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알렉산더가 약탈한 페르시아의 금
알렉산더가 아시아를 침공하기 전인 BC 336년, 마케도니아의 국고에는 700만 탤런트의 금을 보유했고, 국가부채는 1,300만 탤런트에 이르렀다. 그리스의 조그마한 나라가 아시아의 강대국을 공략하면서 3000톤의 금을 획득한 것인데, 문제는 이 금화를 어떻게 처분하는지 여부였다. 마케도니아의 재정담당자들이 모여 약탈로 얻은 금의 처분을 논의했다. 당시 재정담당자들은 이 금을 주화로 만들어 유통시키면 엄청난 물가 상승을 유발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획득한 금 가운데 조금만 녹여 주화로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에게서 천문과 지리, 철학을 배웠지만 당시 경제학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대왕은 재정담당자들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쟁 비용 이외에는 통화를 주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 뒤 전쟁비용을 흥청망청 썼다는 것이었다. 마케도니아 군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공격했는데 군사비를 물 쓰듯 썼다. 군인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곳간지기들도 인플레이션이란 개념이 없었다. 불요불급한 곳에 돈을 마구 써댔고, 일부 그 금을 횡령하는 자도 있었다.
BC 323년 바빌론으로 돌아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알렉산더는 말라리아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20살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25세에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형성한 군주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용맹은 후대에 길이 남는다. 하지만 그가 얻은 페르시아의 금은 인류 역사상 첫 하이퍼인플리이션(hyper inflation)을 유발시켰다. 그가 죽은 후 4명의 장군들이 나라를 분할하면서 서로 그 금을 흥청망청 써댔다. 장군들은 그 돈으로 군대를 양성해 각자의 영토 확대에 사용했다. 조국인 그리스에서는 보리와 밀, 향료의 가격이 폭등했다. 가난한 시민들은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하지 못했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2.네로, 재정 메우려 통화 변조
고대 로마제국은 인플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인플레이션으로 끝났다. 숱하게 치르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통치자의 허영을 위해, 제국의 재건을 위해 돈이 풀려 나갔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통치기(BC 27~AD 14)에 전쟁으로 얻은 노획물과 각지에서 들어오는 공물이 로마로 흘러 넘쳤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제국의 전역에 가도가 포장되고, 항만시설과 다리, 수도(水道)가 건설되었다. 수많은 원형경기장과 광장이 수리되고, 85개 사원이 새로 건축되었다. 그는 벽돌로 만들어진 로마를 대리석으로 재구성했다. 카이사르 사원, 아그리파 목욕탕, 아우구스투스 포룸, 발부스 극장, 판테온 신전을 조성했다.
평민들은 이러한 건축물 조성에 동원되었다. 평민의 급료는 오르지 않았다. 노예가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에 평민들은 상시 실업예비군으로 전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건 사업의 비용 조달을 위해 통화를 한껏 공급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다만 여러 유물과 유적지를 관찰할 때 그의 초기 재위 10년 동안에 화폐발행량이 과거에 비해 10배 이상 되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화폐 발행 증가는 고대에도 인플레이션을 자극했다. BC 27년에서 BC 6년 사이, 즉 아우구스투스 재위 초기에 주곡인 밀과 돼지고기 가격이 두 배 오른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기간에 이자율은 12%에서 4%로 떨어졌다. 통화 완화 정책이 낳은 결과다. 아우구스투스는 통화 팽창이 물가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BC 6년 이후 화폐발행을 억제했다. 그 후 물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 네로가 5대 황제에 오른다. 그는 정신병자처럼 세금을 걷었다. 당대 기록에 의하면, 네로는 “세금을 걷고 또 걷자, 아무도 아무 것을 갖지 못하도록 하자”고 떠들었다고 한다. 네로는 세금 징수를 업자에게 맡겼다. 세금징수업자들에게 세수 목표를 입찰에 붙여 높은 액수를 써 넣은 사람이 낙찰하게 했다. 징수업자들이 목표를 넘게 징수할 경우 잉여분은 업자의 이익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이런 제도는 당연히 가혹한 세금징수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여러 도시에서 세금 저항이 발생했다.
세금으로도 재정을 메우지 못하자, 네로는 통화 변조에 손을 댔다. 이른바 통화절하(debasement)다. 명분은 대화재로 소실된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목상 통화가격과 실질적 가치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다. 새 통 화는 기존의 통화보다 가치는 떨어졌는데 동등한 가격 으로 거래되었다. 영리한 시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새 주화를 재래 주화에 비해 할인해 유통했다. 금값은 올라 갔다. 은화에는 구리를 섞었기 때문에 금화보다 가치 하 락이 심했다. 통화유통에 교란이 발생하자 네로는 기존에 유통되는 모든 주화를 회수해서 새로운 통화로 주조하라고 명령 했다. 새 통화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못했다. 세금징수 용으로 사용되었을 뿐 구매력을 증대시키지 못했다. 네 로의 화폐 절하는 황제에 대한 신뢰와 영향력을 급격하 게 떨어뜨렸다. 그는 재위 후반기에 기독교도를 무참하 게 살해하고 의심증이 번지면서 친구들을 처형했다. 갈 리아의 총독 줄리우스 빈덱스(Gaius Julius Vindex)와 스 페인 총독 갈바(Galba)가 반란을 일으켰다. 두 반군이 로마로 진군하자 원로원은 네로를 폐위시켰다. 네로는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광기를 멈추었다.
3.로마 멸망시킨 통화 변조의 마약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가지다. ‘로 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게르만족을 비롯 해 이민족의 침략을 멸망의 원인으로 보았다. 이외에도 재정 위기, 과도한 군사비 지출, 정부의 부패와 내란, 기 독교 확산에 따른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 지방통제의 약 화 등을 원인으로 꼽는 학자들도 있다. 최근 경제사학이 발전하면서 통화남발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멸망의 주 요 요인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확대되고 있다. 초기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악명 높은 황제들 이 저지른 무절제한 재정소비와 통화남발은 제국을 파 탄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다. 후임 황제들이 적절하게 통 화를 관리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통제되었다. 상황 이 극적으로 반전한 것은 3세기초 카라칼라(Caracalla, 재위: 198~217) 황제 때였다. 그는 경쟁자였던 동생 게 타(Geta)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는 과정에 반대 세력 2만 명을 살해했다. 그는 자신의 보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인 들에게 보너스를 두둑하게 주었다. 군인들의 환심을 사 는 과정에서 재정이 고갈되었다. 이어 군인황제 시대(235~284)가 되었다. 50년 동안에 자칭 황제가 26명이나 나왔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며 제위를 탐냈다. 그들이 믿는 것은 군인들밖에 없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칭타칭 황제들은 새 주화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은의 함량이 5%까지 떨어 졌다. 은화라기보다 동화(銅貨)에 근접했다. 인플레이션 은 극도로 조장되었다.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가 집권했을 때, 재정은 바닥이 났다. 아우 렐리우스의 통화 개혁은 실패했다. 물가를 잡지 못했다. 270년에서 284년 사이에 150 데나리는 3 데나리의 가 치로 떨어졌다. 후대에 들어가면서 제국의 황제들은 통화 변조와 남발 이라는 마약에 젖어들었다. 몇몇 황제들이 통화개혁 조 치를 취했지만 그 효력은 잠시뿐이었고, 또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고대 로마의 물가는 어느 한 순간에 오른 것 이 아니다. 4세기부터 게르만족이 이동을 시작하면서 로마제국은 영토수호 전쟁을 치러야 했다. 황제들은 전 비를 마련하기 위해 저마다 통화를 발행했다. 통화량 증 가는 식량가격을 폭등시켰다. 서로마제국이 공식적으 로 멸망한 시기는 476년이다. 이런 악성 인플레이션으 로 국가가 100년 더 버틴 것은 어쩌면 기적이라 할수 있 다. 작은 나라든, 큰 나라든 멸망기에는 저마다 제 살길을 찾는다. 황제와 귀족들은 동고트족, 서고트족, 프랑크 족, 훈족, 반달족과 야합해 정권을 획득하고, 부정부패 는 극도에 달했다. 영토가 좁아지면서 화폐주조도 힘들 어지고 로마는 거의 물물교환 상태로 접어들었다. 봉급 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인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오히려 야만족의 용병들이 대우를 받았다. 로 마제국은 군대로 일어났다. 숱한 전쟁과 내전을 치르기 위해 역대 황제들은 돈을 풀었다.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원로원도 납세를 하지 않는 귀족들로 구성되었 기 때문에 통화팽창을 용인했다. 그러나 과도한 통화남 발은 로마시민은 물론 군대를 피로하게 했다. 군대가 허 약해지는 것은 곧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4.지폐 남발로 무너진 몽골 제국
몽골제국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 국은 또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지폐를 공용화폐로 사 용했다. 그러나 몽골의 지폐남발은 극심한 인플레이션 을 야기했고,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 다. 금나라에서 관료로 일했던 요(遼)나라 출신 야율초재 (耶律楚材)는 징기스칸의 눈에 들어 몽골에서도 재무담 당 관료로 일했다. 야율초재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 폐를 활용할 것을 건의해 몽골 2대 황제 오고타이(태종) 시기인 1236년에 최초로 지폐 교초(交鈔)를 발행했다. 몽골이 지폐를 사용한 것은 금나라와 마찬가지로 구리 가 모자라 동화를 주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율초 재는 금에서 지폐유통이 실패한 것을 거울 삼아 발행량 을 조절할 것을 건의했고, 몽골은 1만정(錠)에 한정해 지폐를 발행했다. 중국의 전국적인 지폐 통용은 유럽과 미국보다 앞섰다. 미국에서 처음 지폐가 도입된 것은 1692년, 프랑스에선 1712년, 영국에선 나폴레옹 전쟁시기인 19세기초였다. 중국에선 원나라 시절인 13세기에 지폐 통용을 시도한 것이다. 1270년대에 접어들면서 쿠빌라이는 양쯔강 이 남의 한족정권 남송을 공략했다. 원조는 또 물가 안정을 위해 대규모 식량창고를 각 지역에 설치해 흉년과 풍년 에 맞춰 식량수급을 조절했다. 쿠빌라이 초기에 이런 노 력 덕분에 지폐는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다. 남송과의 전쟁이 격화하면서 원조정은 은화를 전비로 사용하게 되었다. 1276년에 원 조정이 보유한 은은 전 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강제했는데, 이는 시중에 지 폐와 교환해줄 은이 모자라게 되었음 의미한다. 보유 은 이 감소함에 따라 신규지폐 발행을 줄일 수밖에 없었지 만, 이런 상황에서도 쿠빌라이는 1260년에서 1273년까 지 수만 정의 지폐를 추가로 찍어 냈다. 이후 1274~1286년 사이에 원은 1,350만정의 지폐를 발행했 다. 지폐가치가 하락하면서 원 조정은 은과 지폐의 교환 비율을 고정시키는 법령을 제정하며 지폐의 안정을 유 도했지만, 사람들은 은을 지폐와 교환하지 않았다. 결국 쿠빌라이는 시장의 압력에 굴복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후 후임 황제들의 정권유지 비는 더 불어났다. 재정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졌고, 그 공백은 지폐발행으로 메워졌다. 잠시 안정책이 취해지 기도 했지만, 말기 들어 다시 통화절하 조치가 취해졌 다. 금 값을 기준으로 물가를 환산할 때, 원나라 말기인 1355년의 상품 가격은 초기에 비해 267배 올랐다는 평 가가 나온다. 그만큼 지폐 값이 폭락한 것이다. 은이 부 족한 상황에서 지폐를 남발하면서 원은 은 대신에 소금 을 지불보증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지폐는 무용지 물이 되었고, 원나라는 1356년에 지폐(교초) 제도를 폐 지했다. 그후 10년 조금 지나 1368년에 몽골 조정은 한 족정권(명)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도주했다.
5.재앙으로 돌아온 신대륙의 금
16세기초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엄청난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었다. 금과 은을 통 화의 기본단위로 했던 스페인에 막대한 양의 통화가 흘 러넘쳤다. 150년 사이에 물가는 여섯배로 올랐다. 경제 사학자들은 이를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명 명했다. 물가 상승이란 개념이 없던 중세 유럽에 처음으 로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그래서 혁명 (revolution)이란 용어가 붙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율 은 연평균 1~1.5%에 불과했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매우 억제된 통화팽창이지만,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 에 사람들은 물가가 오른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격혁명은 스페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스페인 의 금화와 은화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로 흘러들어 갔고, 그 이웃나라로 파급되면서 유럽 전반에 인플레이 션이 발생했다. 프랑스에서도 물가가 상승했다. 1568년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뎅(Jean Bodin)은 프랑스의 물가 상승이 스페인의 금은 유입에 따른 것이란 결론을 내렸 다. 주화의 양적 팽창이 물가 상승을 이끈다는 것을 당 시 사상가들은 꿰뚫은 것이다. 현대에 스페인의 가격혁명을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경 제사학자 얼 해밀튼(Earl Hamilton)이다. 해밀튼은 1934 년에 "신대륙에서 금은의 유입 증가가 스페인에서의 가 격혁명의 주된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1501년과 1600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물가상승률은 네 배였다. 해 밀턴은 스페인의 물가가 1501년과 1550년 사이에는 완 만하게 상승하다가 1550년에서 1600년까지 정점에 이 르렀다고 분석했다. 이는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은의 양과 거의 일치했음을 보여주었다. 인구팽창도 물가 상 승을 부채질했다. 1460~1620년 사이에 유럽의 인구는 증가했지만 식량공급이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했 다. 인구 증가는 곡물가격 상승을 동반했다. 스페인에게 신대륙의 금과 은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였다. 물가가 오르면서 전쟁비용도 상승했다. 욕심 많은 카를 5세는 벨저 가문에 돈을 빌리고 베네수엘라 를 떼 주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과 은을 캐서 가져가라 는 것이었다. 벨저가의 베네수엘라 경영은 오래가지 못 했지만, 이는 스페인의 부채가 심각하게 불어나고 있음 을 반증했다. 카를 5세 재위기간에 금리는 17%에서 48%로 뛰어 올랐다. 이 때, 스페인은 이미 기울어 있었 다. 카를 5세를 이은 필리페 2세가 오스만 투르크와 벌 인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1572년 군사비 지출 이 신대륙에서 긁어온 금과 세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2 배나 되었다. 1576년에 펠리페 2세는 병사들에게 줄 급 료가 국가 세입의 2.3배에 달하자 채권자들에게 디폴트 를 선언했다. 또한 국왕은 부채의 만기를 장기로 전환할 것도 강요했다. 이때 스페인은 공채를 발행한다. 펠리페 2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막강한 무적함대를 바다 에 처넣었다. 그 금액이 연간 세입의 다섯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펠리페 2세 이후에도 스페인은 1596 년, 1607년, 1627년, 1647년에도 모라토리엄(채무불이 행)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국가 신용은 떨어지고 경 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정이 악화하면서 국왕들의 입지도 좁아져 새로운 사업을 펼칠수도 없었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카톨릭의 수호자임을 자 처하면서 신대륙에서 얻은 부를 전쟁비용으로 소모했 다. 그 득은 이탈리아의 제노바 상인들이 얻었다. 제노 바 공화국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해 자금을 대줬다. 물론 공짜 돈은 아니었다. 이자를 꼬박꼬박 붙였다. 스페인의 식량 공급도 제노바 상인들이 떠맡았다. 아메라카 뉴스 페인에서 들어오는 부는 세비야를 거쳐 제노바로 몰렸 다. 스페인의 인플레이션은 1640년 무렵에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이 줄어들면서 그 막을 내렸다.
6.프랑스 혁명 좌절시킨 지폐 남발
프랑스 혁명은 절대군주의 재정낭비에서 촉발되어 재 정위기로 끝났다. 권력 교체는 있었을지언정, 국민들의 삶은 개선되지 못했다. 혁명주체세력들의 미숙한 경제 운용은 오히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조장했다. 혁명의 발단은 루이 16세 치하의 재정위기였다. 1787년 왕실은 정부 공채에 대한 이자 지급을 잠정중단했다. 이 어 1788년초 재무부가 신규공채를 발행가의 50%에 매 각했는데도 필요한 금액을 조달하기 힘들었다. 정부의 디폴트가 예고되었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공채를 기피했다. 결국은 공채발행을 취소했다. 왕실은 재정 적 자를 메우기 위해 지폐를 발행할 것이란 포고문을 발표 했다. 하지만 지폐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70 여년 전인 1715년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자 존 로 (John Law)의 건의로 지폐를 발행했다가 걷잡을 수 없 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지폐 발생계획은 취소되고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재무장관에 다시 기용했다. 네케르가 아무리 유능하다해도 이미 기울어진 재정난을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세금을 더 부과해야 하는데, 루이 16세 도 마지못해 네케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부회를 소집 한다고 발표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공장이 섰고 실업자가 파 리시내에 득실했다. 농업은 대흉작으로, 프랑스 인구의 다수가 아사의 위협에 놓였다. 1789년 5월 5일 열린 삼 부회가 열렸다. 삼부회가 열리자 지주계급은 곧바로 저 항했다. 그들은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는 불평등 법률에 불만을 품고 납세거부 결의안을 통과시 켰다. 그후 제3계급인 지주들이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대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국고는 텅 비었다. 루이 16세 는 네케르를 해임했다. 왕실은 곧 디폴트를 선언할 것이 란 소문이 돌았다. 7월 14일 성난 군중은 바스티유 감옥 을 공격하고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국민의회는 네케르를 다시 불러 재무장관에 앉혔다. 의회는 왕실과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부족한 재정을 메 우고 몰수한 토지를 유동화하기 위해 지폐를 발행하였 다. 국민의회는 재정난의 급한 불은 끄게 되었고, 프랑 스의 재정위기는 완전하게 해소되었다. 다음해에 또다 시 채무 만기가 돌아왔고, 세수가 세출에 크게 미흡했 다. 의회에선 다시 지폐 발행 논란이 불붙었다. 중농주 의자들은 통화량 확대가 자본가를 위축시키고 인플레 이션을 유발해 노동 욕구를 감퇴시킨다며 반대했다. 하 지만 반대 목소리보다 지폐 추가발행에 대한 요구가 더 커서 순식간에 통화량이 50%나 늘어났다. 초기 지폐발행은 산업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부채 원리금 상환도 지폐로 이뤄졌으며, 산업도 활성화 되고 노동자들에게도 임금이 돌아갔다. 돈이 풀리면서 소비도 늘어났다. 농민들은 몰수한 교회 토지를 경작해 자영농이 되었다. 손 쉽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게 되면서 추가로 지폐를 찍어내자는 유혹이 생겨났다. 하 지만 통화 증발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 기가 조장되었다. 1791년 파리의 주식시장은 투기열풍 에 휩싸였다. 1791년 9월 30일에 새로 선출된 입법의회는 중도온건 파인 지롱드당과 좌파 자코뱅등으로 나눠졌다. 그때 정 세는 합스부르크와 프로이센, 영국, 벨기에의 침공가능 성이 높아졌다. 반프랑스 동맹군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1792년 9월 국민공회가 구성되면서 자코뱅파가 집권했 다. 국민공회는 허울만 남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 을 수립했다. 이 공포의 시대에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는 지폐를 남발했다. 1793년 한해에 그동안 찍어낸 것보다 많은 30억 리브르의 지폐를 발행했다. 프랑스군은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그곳의 주화를 약탈해 안정책을 취하려 했 으나, 벨기에인들은 주화를 감췄고 프랑스 지폐로 곡물 을 교환하지 않았다. 물가는 고공행진했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파의 반격으로 실각하고 기 요틴에서 처형되었다. 그 결과는 억압적인 가격통제를 해제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지폐는 더 이상 구매수단으 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정부는 군대와 공무원 봉급을 현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못 했고, 국민공회 의원들은 자신의 봉급을 치즈로 가져갔 다. 프랑스 혁명기의 통화팽창은 결국 나폴레옹의 쿠데타 를 허용하는 조건을 형성했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입법부를 해산하고 금속화폐제도를 다시 확립한다고 공포했다. 나폴레옹은 윤전기 작동을 중지시키고 화폐 량의 적정 수준을 유지했다. 재정 질서는 회복되었고,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사라졌다.
7.미 남북전쟁, 북군이 이길수 밖에 없던 이유
전쟁의 최종 성패는 경제력이 좌우한다. 미국 남북전쟁 (1861~1865)에서도 북쪽의 미합중국 경제력이 남부 연 맹을 압도했다. 남과 북의 정부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서로 지폐를 남발했다. 결과적으로 북쪽의 물가상승률 이 80%에 그친 반면, 남쪽은 9,000%에 달했다. 재정조 달 능력에서 양측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드러났고, 전쟁 은 그 능력에 의해 귀결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남부 연뱅은 채권 발행을 선택했 다. 전쟁 초기에 해외채권 발행은 남부가 북부보다 성공 적이었다. 세계 면화의 주산지였기 때문에 면직업이 발 달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남부 채권을 소화해 주었다. 또 당시 남부 뉴올리안스가 뉴욕만큼 금융중심지로 성 장해 있었다. 1861년초 남부 연맹은 1,500만 달러의 채 권을 무난히 발행했다. 그런데 북부 해군이 해상을 봉쇄 하면서 뉴올리안스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면화를 담보 로 하는 코튼본드(Cotton Bond)의 해외발행도 조여들 었다. 그러자, 남부 정권은 전쟁비용의 60%를 신규 지 폐를 인쇄해 조달했다. 남부의 재무장관 메밍거 (Christopher Memminger)는 지폐 발행이 인플레이션 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별 효과가 없었는데다 전쟁이란 필요성에 의해 지폐 발행 이라는 최악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패전기 인 마지막 6개월 동안에 물가는 급등해 종전시점인 1865년 4월에 상승률은 9,200%를 기록했다. 북부에서도 지폐가 발행되면서 지폐의 가치는 하락하 고, 금값은 치솟았다. 1862년 12월에 금 100달러는 그 린백 129달러에 거래되었고, 1863년 봄엔 152달러로 치솟았다. 게티스버그 승전 때에는 금 100달러는 그린 백 131 달러로 떨어졌다가 전투가 교착될 때엔 258 달 러로 치솟았다가 종전 무렵엔 150 달러에 안착했다. 북 부 연방이 남부와 달리 지폐 발행을 제한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채권판매자 제이 쿡(Jay Cooke) 덕분이 다. 그는 애국심을 고취하며 연방채권을 대량으로 매각 하는데 성공했다. 1862년부터 시작한 제이 쿡의 연방채 권 판매는 하루평균 100만 달러 이상 소화했으며, 당시 까지 세계에서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주문은 부유 한 사람에게서도 왔지만 주로 일반 대중에게서 온 것이 다. 제이 쿡이 판매한 연방채권은 금리 6%를 줬다. 20년 만 기였기 때문에 당장에 연방정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았고 물가를 자극하지도 않았다. 연방채권 발매 성공 으로 북부 정권은 지폐 발행 예정량을 크게 줄일수 있 었다. 그 결과 북부의 물가상승률은 4년간 80% 상승하 는 것으로 그쳤다. 남부 지역 상승률 9,200%와 대조된 다.
8.비싼 댓가 치른 볼셰비키 혁명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돈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을 일으켜 자본가를 몰락시키고 조용히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17년말, 볼 셰비키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의 생각을 현실 에 적용했다. 지폐를 남발해 자본가의 돈을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1919년부터 루블 지폐는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1919년 지폐 발행량은 1,642억 루블, 1920년엔 9,436억 루블, 1921년엔 16조3753억 루블, 1922년엔 1,976조9,000억 루블, 1923년엔 무려 17경6,505조5,000억 루블을 찍어 냈다. 영국돈 1파운드당 루블 환율은 1919년말 3,000에 서 1922년말 7,173만, 1923년말 50억4,000만으로 수직 상승했다. 레닌은 자본주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 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누구를 위한 공산주의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1921년초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정책이 경제를 붕괴시 키고 농민반란을 확산시켰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가 진 것을 빼앗을 때 저항이 엄청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교조적 공산주의 이론이 바로 적용되지 않 는다는 것을 알고는 공산주의로 가는 도중에 과도적 단 계가 필요하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찾아 냈다. 그렇게 해 서 나온 결과가 1921년 채택된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이다. 누군가는 NEP를 “이보 전진을 위 한 일보 후퇴‘라고 평가했지만, 소련 공산주의는 그후 일보도 전진하지 못했다. 레닌은 더 이상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수탈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세금 형태로 곡물을 걷고 부족분은 사는 방식을 채택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도 현물로 봉급을 주던 것을 화폐로 주는 방식을 채택한다. 1922년에 중앙은행(Gosbank)을 설립해 과거 차르 체제 의 금본위제도로 복귀했다. 레닌은 부르죠아 은행가 나 콜라스 쿠틀러(Nicholas Kutler)를 영입해 중앙은행을 관리토록 했다. 소련 공산당은 금으로 태환하는 새 은행 권으로 체르보네츠(Chervonets)를 발행했다. 이로써 소비에트 초기에 7년에 걸친 하이퍼인플레이션 은 가까스로 잡히게 되었다. 이때 굶주린 사람 1,300만 명이 후에 조기사망하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치 르며 러시아는 공산주의 실험을 했다.
9.카르타고처럼 붕괴된 패전국들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심 각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산업시설은 파괴되었고 수많 은 인명을 잃었다. 참전국들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 하기 위해 금본위제도를 이탈했고, 대부분 나리에서 부 채비율이 GDP의 100%를 넘어섰다. 농지가 전쟁터가 되고, 농민들이 군대로 끌려가는 바람에 곡물생산이 급 감했다. 생산물자가 부족해 물가는 대부분 나라에서 치 솟았다. 전후 패전국들에게 가장 큰 압박은 전쟁배상금이었다. 승전국들은 패전국에 대한 복수심에 타오른데다 자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패전국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물 렸다. 패전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산업시설이 파괴된 가운데 세수는 걷히지 않고 배상금은 물어야 했 다. 결국 돈을 찍어내야 했다. 독일의 전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잘 알려져 있다. 독일 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러나라 로 쪼개졌다. 국토가 쪼그라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도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폴란드는 전승국에 포 함되지만 전후 소련과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인플레이 션을 겪어야 했다. 독일(Germany), 오스트리아(Austria), 헝가리(Hungary), 폴란드(Poland)로 대표되는 GAPH 국 가들은 전쟁의 업보를 짊어지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받아들여야 했다. 1921년 독일에 부과된 전쟁배상금은 1,320억 금마르크 였다. 지폐가 아닌 금으로 환산한 가치였다. 협상에 참 가한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는 이 가혹한 금액에 대해 “독일 경제플 파괴하기 위한 카르타고 조약”이라고 혹평했다. 독일 경제는 카르타고 처럼 파괴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전쟁배상금 을 갚지 않자 1923년 1월 11일 국경을 넘어 독일 최대 석탄산지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독일 좌파는 파 업으로 대응하고 민족주의자들은 재무장을 주장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 은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찍어 냈다. 독일의 마 르크화는 1922년부터 자유낙하했고, 인플레이션은 1923년에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1924년 독일이 렌텐마르크라는 새로운 화폐를 도입하고 그 발행을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진정 되었다. 승전국들이 배상금을 삭감하기로 양보한 것도 물가안정의 한 요인이 되었다.
10.중 국민당 정권,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민심 잃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민심을 잃고 중 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준데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한몫을 했다. 국민당이 인플레이션을 남발하자 상인들 은 하루에 몇번씩 가격표를 바꿔야 했고 나중에는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국민당의 지폐남발은 중산층의 지지 를 잃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국인민들은 국민당 군사력 의 10분의1도 되지 않는 중국공산당을 선택하게 된다. 1935년 이전까지 중국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금융시스 템이 운용되고 있었다. 민간소유 은행들이 전국적으로 영업을 했고, 외국계 은행도 설립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및 일본군과의 이중전쟁을 치르면서 민간은행 에서 차입을 통해 재정을 꾸리고 전비를 마련했다. 은행 들은 금 또는 은과 태환하는 조건으로 어음을 발행했다. 은행들은 공산당보다는 국민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국 민당에 자금을 대부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이듬해 만주국이 설립되 자 국민당 정부의 공채는 폭락했다. 정부공채 가격은 액 면가의 60% 아래로 주저앉았고, 은행들은 도산 위기에 처했다. 설상가상,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가 공 황타개책으로 1934년 은구매법(Silver Purchase Act)을 제정하는 바람에 은의 국제가격이 3배나 급등했다. 중 국에선 명(明)나라 이래로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 다. 은이 대량으로 미국으로 수출되는 바람에 중국엔 은 이 부족해 졌고, 통화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국민당 정부는 은화 수출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지만, 밀수 출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1935년 쑹쯔원을 이어 재정 총책이 된 쿵샹시(孔祥熙) 는 은행 위기에 직면해 주요 은행을 단계적으로 국유화 하는 조치를 취하고, 중앙은행에 은과 태환하지 않는 조 건의 지폐발행권을 주었다. 이때부터 국민당 정권은 지 폐를 남발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국민당 정권은 산업시설 의 90%를 일본에 빼앗기고 부유한 동부와 남부지역을 상실했다. 일본은 해안을 장악해 중국 정부의 수입을 차 단했다. 세원을 잃은 국민당 정부는 부유층의 헌금과 해 외 원조로 버텼지만, 재정을 충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 었다. 곡물과 생활 상품이 극심하게 부족해 지면서 1937년 12월~1939년 12월 사이에 물가가 두배로 뛰었 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패망까지 국민당 정부는 지출의 65~80%를 지폐 발행에 의존했다. 국민당의 재정담당 자들은 지폐발행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경제 중심지인 베이징과 상하이, 난징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 에서 공채 발행이 불가능했고, 퇴각한 지역은 가난한 농 민들이 사는 곳이어서 세금을 올릴 처지도 되지 못했다. 전후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 짧은 기간에 물가가 떨 어지는가 싶었지만, 곧바로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공장 이 재가동되고 농업생산이 재개되기도 전에 내전이 발 발하면서 국민당 정부는 다시 지폐를 찍어 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중국인들은 국민당에 등을 돌리 기 시작했다. 국공내전이 치열하던 1948~1949년, 국민 당 정권은 공산군과 싸우기 위해 지폐를 발행해 전비로 충당했다. 위안화는 폭락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 고 민심이 이반하자 국민당 정부는 금본위제도를 도입 했다. 이 무렵, 중공군이 물밀 듯 남하하고 부자들은 화 폐개혁에 협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금을 감추고 내놓 지 않았고, 결국 금태환이 무너졌다. 1948 8월부터 1949년 4월까지 물가는 1,124배나 뛰었 다. 대만으로 쫓겨가기 전에 화폐개혁은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담당했다. 그는 화폐개혁이 실패한 것을 인정하고 금, 은, 외환의 소지를 허용했다.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저지하는 걸 포기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은 전쟁에 대한 공포만큼이나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 다 주었다. 수억의 중국인들은 생계를 잃었으며, 국민당 정부의 신용은 철저히 무너졌다. 이는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괴뢰정권 지폐를 교환하는 데서도 문제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점령한 화 중·화남지역의 괴뢰정권 지폐를 200대1로 교환했다. 그 들은 8년을 기다리며 국민당정권이 돌아오길 기다렸는 데, 그 어려운 와중에서 모았던 돈이 허공에 날아간 것 이다. 이전의 괴뢰정권은 국민당 정권의 법정지폐와 2 대1로 교환해 주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권은 그 가치를 적절히 보상했어야 했다. 결국 일본에 점령당했던 곳의 국민들은 차라리 일본 통치하에서 생활이 더 낳았지 않 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국민당 간부들 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품과 재산을 독점했고, 해외 에서 들어오는 구호물품을 경매해 사복을 채웠다. 중국 인민들은 국민당 정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으며, 민 심이 공산당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11.김정은 권력 승계 중에 생긴 북한 초인플레이션
북한은 2009년 12월에서 2011년 1월까지 하이퍼인플 레이션을 겪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북한 이 김정은 권력 승계과정에서 통화량을 늘려 인민들의 선심을 쓰려다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는 것이 한국 경 제학자들의 분석이다. 그 결과로 북한 원화는 구매력을 상실하게 되고 중국 위안화나 미국 달러화가 거래되는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북한의 인플레이션은 2009년말에 갑자기 촉발된 것은 아니다. 그 뿌리를 찾자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다. 1994~1998년 북한은 소련 해체와 동구권 붕괴의 시 기에 대기근을 직면해 수십만명의 아사자를 냈다. ‘고난 의 행군’으로 불리는 이 기간에 북한에선 최소 24만, 최 대 350만명이 식량부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주민들은 자구책의 일환으로 장마당을 열었고, 이 비공식시장이 초기적 시장메커니즘을 형성해 나갔다. 북한 정권은 공산권 붕괴로 대외교역이 축소된 가운데 선군정책을 추진하면서 재정이 바닥났다. 근로자 임금 이 체불되는 현상도 빚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 일 정권은 2002년 7월 1일, 이른바 7.1 경제관리개선조 치를 시행했다. 7.1 조치는 주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시장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조치로 해석되었다. 7.1 조치의 골격은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해 재정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가격보 조금 폐지는 상품가격 상승을 유발했고, 이에 따라 주민 의 생활비가 인상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 정권은 국정 가격(고시가격)을 평균 25배 올리는 대신에 근로자 기 준임금을 평균 18배 인상했다. 동시에 환율을 70배 올 려 1달러당 환율이 2.2원에서 153원으로 상승했다. 이 조치는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민들 에겐 임금상승폭보다 높은 물가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 가 정권은 18배로 늘어난 근로자 임금 상승분을 통화증 발로 해결했다는 게 국내 학자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국 채를 발행할 능력이 되지 못하고 세금을 늘릴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통화발행을 통해 근로자 임금상승 분을 충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 정권은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2009년 11월 30일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 다. 2009년 화폐개혁은 2002년 7.1조치의 반동으로 추 진된 것으로 해석된다. 7.1 조치로 시장메커니즘의 틈새 가 열리자 정부는 적자인데 비해 민간에서 부가 형성되 었고, 공산당 보수파들에게 힘이 실려 부의 재편을 시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물가는 과거에 상상할수 없 을 정도로 고공행진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쌀값은 3 년 사이에 260배, 달러 환율은 170배 상승하며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는 화폐개혁으로 물가의 단 위는 100분의1로 낮아졌지만, 임금은 과거 통화의 금액 으로 유지함으로써, 높아진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통화 공급을 확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인플레이션을 통해 정부가 세수를 확대하는 인플레이션 조세 (inflation tax)의 결과라는 것이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사망하기 직전에 김정은을 후계 자로 지명했다. 2009~2011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경 제적 이유보다 김정은 권력승계라는 정치적 이유가 강 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새로운 화폐가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이미지를 연출하고, 시장가격을 100분의1로 하락시킨 상태에서 임금과 현물 분배를 과 거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인민대중의 지지를 확보하 려 했다는 것이다. 김정은 배려금 명목으로 1인당 500 원의 선심을 쓴 것도 그 일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 한의 화폐개혁은 본래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 다. 북한 원화는 구축되고 중국 위안화와 미국 달러화 등 외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데일리NK에 따르면 이 시기에 중국 접경지대에선 거래 의 80%가 위안화로 이뤄졌고, 국경에서 먼 지역에선 50% 정도가 미국 달러화로 상품이 교환되었다고 한다. 한케 교수는 북한 원화의 가치하락은 자연스럽게 달러 리제이션 현상을 가속화했다고 평가했다. 김정일 사망 과 동시에 2012년 김정은 체제가 수립되었다. 김정은 정권은 북한 경제의 달러화 또는 위안화를 저지하기 위 해 통화 증발을 중단했다. 베네수엘라와 짐바브웨의 경 우 현지통화가 무력화되면서 외국환이 주도화폐로 된 것을 인식했다는 해석이다.
12.인플레이션 왜곡
인플레이션은 위정자들에 의해 창출된다. 인류 최초의 인플레이션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에서 뺏은 막 대한 양의 금을 유통하다가 20년간 물가 폭등을 겪은 것이다. 로마제국의 네로황제는 재정을 메우려 통화를 변조했고, 통화증발은 결국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몽골제국도 지폐를 남발해 극심한 인플레이션 일 겪다가 단명으로 끝났고,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남군 은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다 북군에 패했다. 작금의 세계적 인플레이션은 미국은 물론 각국이 초유 의 전염병 국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통화를 남발한 결 과다. 바이든은 돈을 풀어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 그 환 심을 표로 연결하려 했을 것이다. 그 돈이 주식시장으 로, 부동산으로 흘러가 불황 속에 자산시장을 부풀렸고, 이제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 플레이션의 주원인이 아니다. 다만 통화팽창에 따른 물 가상승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편, 서머스와 크루구먼의 논쟁은 정통경제학의 승리 로 끝났다. 어떤 면에서 경제는 아주 단순한 원리에 의 해 움직인다. 돈을 많이 풀면 인플레이션이 생기고 돈을 걷어들이면 경기가 꺾인다. 신경제이론이라며 마치 첨 단경제학인것처럼 뽐내지만 수요공급의 가격결정 요인 은 변함없이 작동한다. 크루그먼은 새로운 경제에도 고 전적 시장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 이다. 지금 또다른 왜곡이 발생한다.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상태이면 미국 화폐인 달러 가치는 하락해야 한다. 그럼 데도 달러 가치는 상승하고 있다. 또다른 신화가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달러가 안전자산이라는 신화의 허구 성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증가하는 부채, 이대로 괜찮은가 부채 문제는 전적으로 해당 국가의 맥락에 따라 판단해 야 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는 2007년 소득 대비 부채 비 율이 269%에 달했다. 반면 미국은 125%였다. 그러나 가계 채무불이행의 위험은 미국이 훨씬 높았다. 돈을 누 가 빌렸느냐에서 차이가 생겼다. 덴마크의 경우 고소득 자들이 가장 많이 빌렸고, 모기지 대출도 부동산 가격의 80%로 제한된 상태였다. 반면 미국에서는 하위 10%가 상위 10%보다 더 부채 비율이 높았다. 정부 부채에서는 채권자 구성이 중요하다. 일본의 GDP 대비 정부 부채율 은 230%로 그리스의 177%보다 더 높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그리스가 더 나쁘다. 채권자의 분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의 경우 채권 소유자들이 대부분 자국 민으로 정치적 안정에 자신들의 이익이 걸려 있다. 그리 스의 경우 대부분의 채권자들이 외국의 은행이다. 신용 위기가 발생할 경우 그 전파 속도가 훨씬 빠르다. 한편, 일본의 중앙은행과 정부가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단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세금을 줄이거나 화폐를 발행 해 공공 지출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금 해 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일본은행은 막대한 양의 일 본 정부 채권의 일부를 영구적으로 탕감하고 정부는 소 비세 인상 방침을 취소해야 한다. 이는 제로 금리로 연 명하는 부채의 덫에서 설득력있는 해결 방안이다. 각국 정부는 ‘건전한’ 경기 회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가계에 부채를 늘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정부 지출은 비 생산적이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준다는, 자주 인용되는 거짓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가 사 회투자를 늘려 득을 보는 것은 미래세대이며, 이들은 이 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있다. 저금리 혹은 마이 너스 금리가 된 지금이 오히려 정부가 지출을 늘릴 절 호의 시기이다. 양적 완화로 글로벌 자산 거품이 발생했는가 전 세계적으로 비금융기관의 채권 발행이 2010~2015 년 기간 상당량 증가했다. 많은 비금융기관들이 저금리 를 이용해 돈을 빌렸지만 이를 고정투자에 투입하는 대 신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다른 금융자산을 구입하는 데 썼다. 금리를 제로 수준에서 유지한다고 반드시 높은 수 준의 신용 대출이나 투자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유동 성 홍수는 실물경제를 강화하기보다는 금융 자산을 만 들어내고 자산 거품을 키우는 데 불균형적으로 투입됐 다. 또 다른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 는 상황이다. 또한, 최근의 시장 변동은 양적완화로 인한 글로벌 자산 거품이 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다수 선진 경제권과 신흥 경제권의 실물경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반면 금융시장은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으로 최근까지 매 우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 상태다. 문제는 금융시장과 실 물경제의 불균형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느냐이다. 양적 완화를 취했던 미국은 어느정도 경기 호조를 보인 반면, 유로존은 여전히 회복세를 보이지 않는 이유 부채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수십년간 경상수지 적자 를 보인 채무국이다. 반면 유로존과 일본은 흑자를 유지 하면서 채권국이 됐다. 마이너스 금리는 채무자에게 유 리하고 채권자에게 불리해 금융위기 이후 제로 금리를 택한 미국과 영국은 경제 회복을 이룬 반면, 유로존과 일본에서는 거의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채권 자가 초저금리로 손실을 보면 그만큼 채무자는 이득을 본다. 경상수지 불균형은 금융위기 이후 전반적으로 줄 었지만 역전되지는 않았다. 이는 채권국과 채무국 경제 의 엇갈림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2009년 당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이자율을 낮추면 투자자들이 채권에서 주식으로 투자 대상을 옮길 것이 라고 예상했다. 이로써 이들 금융자산의 가치가 올라가 고 이를 소유한 가계의 부를 증대시켜 소비를 늘릴 것 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의 전략은 잘 들어 맞았다. 부의 증가는 소비 증가로 이어졌고, 그 결과 2013년 미 국 GDP는 2.5% 증가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미국과 달리 은행과 대주주의 주식 지분율이 높다. 따라서 양적 완화가 미국처럼 가계의 부를 증가시켜 소비 증가로 이 어지는 구조가 아니다. 일본이 선뜻 금리를 못 올리는 이유 일본이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린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 다. 마이너스 금리나 이미 막대한 규모인 양적완화 프로 그램을 확대하는 것은 디플레이션 압력을 상쇄하기에 는 충분하지 않다. 매우 낮은 수준의 장단기 금리가 명 목 수요를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1990년 이후 일본의 경험은 일단 기업이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다고 느끼면 금리를 더 낮춰도 투자 결정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마이너스 금리 도입 직후 일본의 10년 만기 채권수익률이 0.2%에 서 0.1%로 내려갔고 독일의 경우 0.5%에서 0.35%로 내 려갔지만 실물경제에서의 소비나 투자 결정에 의미 있 는 차이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이 찍어낸 달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양적완화는 소비와 투자, 성장을 자극하는 데 거의 기여 하지 못했고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추가적 인 유동성 공급이 초과 지불준비금의 형태로 중앙은행 금고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2006년 미국에서 시행된 금융서비스규제경감법은 연방준비제도가 법정 및 초과 지불준비금에 대해 이자를 지불하도록 해 양적완화 조 치의 효용성을 떨어트렸다. 금융기관들은 실물경제에 돈을 대출하기보다 연준에 돈을 맡기는 걸 택했다. 연준 에 돈을 맡겨놓은 금융기관들은 지난 5년간 완벽하게 위험을 피하면서 거의 300억달러(약 36조5400억원)를 벌었다. 연준이 금융권에 후한 보조금을 지급한 셈이다. 또한, 각국은 정부 부채를 줄이기 위해 지출을 줄였고 이로 인한 디플레이션 효과를 막기 위해 저금리로 돈을 풀고 있다. 그러나 수요가 침체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 감에) 저축 성향이 높아지고 은행이 부채를 줄이는 상 황에서는 유동성 증가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지 않 는다.
13.달러 기축통화 질서를 위협하는 인플레이션 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전 세계 공급체인망 (supply chain)에 혼란과 정체가 발생했다. 2021년 하반 기부터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연준은 기존의 가이던스보다 서둘러서 2021년 11월에 테이퍼링을 단행했고, 이어서 2022년 3월 연방공개시 장위원회(FOMC)에서 첫 번째 금리인상을 시작하게 된 다. 자산시장은 유동성 회수가 시작되자 민감하게 반응 해서 2022년 9월 23일 기준으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증시가 작년 11월 이후로 20% 이상 하락했다. 1980년부터 2020년까지 기축통화 달러는 기준금리의 고점과 저점이 계속해서 낮아지는 디플레이션 사이클 안에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중에 유동성을 공 급해도 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언제나 디플레이 션의 우려 속에서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담론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까운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동안 저성장률과 저물가가 고착화되는 디플레 이션을 장기간 경험하고 있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1955년부터 1980년도까지는 기준금리의 고점이 계속 해서 오르는 인플레이션 금리 사이클에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시장 상황은 1980년부터 2020년까지 우 리가 알고 지내던 디플레이션 금리 사이클과 다른 모습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세계의 기축통화가 파운드에서 달러로 전환되던 격동 의 시절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했고 공교롭게도 2022년 여왕이 서거 후 영국 경제와 기축통화 달러는 위기에 봉착해있다. 2020년 10월 영국 물가는 급등하고 자국 통화인 파운드화 가치는 급락하고 있다. 기축통화 달러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연준(Fed)은 달 러의 기준금리를 빠르게 올리고 있다. 영국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감세 정책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는데 직후 에 파운드화가 급락하게 됐다. 모두 인플레이션 우려(화 폐가치 하락)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2022년 8월 기준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9.9%로 주요 7개국 중 가 장 높은 수준이고 올해 초에 1파운드당 1.3달러대였던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20% 가까이 추락해 최근 1달러 에 가까워졌다. 유럽은 만성적인 디플레이션 상태를 겪어 마이너스 금 리를 도입하고 있다가 지난 7월 뒤늦게 기준금리를 인 상하며 마이너스 금리 시대를 마감했다. 일본도 완화적 통화정책과 양적완화를 유지하면서 달러 대비 가치가 폭락해있어 금융당국의 개입이 시작됐다. 준기축통화 에 해당되는 유로화, 엔화, 파운드화가 기축통화인 달러 대비 금리인상 여력이 부족해 급격하게 통화가치가 하 락하고 있고 기존 기축통화 시스템의 균열이 보이고 있 는 양상이다.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가 하락하자 영국 중앙은행인 영 란은행은 장기국채 금리의 폭등(국채금리가 상승하면 국채가격이 하락한다)을 막기 위해 일정 금리 이상의 장기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기로 했는데, 이는 일본이 계 속해 오던 양적완화 정책과 유사하다. 결국 영국도 양적 긴축의 기조에서 한발 짝 물러서고 일본의 절차를 따라 가는 모양새다. 10월 4일 파운드화의 하락을 진정시키 기 위해 영국 정부는 감세정책을 일부 철회해 완화하기 로 발표했는데, 준기축통화에 해당하는 파운드화의 줏 대 없는 통화정책은 현 금융 통화시스템의 위기를 반증 하고 있다. 미국의 공격적 기준금리 인상과 영국 파운드화 가치 폭 락 등으로 유럽 금융 중심지인 영국 경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스위스의 세계적 투자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 (CS)의 위기설이 제기되며 주가가 연초 대비 절반 이하 로 떨어졌다. 현지 시간 지난 10월 3일에는 올해 들어 이미 반 토막 나있던 크레디트스위스(CS) 주가가 스위 스 증시에서 장 초반에 약 11.5%나 급락해 역대 최저가 인 3.52 스위스프랑을 기록했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부 도 위험 지표인 1년물 신용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 엄도 이날 장 초반 5%를 넘겨 역대 최고치로 치솟았다. 한편, 크레디트 스위스가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한 리 먼사태의 데자뷔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급증하고 있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자산 규모가 리먼에 버금가고 경영 진들의 대처방식도 유사하다고 지적 받고 있다. 과거 도 이치방크의 위기 때는 도이치방크의 자산 규모가 리만 보다 크고 코로나로 인해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를 시행 하던 시기라 무사히 위기를 넘겼지만, 크레디트 스위스 의 자산 규모는 리만과 거의 비슷하고 기준금리도 과거 금융위기 시절처럼 상대적으로 높다. 투자자들은 CS 주 식과 채권을 투매했고, 대신 CDS(파산할 경우 채권으로 보상 받는 보험)는 대규모로 사들였다. 2008년 세계금 융위기 도화선이 됐던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다. 전 세계의 금융질서가 2022년처럼 무질서한 흐름을 보 인 것은 지정학적인 체제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1980 년 이후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세계평화와 미국과 유럽 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물결은 자본과 무역의 이동을 촉발했다. 낮은 금리와 낮은 세금은 경제성장을 가속시 키고, 탐욕으로 인해 경제위기가 오게 되면 연준(Fed)과 각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를 통해 기준금리를 낮추다 가 결국 제로금리까지 도달했던 디플레이션 시대를 우 리는 일상으로 살아왔다. 2022년 이후로 우리는 러시아 가 시작한 전쟁과 각국의 재정정책의 혼란 및 높은 금 리와 높은 세금으로 특징 되는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살 게 될는지도 모른다.
14.현 인플레이션 위기 원인과 지속 정도
1)코로나 대유행에 따른 소비 패턴의 변화—코로나 대 유행에 따른 상품 지출 호황은 마무리되었고, 팬데믹 이 후 미국의 상품 및 서비스 소비는 정상적인 균형을 회 복 중이다. 내구재 지출의 상대적 비중은 다시 낮아지기 시작했지만, 서비스 지출의 상대적 비중은 아직 회복되 지 않고 있다. 즉, 코로나 대유행에 따른 소비 패턴의 변 화는 더 이상 미래 인플레이션을 좌우하지 않을 것이다.
2)공급망 붕괴—글로벌 상품 생산 체계는 코로나 대유 행으로 인한 상품(특히 자동차 등 내구재) 수요 급증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팬데믹 초기에는 코 로나19로 인해 상품의 생산과 운송이 모두 붕괴되고 있 었다. 즉, 수요 충격과 공급 충격이 동시에 상품 시장을 덮친 것이다. 수많은 공급망 문제가 해결되려면 아마도 몇 년은 더 걸리겠지만, 진전이 나타나고 있으며, 공급 망 붕괴로 인한 끝없는 가격 상승이 멈췄다는 것은 확 실하다. 가격이 상승된 상태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인플레이션이 더 심화되지는 않는 상황이다.
3)팬데믹 긴급 재정부양책—이제 긴급 재정 지출이 종 료되었고 더 이상 연장되지 않는다. 미국 의회예산처 (CBO) 추정치에 의하면, FY2021 기준 $2조 4000억에 달 했던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규모는 FY2022 기준 $6370억까지 감소하고(각국의 미국채 매도 영향이 큰 점이 유력한 원인이다) 2023년에도 더욱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대유행 기간의 재정 지출은 분명 인플레 이션을 유발했으나, 앞으로의 인플레이션에는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4)중앙은행 자산매입—정부 지출이 폭증하고 이와 연 동하여 중앙은행이 대대적으로 채권을 매입하는 경우, 가격발견 프로세스가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해 야 한다. 이때,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하지 않고 증세 도 없을 경우, 민간 매각 국채가 추가적으로 공급되면서 채권수익률이 더(아마도 대폭으로) 상승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전제된다. 그렇게 채권수익률이 상승하여 주택 담보대출 금리가 올라갔다면, 2021년에 나타난 주택시 장 과열은 없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주택 매입과 관련 된 내구재 수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의 자산매입이 정부 지출 확대를 뒷받침하려 는 목적인 경우와 재정정책과 무관한 경우 사이에는 차 이가 있다는 점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양적완화(QE)는 2010~2016년에 대대적인 자산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 친 것으로 보이지만, 재정 지출이 동반되지 않는 양적완 화는 실물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거나 소비자물가 상승 을 자극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즉, 2010~2016년과 달리 2020~2021년 미 연준의 자산매입이 인플레이션 유발 요인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이러한 자산매입과 정 부의 대규모 신규 지출이 서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 다.
5)금리정책(그리고 통화정책의 지연)—마지막 관찰사 항은, 미 연준이 단기금리 제로 근접 시대의 막을 내렸 다는 사실이다. 완화적 금리정책이 미래 인플레이션의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동인은 사라지 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미 연준의 2022년 단기금리 인 상이 금리정책의 “공격적 긴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단기금리가 기대인 플레이션에 대한 합리적 예측보다 낮은 수준이라면, 제 로금리보다는 덜하더라도 분명 완화적인 금리이다. 즉, 미 연준은 2022년 1~7월에 실효 연방기금금리를 약 0.10%에서 2.33%까지 인상하는 과정에서 가속 페달에 서 발을 떼었을 뿐이지 아직 브레이크를 밟지는 않았다 고 해석하며, 통화정책의 긴축보다는 완화적 정책의 회 수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을 선호하든 간에, 미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금리 정책은 회수되는 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금리정책의 변화가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일반적으로 길고 다양한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이미 두 배로 상승했지만, 주택시 장에 대한 장기적 영향은 아직 관찰되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금리 상승이 실물경제에 미칠 장기적 영향 이 무엇이든 간에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후기 선진국과 신흥국 모두 잠재 성장률이 하락했다. 성장세 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금융 중개기관들은 장기 저축을 장기 투자로 적절히 전 환시키지 않고 대부분의 국가들은 교육과 기술 훈련, 인 프라 구축에 필요한 만큼을 투자하지 않고 있다. 민간 투자가 떨어지는 것은 공공 투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공공 투자가 없다면 생산성은 하락하고 결 국 삶의 질은 떨어진다. 각국 정부는 연기금과 보험기 금, 상업은행의 장기 저축을 미래 산업을 위한 공공 및 민간 투자에 쓸 수 있도록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 중앙 은행과 헤지펀드는 경제의 장기 성장과 금융 안정을 이 룰 수 없다. 오직 공공과 민간에서의 장기 투자만이 세 계 경제를 현재의 불안정과 느린 성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성장과 고용, 소득 증대를 가져온 과거의 성공사례에서 공통적으로 공공과 민간의 투자 수준이 높았다. 경제 성 공을 거둔 개도국의 경우 투자가 GDP의 30% 이상을 차 지했다. 공공투자는 민간투자의 수익률을 높이고, 따라 서 민간투자를 증가시킨다. 마지막으로 성공적인 발전 전략의 핵심 요소는 포용성(inclusiveness)이다. 하위 계 층을 배제하는 성장 전략은 정치·사회 통합을 해치고 결 국 이에 대한 지지를 상실하면서 실패한다. 교육, 보건 과 같은 기본 서비스를 높은 수준에서 제공하는 것은 기회의 평등과 계층 이동을 위한 결정적 요소다. 노동시 장 불균형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포용적 정책 이 포함돼야 한다. 이런 정책들을 주요 경제권이 동시적 으로 시행하면 그 긍정적 효과는 무역을 통해 국제적인 파급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분명 주요 20개국이 맡 아야 할 역할이다.
참조문헌
달러 기축통화 질서를 위협하는 인플레이션 위기 최명 진
‘킹달러’에 휘청대는 선진국, 잘 버티는 신흥국 곽창렬
아틀라스 뉴스 김현민 박차영
양적완화 정책은 왜 실패했나 주영재
인플레이션은 정점에 도달했을까? Bluford Pu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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