 못했지 만 셀주크 투르크제국은 계속되는 권 력투쟁과 내분으로 영토가 지금의 터 키지역인 아나톨리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13세기에 결정적으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그 제국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소아시아반도에 남아있던 그들은 후에 오스만 투르크 (Osman Turk Empire) 라는 이름으로 다시 큰 제국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동로마제국에 대해 잠깐 언급 하고 넘어가자. 테오도시우스 1세가 두 아들에게 로 마 제국을 절반씩 나누어주면서 로마 는 395년 동서로 분열됐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 르만족에 의해 일찌감치 멸망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 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를 중심 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 아누스 대제(재위 527~565년) 때 옛 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되찾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오늘날 터키는 물 론 그리스, 이탈리아, 예루살렘, 시리 아, 북아프리카까지 최대 영토를 확 보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와 거대한 돔으로 '비잔티움 문화의 정 수'로 찬사받는 성 소피아 성당도 이 때 건립됐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부터 사산왕조 페르시아(오늘날 이란), 이 슬람 세력 등과의 대립으로 점점 세 력이 축소됐다. 그러던 중 11세기 이 슬람교로 개종한 유목 민족 셀주크튀 르크가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던 소 아시아 일대를 공격했다. 셀주크튀르 크군 5만명과 비잔티움 제국의 20만 대군이 오늘날 터키 동부 말라즈기르 트에서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 (1071년)에서 대대적으로 맞붙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서 셀주크튀르크는 큰 승리를 거뒀 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 세는 포로로 잡혀가는 굴욕까지 겪는 다. 이 전투의 승리로 셀주크튀르크 는 서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 하게 됐다. 그래서 이 전쟁을 비잔티 움 제국의 쇠퇴를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로 꼽는다. 1077년 셀주크튀르크가 기독교의 가 장 중요한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 면서 양 세력 간 갈등이 폭발했다. 기 독교 순례자들은 더 이상 마음대로 예루살렘에 갈 수 없게 됐다.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 황제가 로마 교 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기독교 세 계와 이슬람 세계 간 길고 긴 '십자군 전쟁'(1096~1272년)이 벌어졌다. 그 러나 유럽 연합군인 십자군은 예루살 렘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이처럼 십자군 운동이 있을 당시의 중동은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지배하 고 있었으며 십자군은 그들과 전쟁을 한 것이다.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며 사라센문화를 크게 일으켰던 압바스 왕조가 힘을 잃어가고 있던 때이기도 하다. 압바스왕조 당시에 유명한 아 라비안 나이트가 만들어졌으며, 아랍 의 상선들은 멀리 중국까지도 무역을 하였다. 그리고 1차 십자군전쟁(1095 년)이 시작되기 전인 11세기 중반 (1054년)에 이미 기독교가 동과 서로 분열되었던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에 멸망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 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 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기독교를 믿던 비잔티움 제 국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이슬람 세력 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성 소피아 성 당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대륙을 호령하는 대제국으 로 성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세금만 잘 내면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 할 수 있게 했고, 이 지역에는 비잔티 움·페르시아·이슬람·튀르크 문화 등 이 융합된 국제적인 문화가 발전했 다. 19세기 이후 이 지역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분쟁 지역이 됐다. 성 소피아 성당 역시 박물관으로 이 용되었다가 지난 7월부터 다시 모스 크가 되는 등 부침을 겪고 있다.

 

5.십자군 전쟁

 

클레르몽 공의회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노 2 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 자군을 소환한 것을 최초의 십자군으 로 본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하 고 있던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 세를 위한 군사원조가 그 명분이었 다. 우르바노 2세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 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 만 학자들은 이것이 우르바노 2세 및 우르바노 2세의 소환에 응하여 십자 군에 참여한 이들의 진정한 동기였다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르바노 2세 의 대전략은 아마 1054년 동서 교회 의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 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 다. 지하드 이슬람의 지하드론에서 이러한 형태 의 전쟁은 신의 길에서 이슬람을 위 한 일종의 헌신으로 신성한 전쟁이었 으며 원론적으로 이슬람에서는 신성 한 전쟁밖에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전쟁 중 전사자들을 위 한 계시가 임하자 지하드는 단순한 전쟁을 넘어 비 무슬림들을 향한 알 라의 심판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의 구 원의 지름길로 여겨졌다. 이슬람 세계에서 당시에 남편이 일정 기간 이상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 인이 이혼을 주장할 수 있었다. 십자 군 전쟁 당시 살라딘은 이 것으로 인 한 군사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정복을 지하드로 칭하였다 (지하드로 인한 남편의 부재는 이혼 사유가 되지 않기 때문) 십자군의 대의 변질 동방무역 유럽의 십자군전쟁은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주장과 선동으로 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십자군전쟁 은 한편으로는 교황과 국왕 간의 갈 등을 완화하고, 동시에 비록 일시적 이기는 하였지만 권력의 중앙 집중을 가능하게 하여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 도 발생하였다. 무엇보다도 십자군 원정은 폐쇄적인 중세유럽에 동방의 선진문물과 교류를 가능하게 하여 상 업의 발달과 함께 유럽의 르네상스가 출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 다. 십자군전쟁 이후 독일에서도 시 장이 출현하고 수공업이 점차 발전하 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역의 발전은 도시의 탄생과 성장을 촉발하여 거대 한 상업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 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도시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봉건적 제약이나 신분적 억압이 점차 약화되어,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운 시민 사회의 탄생을 위한 기본적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6.한자동맹과 교황권 몰락

 

이태리 지중해 무역, 프랑스 중개무 역 북독일 한자동맹 신성로마제국은 봉건제도를 토대로 한 농촌경제 시스템이었다. 황제도 대영주였고, 지역마다 영주들이 할거 하며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영토전쟁을 벌였다. 영주들은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 주어 소작료를 받아 거대한 부를 형성했다. 하지만 13세기에 접어들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봉건질서에 변화가 생겼 다. 상인들은 토지에 얽매이지 않았 다. 그들은 도시를 형성했고, 도시들 은 봉건영주들로부터 독립해 황제 직 할령으로 전환해 상대적으로 자치권 을 누렸다. 독일 북부의 상인들은 무 역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발트해와 북해를 누비며 교약활동을 하며 이윤 을 불려 나갔다. 독일인들이 해상무역에 나서기 앞서 발트해에선 스칸디나비아의 비이킹 족들이 약탈무역을 시작했다. 약탈 무역은 점차 상거래로 전환되었고, 해안지대에 무역거점들이 형성되었 다. 게르만족이 발트해 무역을 장악 한 것은 작센과 바이에른에 영지를 갖고 있는 하인리히 공작이 1159년 홀스타인(덴마크)의 아돌프 2세에게 서 뤼베크(Lübeck)를 빼앗아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3세 기에 독일 북부의 도시들이 발트해 무역에 나섰고, 뤼베크는 거점 도시 가 되었다. 뤼베크는 점차 성장해 작 센과 베스트팔렌지역의 무역 중심지 가 되었고, 1226년에는 작센으로부 터 독립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 드리히 2세로부터 면허장을 얻어 자 유도시가 되었다. 그에 앞서 함부르 크가 1189년에 자유도시가 되었다. 자유도시는 영주에게 세금을 내지 않 아도 되고 영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무역거래를 할수 있었다. 독일 북부 의 도시들은 스칸디나비아 무역상과 경쟁하기 위해 동맹을 체결했는데, 이를 한자 동맹(Hanz League)이라고 한다. 한자동맹이 언제 결성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문서상으로는 1267 년에 처음 등장하고, 역사학자들의 견해로는 1100년대말에 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세기 들어 유럽 곳곳에 중앙집권 적 국가가 형성되면서 한자동맹은 현 지 상권의 도전을 받게 된다. 러시아 의 이반 대제는 노브고로드 콘토르의 영업에 제한을 가하다가 1496년에 문을 닫게 했다. 이탈리아에서 복식 부기가 사용되면서 한자동맹의 회계 는 경쟁력을 잃게 되었고 은(銀)이 화 폐로 통용되면서 동맹의 어음 거래가 빛을 잃었다. 독일 북부 프로이센이 튜턴기사단의 영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무역거점 이 독립성이 약화되고, 폴란드의 영 토 확장도 동맹의 주요도시인 단치히 를 위협했다. 또 브뤼헤, 앤트워프 등 의 도시가 부르고뉴 공작의 소유가 되면서 동맹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영 업에 나섰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한자 동맹의 독점체제를 피해 스칸디나비 아 반도와 직교역을 추진했다. 16세기엔 한자동맹이 급격히 약화되 었다. 스웨덴 왕국이 발트해를 장악 한후 신성로마제국 내에 영지를 확보 하고 덴마크 상인들도 독자적인 영업 망을 구축하면서 한자동맹의 발트해 독점권은 사실상 무너졌다. 시민 영주로부터 자치권 획득 시민계층이 성장하여 영주로 부터 자 치권을 획득하여 길드를 조직하며, 화폐 지대로 농민 부역을 대신하였 다. 상공업이 발달하자 화폐가치는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여 농민 지위 가 향상되었으며, 흑사병으로 농민이 귀한 대접을 받게된다. 중세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이탈한 농 민이 집단화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 되었다. 도시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1~13세기의 상업의 부 활이 이루어지면서 이다. 11세기 이 후 생산력의 향상으로 인해 잉여 생 산물이 생기고 정치적 안정으로 인구 가 증가하자 교역과 상업이 발달하였 다. 교역이 일어나는 자리에 시장이 생기고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 이후 동방 무역 과 원격지 무역이 확대되어 각지에 상업이 활발하게 되어 도시가 발달하 게 된다. 도시의 성장은 도시주민, 즉 시민의 지위 향상을 이끌었다. 봉건제 하에 서 중세의 도시는 영주와 주교의 지 배를 받았으나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 고 그들에게 대항하면서 특허장을 얻 어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받게 되었 다. 그 결과 도시는 정치적으로 자유 로운 자치구가 되어 농촌에서 도시로 도주한 노예라 할지라도 '1년과 하 루'를 도시에 거주하면 자유인으로 인정되는 관습도 생겼다. 이러한 신 분의 자유는 도시가 갖는 지역적 특 권으로서, 장원제로 지배ㆍ예속관계 로 묶인 농노들을 도시로 유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도시민들이 자치권 획득에 있어서 최 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하나의 새 로운 계급이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도시민이 화폐를 가진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급 자족의 장원경제에 기초를 둔 봉건제 는 붕괴되어 갔다. 또한 르네상스처 럼 근대 유럽의 새로운 운동은 바로 이 같은 새로운 힘의 성장과 더불어 자라났다. 한편, 중세시대의 후반 수공업자나 상인의 자조단체인 춘프트(Zunft)와 길드(Guild)가 업종별 또는 지역별로 속속 탄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먼 저 춘프트는 일종의 업종별로 설립· 운영되는 수공업자단체로서 해당 업 종의 종사자들에게는 반드시 가입하 여야 하는 의무가 적용되었다. 그리 고 이러한 수공업자들의 동업조합은 조합원 공동의 이해와 발전을 목표로 장인의 수, 도제의 교육지침, 조합의 문양, 제품의 가격과 생산량, 유통지 역 등을 엄격하게 통제하였으며, 동 시에 조합원의 사망, 장애, 질병, 노령 등과 같은 위험에 대처하여 공동으로 대비를 하였다. 다음으로 길드는 유 사한 목적과 기능의 상인단체로 시작 하여, 이후에는 농민이나 종교적 목 적의 단체에게도 적용되었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소위 유럽의 대 륙권 국가들에 있어서 춘프트나 길드 는 후일 현대적 사회보험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광부들을 조합원 으로 운영하였던 광원조합 (Knappschaft)은 오늘날에 와서도 ‘광 부국민연금제도(Knappschaftliche Rentenversicherung für Bergbauer)’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독일에 있어서 이러한 광원조합은 일 종의 춘프트로서 최초로 13세기에 탄생하여, 조합원들의 장애와 사망으 로 인한 소득의 상실문제에 대응하여 대체소득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농민봉기 흑사병이후 인구감소와 농민들의 지 리적 이동, 더불어 사회적 이동의 변 화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던 봉건체 제를 급속히 붕괴시켰다. 백년전쟁과 질병, 그리고 수탈과 약탈로 인한 사 회적 혼란 속에서 14세기 내내 봉기 와 반란이 계속되었다.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노동력 부족으 로 사회·경제적인 지위 개선을 기대 하였지만, 그 같은 기대는 곧 무너졌 다. 영주 계급이 흑사병 이전 수준의 임금을 받도록 농민들을 압박하는 법 률을 추구하고, 또 농민들이 달아나 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노에 대한 통 제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에게 전쟁비용 마련 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 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358년 프랑스 파리 북 부의 보베지역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주민들과 수비대 기사들이 충돌하면 서 일어난 자크리의 봉기와 1381년 영국 남동부의 여러 주에서 무거운 세금 납세 회피로 일어난 와트 타일 러의 봉기가 있다. 민중봉기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고 또 궁극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 고, 그것은 유럽의 풍토 속에서 간헐 적인 것이기는 하나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봉기는 계급간 의 대립을 촉진시켰고 시민의식의 성 장으로 이어졌다. 동서 대분열 동서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자체는 일종의 해프 닝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사건 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적법한 권한 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교황과 세계 총대주교의 상호 파문 자체는 이미 500여 년 전 아카키오스 분열 때도, 200여 년 전 포티오스 분열 때도 있 었던 일이다. 실제로 1054년 이후로 도 두 교회는 교류를 계속 했으며, 50 여 년이 지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 스 1세의 요청에 교황이 응하는 식으 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두 교회가 동질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은 문서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단순히 종교와 신앙 에 기반한 전쟁이 아니었다. 교황, 서 방 국가, 동로마 제국 모두 각자의 정 치적 이유를 가지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그래도 초기에는 실제로 성 지를 수복하였으나, 십자군 세력은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 였다. 또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현란한 외교술은 장기적으로 동로마 의 외교적 평판을 깎아먹었으며 외교 술이 뛰어난 콤니노스 왕조의 대가 끊겨버리자 사방에 적만 깔리게 되었 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등 경제 적 이득을 중시한 이탈리아 도시국가 들이 마구잡이로 끼어들면서 1204년 결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 스를 함락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은 1054년의 사건 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일으켰다. 동로마 제 국의 땅은 분열되었고 십자군과 베네 치아가 세운 괴뢰 라틴 제국은 한심 한 꼴로 몰락했다. 결국 분열된 정교 회권 나라들은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 먹히게 되었다. 더 큰 비극은 라틴 교 회와 그리스 교회가 서로를 다른 집 단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로마가 콘스탄 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 공의회를 통해 두 교회를 다시 합치려는 시도 가 두 차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상공업자 왕권 강화에 기여 유럽의 중세사회의 봉건제는 사회적 으로 봉건영주와 농노의 계약으로 이 루어졌으며 토지 보유 농민의 부역을 사용한 자급자족적 장원경제 체제였 다. 그러나 생산력의 향상, 인구의 증 가,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동방무역 의 발달로 인한 도시의 성장, 그리고 사회 체제의 변화로 인해 전통적인 봉건제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특 히 14세기에는 흑사병의 만연과 경 제적인 변화로 장원제가 붕괴되었으 며, 농민 봉기로 인하여 결국 영주와 기사계급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이후 유럽사회는 중앙집권화, 즉 절대왕정 시대로 넘어가게 되며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식민지 정복이 이루어지게 되 었다. 또한 도시의 발달과 상업자본 의 배경으로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시 작되었다. 영국 대헌장 ‘마그나카르타’의 중요성은 과세, 봉 건적 권리와 사법 분야에서의 왕의 권위에 대해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제한을 가했다는 점과, 왕의 부당하 고 독단적인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관례의 힘을 재천명하였다는 점에 있 다. 본질적으로 왕은 법 위에 군림하 는 것이 아니라 법 안에서 통치를 해 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한 것이 대헌 장이었다. ‘마그나카르타’은 영국 관습법의 일 부로 보존되어 왔고, 따라서 법의 필 요성과 기능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그 내용을 옹호하거나 유지하거나 폐 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그나카 르타’은 제대로 말하자면 강제규범 (jus cogens)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그나카르타’에 나오는 구절은 프 랑스 혁명과 미국 헌법 등의 문서를 거쳐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서까 지 찾아볼 수 있다. ‘마그나카르타’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민주주 의의 상징이 되어 있다.

 

7.백년전쟁

 

배경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은 기존 카 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샤를 4세 의 뒤를 이을 후보로 큰형의 외손자 이자 나바라의 왕인 샤를(카를로스 2 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 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나바라의 샤를이 상속권 자지만, 살리카법에서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부정함으로써 결국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즉위, 왕위를 계승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살 리카법을 무시하고 여성의 왕위 계승 을 인정하더라도 에드워드 3세의 계 승권은 나바라의 샤를 다음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할 약한 명분이라도 존재하기는 했다. 그리고 이는 13세기 동안 꾸준히 왕 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시도하면 서 잉글랜드뿐 아니라 변경의 자치적 인 귀족들과 왕국에 인접한 독립세력 들의 관심을 끈 데다 14세기 초의 대 기근으로 사정이 많이 나빠진 프랑스 왕실에는 무시하지 못할 위협이 되었 다.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 1세가 잉 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 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여 기에 가스코뉴가 더해졌다. 가스코뉴 지방(현재의 프랑스 남서부지역) 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플랜태저넷 왕 조의 창시자인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307년 세입은 약 17,000파운드스털링(10만 투르리브 르)였다. 참고로 잉글랜드 왕령지 지 대 수입이 연 2만 파운드 정도고, 평 시의 양모 관세 수입이 연 11,000파 운드 정도였다. 이런 노른자위 땅을 두고 양국이 치고박은 건 당연히 어 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1201년 ~ 1259년, 1226년 ~ 1243년, 1294년 ~ 1298년, 1324년 ~ 1327년에도 이미 전쟁이 있었다. 특히 존엄왕 필리프 2 세가 벌인 첫 전쟁은 프랑스가 부빈 전투로 잉글랜드를 패퇴시키고 1215 년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가 런 던을 일시 점령해 대관식을 목전에 둘 뻔도 했다. 이는 존 왕의 급서와 헨 리 3세의 즉위로 저지되었으나, 훗날 헨리 5세가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 의 왕이 되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프 랑스는 200년 만에 되갚음을 당했던 것이다. 플란데런은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일단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잉글랜 드는 워낙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 라 항상 대립이 존재했다. 결국 1300 년 플란데런은 프랑스에 합병되었지 만 플란데런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1302년 코르트레 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자 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다. 과거엔 플란데런 상인들이 전쟁을 조장했다는 배후 상 인설이 잠시 반짝했지만, 백년전쟁은 원인이 한두 개가 아닌 데다 정치에 대한 상업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론은 군산복합체 음모론에 기반한 음모론 일 뿐인지라 결국 묻혔다.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스코틀랜드 문제였다. 잉글랜드는 샤를 4세가 죽 은 다음 해 바로 로버트 1세가 죽자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 비드 2세(1329 ~ 1371)가 1334년 프 랑스로 도망치자 잉글랜드는 데이비 드 2세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 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잉글랜드 는 맞불을 놓는 식으로 필리프 6세 (1328~1350)의 이복동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르투아 백작 로 베르 3세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이에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영향—페스트 그 이후 너무나도 풍부하던 노동력이 터무니 없이 줄어들게 되었고 이제 총체적인 차원에서 인구는 토지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제구조가 변화 하게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장원 제와 영주-농노제가 자리잡았던 지 역에서는 노동력의 희소화와 화폐경 제의 확대라는 상황을 이용하여 신분 해방된 자유농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 중 막대한 부를 취할 수 있었던 자들은 부유한 지주 및 농장주로 성 장하였는데 프랑스의 라부뢰르 (laboureur)나 잉글랜드의 젠트리 (gentry) 계층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 그 연원을 두게 된다. 반면에 종종 생 존자가 몇몇 남았더라도 더 이상 마 을 공동체에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경 우, 이 지역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가 부랑자나 임노동 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부랑자와 임 노동자는 사실 실체적인 구분이라기 보다는 최저생계를 유지할만한 푼돈 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상황 적 구분에 불과했다. 부익부 빈익빈 의 사태가 확산되어 나갔으며 이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 이라는 상황과 맞물려 각종 사회적 무질서 사태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두 왕국 모두에서 흑사병의 광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이후에는 왕국 전체에 일종의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 려는 시도를 펼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임금과 물가를 안정시키 고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1349년에서 1351년 동안 선포되었고, 특히 노동하지 않는 부 랑민들에 대한 자선금지와 노동통제 적 조치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러한 왕령 들이 실제로 얼마큼 현실적 강제력을 지녔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 이지만 그럼에도 이와 같은 생각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들에 의해 선 언되었다는 점은 이러한 생각들이 13세기까지의 중세 왕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14세기 국가체제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서유럽 지역과 다르게 중세 내내 자 유농이 존재했던 동유럽 지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인구감소로 세수가 줄어든 동유럽의 귀족들은 기존의 자유농들을 폭력과 강압에 의해 예속화시켜 나가기 시작 하였다. 흔히 재판농노제라고 부르는 상황이 농노제가 뿌리 깊지 않았던 동유럽 지역에 확산되어 나갔으며 이 는 19세기까지 지속되어 나가면서 훗날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이 지역국가의 ‘계몽군주’들이 ‘근 대적인’ 국가체제로 발돋움하려는 이 상에 대한 현실적 족쇄가 되었다. 그 결과, 농민봉기로 장원제가 해체 되었고, 젠트리 계급이 탄생되었으 며,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나중 에 청교도로서 혁명을 주도하여 영국 민주주의 혁명의 주도 세력이 되었 다. 결과 존 왕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상 실하고,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하게 되면서 이탈리 아, 플랑드르의 외국 상인들과 본격 적인 무역분쟁을 시작하게 된 헨리 3 세 시절부터 잉글랜드인의 국민 정체 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 세는 고대에 브리튼섬 전체를 통치했 다는 전설적인 브루투스 왕과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필 리프 4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영 어 사용을 금지시킨다는 '주님께서도 눈을 돌리실 혐오스러운 계획'을 세 우고 있다는 전시 프로파간다를 퍼뜨 리며 잉글랜드 신민들의 지지를 요구 했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국가의 식은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으로 주입된 자긍심과 그럼에도 결국 자신 들을 패배시킨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 개심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잉글랜드 인의 호전성과 자긍심은 이후에도 유 럽 대륙 전역에서 유명했고, 헨리 7세 치세에 잉글랜드인들은 '외국인에 대 해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그 섬나라로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 섬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일 컬어졌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이후 프랑스 왕들 은 중앙집권을 시도하며 왕권을 강화 해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삽질 때문에 흔히 보수적이고 무능한 이미 지로 알려진 장 2세도 군대의 지휘계 통을 왕권 아래로 통합하는 군제개혁 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 은 백년전쟁을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독립세력들의 최 후의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4 세기 초의 대기근과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을 극복하고, 116년 동안 간헐 적으로 이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왕 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 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 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 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 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 (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 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 다. 루이 11세(재위 1461 ~ 1483) 때 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 위스 용병대에게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프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 강시켜 1500년대 초에는 유럽 최강 국으로 떠오른다.

 

8.르네상스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들의 왕 자"라는 칭호를 누렸고, 순수한 라틴 어 문체를 구사하는 고전적인 학자였 다. "최고 영광의 기독교 인문주의 자"로도 불렸다. 그는 헬라 그리스어 의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이는 서방교회의 기독교 사상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서방교회 의 종교 개혁과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가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된 이후에 개혁 반대파였던 가톨릭 개혁 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다른 작품 으로 《우신 예찬》, 《기독교 기사 의 안내서》등이 있다. 에라스무스가 살았던 시대는 많은 지 식인들이 서방교회 제도로 발생한 성 직자의 권한 남용을 비판하던 때였 다. 어떤 비평가들은 교황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했고 새로운 신학 체계를 세웠다. 에라스무스도 동시대 주류 서방교회의 신앙과 부정, 관행을 비 판하던 교회 개혁가 중 한 사람이다. 한편 그는 서방교회 전통인 자유 의 지(free will) 관념을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 사상 중 예정론을 지 지하는 칼뱅주의자들과 마찰이 있었 다. 그의 이러한 중립 노선은 마르틴 루터 같은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종교개혁자들과 개혁 반대파인 '교황 주의자' 양쪽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 로마 교황청의 부정부패와 성직자의 권한 남용을 비판했지만, 에라스무스 는 종교개혁의 찬성파인 개신교와 개 혁 반대파인 로마 가톨릭 교회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 터는 그를 경멸조로 조롱했고, 서방 교회 개혁 반대 교황주의자들의 트리 엔트 공의회는 그를 ‘불경스런 이교 도’로 정죄했다. 이처럼 개신교와 로 마 가톨릭 양쪽 교회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지만 에라스무스는 많은 당대 신 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 유럽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신학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연구는 종교개혁에 영 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에라 스뮈스는 종교개혁의 알을 낳아 주 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시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는 루 터의 철저한 성경적 종교개혁에 동조 하지는 않아서, 1524년 루터를 비판 하는 글인 《자유 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을 썼다. 이에 대해서 루터 는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신학에 대해 서 핵심적인 비판을 했다고 말했다.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 미친 영향 중세 이후 경제 15세기 신대륙의 발견 이후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까지의 기간은 이른바 매뉴팩처 자본주의가 활발하게 이루 어졌던 시기이다. 이 때의 중요한 생 산체제는 일종의 주문생산방식인 선 대제(putting- out- system: Verlag)로 서 신대륙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업자본이 원료와 자금을 제 공하고 수공업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으로 정해진 기간에 약 정한 상품을 생산하여 상인들에게 넘 겨주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생산방 식은 생산성을 가속적으로 증가시켜 한편으로 원자재에 대한 수요의 확대 및 연관산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 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 나아가 이 시기에 들 어서면서 나타난 상업의 발달은 화폐 경제로의 이행을 촉진하였으며, 치안 과 국방에 대한 자본의 욕구는 근대 적 관료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9.종교개혁 초기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나타난 현상으로서 상업 및 산업의 발전 그 리고 근대적 관료체제의 확립에도 불 구하고, 독일에서는 성직자의 수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는 당시 독일이 로마 교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로서, 종교개혁이 최초로 독일에 서 발발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였 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16세기 와 17세기에 걸쳐 유럽의 기독교를 대상으로 일어난 개혁운동을 의미한 다. 비슷한 시기 르네상스가 예술과 문화의 부흥을 주된 목표로 하였다 면, 종교개혁은 당시 국민들의 삶 전 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여 근대 시민국가의 형성 과정에 결정적인 기 여를 하였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틴 루터가 로 마교황에 대항하여 95개조의 반박문 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태 의 발단은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면죄 부를 판매하게 되면서부터다. 이러한 면죄부의 판매는 독일을 중심으로 이 루어졌는데,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와 달리 교황의 독단과 횡포를 제어할 수 있는 중앙권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지배계 층을 중심으로 한 보수 카톨릭과 일 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진보적 프로 테스탄트로의 분열을 초래하여, 이후 각종 크고 작은 종교적 갈등과 분쟁 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마침 내 이러한 분열은 1618년 유럽 최대 의 국제전쟁이자 최초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을 초래하여 1648년 베스 트팔렌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독 일 인구의 1/3 가량이 사망하는 참담 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참고문헌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 754년 피핀이 바친 땅에서 출발했죠 신문은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 이경 구

샤를마뉴, ‘유럽의 아버지’ 성백용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이민족의 2차 이동 관운 북방의 전사 노르만(Normans), 그들 의 끊임없는 이동의 역사 연호탁

노르만족의 놀이터가 된 유럽 이강희

중세의 유럽 봉건제와 장원제 그리고 중세 도시 이재연 김에스더 최유진 염정웅 공성 민 이유진

신성로마제국 카를 대제, 로마제국 황제 되다. 김현민

1천년 신성로마제국 해체…합스부르 크가 쇠퇴 김현민

정복왕 윌리엄 폴 쥠토르

독일의 역사 인제대학교

중세 움베르트 에코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6

성상파괴론의 등장 Iconoclasm 김성수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의 특징과 차 이점 by 스토리

십자군과 셀주크 제국 요셉의 창고

두 세계의 대충돌… 5만 셀주크에 비 잔틴 20만이 무너졌죠 윤서원

십자군 전쟁은 유럽 경제에 어떤 변 화를 이끌었을까? 아재상식

이태리 상인의 위대한 도전 남종국

14-16 세기 지중해에서의 향신료 무 역 남종국

한자동맹, 발트-북해 무역 장악 김현 민

1215년에 선포한 ‘마그나카르타’ 세 계기록유산

중세 봉건사회의 해체 원인은 무엇인 가? 문성준

14세기 사회경제적 위기들과 흑사병 홍용진

4대 발명으로 앞섰던 옛 중국은 왜 유럽 열강에 먹혔을까 오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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