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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지표가 된 주요 사건—하락장을 이끈 사건을 통해 본 투자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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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7년 공황

 

1836년 당시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미합중국 제2 은행의 면허 갱신을 거부한 이후 미국은 중앙은행 부재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뉴욕의 화폐 공급량은 농업주기의자금 수요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금융 시스템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매년 가을 수확기에 수확물을 매입을 위해 회계 자금이 필요했고, 그 흐름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렸지만, 미국 이외의 투자자는반대로 이 금리 상승을 기다렸다가자금을 뉴욕에 보내며 이자 소득을올리고 있었다. 1906년 1월 이후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는 103 달러의최고치를 기록했으며, 그 해에도 시장이 연초에는 온화한 추이를 보이며그렇게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샌프란시스코가 엄청난 피해를 입자 시장이 폭락장세를 보이며,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이것을 되살리기 위해 과도한 자금이 뉴욕에서샌프란시스코로 흘러 들었다. 또한1906년 말에는 영국은행이 지표 금리를 인상했다. 이것은 영국의 보험회사가 미국의 보험 계약자에 많은보험금을 지불하기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대량의 돈이 유입되어 런던자본 시장의 유동성이 떨어져 영국에서 돈이 고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06년 1월이 피크였던 뉴욕증권거래소 주가는 같은 해 7월까지 18% 하락했지만, 9월말에는 하락분의 절반 정도를 회복하고 있었다.1906년 7월에 시행된 〈헵번 법〉(Hepburn Act)으로 주간 통상위원회에서 철도 운임을 결정할 권한이 부여되었고, 철도 회사의 주가는 하락했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주식시장은 하락하였고, 주식 시가 총액은 7.7% 감소했다. 3월 9일부터 26일 사이에 주가는 또한 9.8% 떨어졌다. 이 1907년 금융위기의 해결사였던 JP모건은 그해 3월 13일 매년하던 대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다음 날인 14일, 기업들의 기록적인순이익에도 주가가 폭락했다. 투자은행들이 문을 닫았고, 금리가 급등했다. 다우존스는 25% 폭락했다. 뉴욕에 있던 JP모건의 파트너들은 엄청난주가 폭락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않고 있다고 알렸다. JP모건이 재무부가 개입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뉴욕에 있는 파트너들이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만드는 것을 반대했으나 그래도 뉴욕의 금융 자본가들은 사태가더 악화될 때를 대비해 각 금융기업마다 250만 달러를 기금에 넣었다.재무부의 개입과 금융기업들의 증권시장 안정 기금의 조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시장은 재빠르게 안정되어 갔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증권시장은 계속 미끄러졌고 기업과 투자은행들의 파산이 계속되며 상업은행의 지급준비금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경제는 여름 내내 불안정한 상태로이어졌다. 시스템에 타격을 주는 충격이 연달아 일어났다. 당시 대출 담보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던 유니온 퍼시픽 철도 주식이 50% 포인트나 하락했다. 그해 6월에는 뉴욕 채권이 하락했고, 7월에는 구리 시장도 폭락해 8월에는 스탠더드오일 사에 대해 〈반독점법〉 위반으로 2900만달러 이상의 거액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1907년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에주가는 24.4%나 하락했다.1907년 봄 금융시장이 요동했다. JP모건이 모건은행에서 주도해서 만들어진 트러스트 기업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인 US스틸의 실적이 매우좋았으나 여전히 기업 실적과 무관하게 세계적인 신용경색은 쉽게 풀리지않았다.미국 샌프란시스코 시 정부는 뉴욕에서 지방채권을 발행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이집트의 증권시장은 붕괴했으며 이집트를 살리려던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이 긴급 자금 지원을 했으나 이번에는 영란은행이 현금 기근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은 증권을던지고 금으로 바꿨다. 전형적인 패닉의 상황이 되었고 그만큼 미국 재무부의 금 지급준비금은 줄어들고 있었다.1907년 여름 보스턴 시, 뉴욕 시 정부가 지방채권을 발행했으나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현금을쌓고 있었다. 유동성이 말라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뉴욕 메트로폴리탄 철도 기업과 몇몇철강제조 기업이 끝내 유동성 위기에몰려 파산했으며 한여름인 1907년 8월 10일에는 미국 증권시장이 곤두박질쳤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증권시장이 미끄려져서 300억 달러가 나갔다고 전했다.7월 27일자 미국 상업지 《더 커머셜앤 파이낸셜 크로니클》(TheCommercial & Financial Chronicle)은 당시의 시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전하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 밝은 희망이 보이나 했더니이번에는 파리에 금 유출 정보가 새롭게 전해져 모처럼 올라갔던 시황이동요되고, 가치 상승도, 희망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907년 4월과5월에 이집트에서, 5월과 6월에는 일본에서 또한 독일 함부르크와 칠레는10월 시작으로 미국 외에서도 뱅크런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잘 아는1929년 대공황 전까지만 해도 대공황으로 불릴 만큼 세계적인 금융위기였다.1907년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유나이티드 코퍼라는 구리 광산기업에 대한 찰스 모스, 오거스터스, 하인츠 등의 주식 매입작전의 실패였으나근본적인 원인은 유럽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1907년 당시 미국과 세계는금 본위제를 사용했는데, 급격한 산업과 사업의 생산성 향상이라는 성장의 속도와 견주어 볼 때 전 세계의 금생산량의 속도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통화 공급이 금 본위제 때문에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또한 마침 1907년 초에 발생한 보어 전쟁과러일 전쟁은 서구 금융시장의 현금을대거 소진했다. 서구 금융시장의 자본을 소진하게 되니 이 서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은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신흥국이어서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게되었는데 유럽 국가들이 금리를 올리니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갔다. 심지어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된 1907년의 그 때는 낙후된 금융시스템이드러나는 계절인 가을이기도 했다.많은 안좋은 사건들이 중첩되어서 일어났던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이1907년의 공황이었다. 또한 1907년그 당시에는 2만 1천개의 은행들이존재하고 있었는데, 금융시스템의 생산성이 낮고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공동 보조를 맞추기 위한 협의기구나유동성 위기 대응을 위한 공동 지급준비금 등의 위기 대응책 같은 것이없었다. 중앙은행도 없었기에 은행들에게 갑자기 많은 예금 인출, 즉 뱅크런이 일어난다면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1907년 공황의 주범이었던 신탁회사는 금융시스템에서가장 약한 고리였는데, 이 신탁회사들은 변변찮은 지급준비금으로 다양한 머니 게임을 벌였고 심지어 벤처투자에도 많은 비율의 금융자산을 배분할 수 있었다. 신탁회사 관련 법적규제가 아예 없었다. 이런 약한 금융시스템 상황에서 뱅크런이 일어난다면 도미노처럼 대량으로, 매우 쉽게파산하게 된다.

 

2.1910-11위기

 

시장자본주의를 앞세운 미국은 전통적으로 독점이 자유 경쟁을 저해한다고 보고 각종 법률을 제정해 독점을막는 데 주력해왔다. 미국에서 독점은 기업들이 남북전쟁 후 급격한 산업화로 치열해진 경쟁을 피하기 위해기업결합(트러스트) 등을 진행하면서경제·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자유 경쟁의 결과로 탄생한 거대기업이 담합같은 반경쟁적 행위를 통해 경쟁을방해하고 소비자 선택의 폭을 좁히는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독점을 막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1890년에 만들어진 ‘셔먼법’이최초의 독점 규제법이다. 1914년에는 셔먼법 집행을 보완하고 이행을강화하기 위해 클레이턴법과 연방거래위원회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독점규제법에서 가장 강력한 시정 조치는기업분할이다. 기업분할은 셔먼법 제2조(독점화 금지)와 클레이턴법 제7조(경쟁 제한적 기업결합 금지)에 따른 것인데 기업 해체나 주식·자산 매각, 자회사 등 분리 등의 방법으로 이뤄진다. 미 연방대법원은 1911년 최초로 스탠더드 오일을 정유 시장 독점을 이유로 엑슨과 모빌, 셰브런 등38개 기업으로 분할하도록 판결했다.또 같은 해 담배시장의 90%를 차지하던 아메리칸토바코를 3개 기업으로 쪼갰다. 1942년에는 미국 방송산업을 독점했던 NBC가 강제 분할됐다. 알루미늄 시장을 독점하던 알코아는 판결에 따라 1945년 분할됐는데 이는 독점규제법이 외국 기업에적용된 첫 사례다. 알코아는 프랑스,영국, 스위스, 독일 회사 등이 공동으로 세운 스위스 국적의 회사로 알루미늄 생산량과 최저가격, 미국 수입쿼터 등을 결정지어 왔다. 법원은 알코아가 셔먼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하고 기업분할을 명령했다. 1948년에는 파라마운트가 영화 배급 등에서독립극장 차별 등을 이유로 극장과영화배급사로 분할됐다. 연방대법원은 1900년대 독점기업 분할 사건 52건을 판결해 이 가운데 45개 사건에대해 분할을 명령했다. 이후 기업분할 등의 과도한 규제가 오히려 서비스 질을 낮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분할사건 심리가 줄어들었다. 하지만2000년대 들어 빅테크(거대 기술기업)가 시장을 독차지하고 신흥 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 빅테크를 규제해야 한다는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따른 첫 번째타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MS)였다. MS는 2000년 4월 1심 법원으로부터 인터넷 브라우저 끼워팔기 등으로 독점규제법을 위반했다는 판결과함께 2개 회사로 분할 명령을 받았다.이듬해 MS는 법무부와 인터넷 브라우저 끼워팔기 중단에 합의하고 항소심 법원에 공정경쟁 보장 조치를 약속해 간신히 기업분할을 피할 수 있었다.

 

3.1913-14 위기

 

비스마르크 강제 퇴임 후 유럽 외교 의 불안정으로 유럽 각국이 대외 식 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면서 정치 위 기가 경제로 옮아 붙어 주가는 약세 국면을 면치 못했다. 이에 자본가들 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기를 원했 고, 연준이 탄생한다. 4.1차 대전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부과된 과중한 배상금으로 인해 1920년 유럽 전역 을 휩쓴 인플레이션(엄청난 물질적 피해가 발생한 전쟁의 또 다른 직접 적 결과— 1919년 잠시동안 인플레 이션으로 경제 붐이 일었다)이 1923 년 독일 마르크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과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 다. 이러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기간 에 발생한 대공황(1929년에 시작됨) 의 여파로 독일 경제의 안정성이 심 각하게 악화되면서 중산층이 몰락하 고 실업자가 대량으로 양산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혼란은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켜 허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독일을 하 찮은 존재로 여기려 했던 서유럽 강 국들은 독일 민주주의 지도층을 약화 및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독일 내에서 재무장과 영역 확장을 통해 독일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 을 대두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사회적 및 경제적 격변기는 독일의 미숙한 민주주의를 크게 뒤흔들었고 바이마르 독일 공화국에서 수 많은 급진 우익파를 양산시키는 결과를 낳 았다.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 과 관련하여 특히 유념해야할 사실은 새로운 바이마르 정부의 수립을 도 운, 독일인이 간절히 원했지만 베르 사유 조약에서 처참하게 뭉개진, 평 화를 중재했던 "11월의 범죄자들"이 독일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판단이 일반 군중 중에 만연한 것이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카이저의 몰락에 박 수를 쳤고, 애초부터 의회 민주주의 개혁을 환영했고, 휴전 협정에 기뻐 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일 좌파(공통적인 생각으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및 유태인) 가 독일 땅을 밟지도 못해본 외국 군 대에 항복하고는 독일의 명예를 부끄 러운 평화와 맞바꿨다고만 기억했다. 이러한 Dolchstosslegende(등에 칼 을 꽂았다는 전설)는 1918년 독일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 실을 잘 인식하고 카이저에게 평화 협정을 맺도록 조언했던 퇴역 독일 군부 지도자들이 꾸며내었고 그들에 의해 과장 되어졌다. 이로 인해 걸음 마 단계의 독일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이 헌신한 것으로 여겨 지던 독일 사회주의자 및 자유주의자 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되었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와 노벨 상 수상자 토마스 만과 같은 Vernunftsrepublikaner("이유있는 공 화주의자")들은 민주주의 개혁을 처 음에는 저항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서 이들은 최악 중 가장 나은 선택으 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원할 수 밖 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동포들 을 급진적인 좌익과 우익으로 편향되 지 않도록 인도하려고 했다. 독일 국 수주의자 우익이 만약 필요하다면 베 르사유 조약을 힘으로라도 개정하겠 다는 약속은 소속 당에서 점점 더 많 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러시아에 볼세비키 혁명이 발생하고 헝가리(벨라 쿤)와 독일 자체(스파르 타쿠스들의 폭동)에서 단기적인 공산 주의자 혁명 또는 쿠데타가 발생함에 따라 공산주의의 위협이 임박했다는 망령이 살아나면서 독일의 정치 분위 기가 완전히 우익 진영으로 기울게 되었다. 좌익 선동자들은 정치적 불안을 조성 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받고 감금되어 있었다. 반면, 바바라 정부 를 퇴진시키고 1923년 11월 맥주 홀 폭동에서 "국가 혁명"을 도모하려고 시도했던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급진 우익 운동원들은 사형죄인 반역 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 지만 단 9개월만 복역했다. 히틀러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성 명서인 Mein Kampf(나의 투쟁)를 저 술했다. 제1차 세계전쟁으로 인한 사 회적 및 경제적 불안으로 야기된 생 활고와 이행하기 힘든 평화 조약, 그 리고 독일 중산층에 퍼져있던 공산주 의에 대한 정치적 불안 등은 다원 민 주주의적 해결을 시도해 보려던 바이 마르 독일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대중은 권위주의적인 지도력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고, 불행히도 결국 독 일 유권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 사회당에서 이런 지도력을 발견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부터 시작해서 동유럽의 우익 독재주의 및 전체주의 시스템에도 유 리하게 작용했는데, 궁극적으로 폭력 적 반유태주의와 전국 소수민족에 대 한 차별에 대한 허용 및 묵인 수준을 높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발생한 파괴와 끔찍한 인명 손실로 인해 기존의 많은 참전국에서 문화적 포기라고 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국 제 및 국내 정치에 대한 환멸과 정치 지도자 및 정부 관료에 대한 불신감 이 끔찍한 4년 전쟁의 폐허를 목격한 대중의 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대부 분의 유럽 국가는 사실상 젊은 청년 세대를 잃어버렸다. 독일 작가 에른 스트 윙거와 같이 1920년 그의 작품 강철 폭풍(Stahlgewittern)에서 전쟁 의 폭력과 갈등을 국가적 맥락에서 미화한 작가가 있는 반면, 에리히 마 리아 레마르크의 1929년 명작인 서 부 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에서는 참호전의 실상을 사실 적으로 묘사했는데 최전선 부대의 모 습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전쟁에서 돌 아왔지만 평화로운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후방의 사람들로부터 오해 를 받는 "방황하는 세대"의 소외된 모 습을 묘사했다. 일부 집단에서는 정치와 분쟁에 대한 무관심과 환멸로 반전주의적 분위기 가 무르익었다. 미국에서는 여론이 고립주의로 돌아섰다. 이러한 민심은 미국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윌슨 대통령 자신이 제시한 국제 연맹에 미국이 회원국으로 가입 못하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다. 독일 세대의 경우, 이러한 사회적 소외와 정치적 환멸은 독일 작가 한스 팔라 다의 Little Man, What Now?(보잘것 없는 사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까?)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경제 위기 및 실업의 혼란에 빠져 있 고 급진적인 좌익과 우익의 선전에 모두 쉽게 현혹되는 "평범한 독일 시 민"의 이야기이다. 팔라다의 1932년 소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독일을 정 확히 묘사했는데, 이 당시 독일은 경 제적 및 사회적 불안에 빠져 있고 정 치 판도도 양극화로 이루어지고 있었 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의 대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에 근간을 두고 있었는데 독일이 선택한 길은 앞으로 다가올 수 년간 더욱 파괴적 인 전쟁으로 가고 있었다.

 

5.1920년대

 

개관 :1920년대는 호황에서 버블붕 괴까지 "포효하는 20년대"였다. 20년 대는 불경기(스페인 독감)로 시작되 었지만, 주식 수익률이 채권 수익률 을 크게 웃돌면서 시장은 마이너스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 동안 부채의 가속화로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에 주식 투자 증대와 더불어 빠른 플러스 성장이 있었다. 10년의 막바지에 시장은 빠 른 성장 속도를 고려하지 않았고, 10 년의 마지막 해인 1929년에 터진 고 전적 버블(즉, 부채로 주식과 다른 투 자 자산을 높은 값에 구매)로 붕괴되 었다. 1923-24년은 부동산 투기로 돈이 몰 리는 바람에 주식은 활황에 실패한 다. 그림 10 주류 경제학과 좌파 학자들 심지어 일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대공황을 마르크스 의 기본 이론에 기초할 때 논리적으 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이 윤율 저하 경향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축 적(투자)은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 력의 확대보다 더 빠르게 진행된다. 따라서 투자 대비 잉여가치, 즉 이윤 율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착 취율을 높이거나 생산 기술을 고도화 해서 일시적으로 이윤율 하락 경향을 억제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공황 자체 가 기업 설비의 가치를 대폭 하락시 키고 대규모 실업을 발생시켜 임금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이윤율을 회복시 키기도 한다. 조셉 질먼, 셰인 메이지, 루이스 코리 등은 미국의 이윤율을 추계한 결과 하나같이 1880~1920년대에 이윤율 이 장기적으로 약 40퍼센트 하락했 음을 보여 줬다. 그 원인은 앞서 설명 했듯이, 노동력 대비 투자의 비율, 즉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의 상승이었다. 1922년부터 1929년 초까지 실질 임금은 고작 6.1퍼센트, 소비는 18퍼센트 상승했지만, 공업 생산량은 3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이런 불균형은 대공황 직전에는 절정 에 이르렀는데, 산출량이 소비보다 세 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려면 이처럼 커져가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그런데 앨빈 핸 슨이나 R J 고든의 연구 결과를 보면, 생산적 투자가 이 간극을 결코 메우 지 못했다. 투자처를 찾지 못한 유휴 자본이 1920년대 후반의 거품 형성 을 더욱 조장했다. 앞서 말한 플로리 다 주택 붐이나 폰지 사기 외에도 라 디오 수신기 산업도 거품의 한 예다. 이 신생 산업이 엄청난 이윤을 약속 하는 듯이 보이며 돈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투기 같은 거품은 부를 이전 시킬 뿐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은 줄이지 못했다. 1925년부터 주택 경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으 로 갈수록 신규 투자로 더 많이 생산 된 자동차와 라디오의 판매가 정체하 다가 감소했고, 이는 다시 전력량과 철강 산업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생 산재 산출량은 1929년 한 해에만 25 퍼센트 하락했고, 그 다음 해에는 25 퍼센트 더 줄어들었다. 실물경기 하 강에 자본가들은 비생산적 지출을 줄 였고, 그 결과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 고 부동산 대출을 많이 해 준 은행이 파산하게 됐다. 크리스 하먼은 미국의 위기가 형성되 고 폭발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 사했다. “비생산적 지출과 투기로 생 산적 투자 부족분을 메우고 민간 대 출로 소비를 지탱하는 것에 의존한 대규모 호황. 그런 호황 뒤에 찾아온 침체는 그만큼 골이 깊을 수밖에 없 었다. 게다가 침체에 빠진 나라가 세 계 최대 공업국이었던 만큼 그 파장 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6.1930년대

 

개관: 1930년대는 불황의 시대였다. 이 10년은 대부분 1920년대와는 반 대였다. 이 시대는 높은 수준의 부채 에 폭발적으로 반응하면서, 시장은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외면하며 시작했다. 부채 위기와 경제 활동의 멈춤은 경기 침체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연준에 의해 공격적 양적 완화 로 이어졌는데, 이와 같은 연준의 행 보는 금과 연동을 깨고, 금리는 0%로 많은 돈을 찍어 내서 달러가 평가 절 하되었다. 이와 같은 달러가치의 하 락은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금값, 주가, 상품 가격의 상승을 야기했다. 통화정책이 자산가격의 상승을 야기 했고 보상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 에, 부의 격차는 더 벌어졌고, 사회주 의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갈등이 일 어났고,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민족 주의가 부상했다. 1937년에 연준의 통화 정책과 연방정부의 재정정책은 다소 긴축되었고 주식시장과 경기는 급락했다.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 일 본의 신흥 추축국들과 영국, 프랑스, 중국의 기성 연합국들 사이의 지정학 적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1939년 유 럽에서 전면전으로 이어졌고, 1941 년 미국은 아시아에서 전쟁을 시작했 다. 전체 10년 동안, 주식 실적은 안 좋았고, 채무 위기는 일찍 발생했다. 이는 주로 채무 불이행, 보증, 많은 재 정 진작과 함께 부채의 유동화를 통 해 처리되었다. 그림 11 그림 12 그림 13 1937-38년은 뉴딜정책의 반작용으 로 더블딥에 빠진다. 케인즈 경제학 자들은 1937년의 경기 침체는 정부 지출을 억제하고 예산 균형을 맞추려 는 시기상조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 다. 루즈 벨트는 큰 적자를 뛰지 않도 록 조심 해왔다. 1937년 그는 실제로 균형 잡힌 예산을 달성했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9세기 문명의 기초를 이루던 세력 균형, 금본위제, 자유주의적 국가 등 의 제도들”은 자기조정적 시장이라 는 동일한 원천에서 비롯됐는데, 이 런 자기조정적 시장이 확립하려던 경 제적 자유주의 노력이 1930년대 초 파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폴라니 는 이런 ‘거대한 전환’을 이룬 이정표 가 되는 사건들로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러시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뉴딜의 출범, 독일에서 나치즘의 국 가 사회주의 혁명, 국제연맹이 무너 지고 대신 폐쇄형 제국들이 나타난 것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폴라니는 뉴딜정책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보는 혼란을 드러냈다. 다른 한편, 쉬벨부시는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 러의 나치즘을 하나로 묶어 정치경제 적 위기에 대한 비슷한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뉴딜정책과 나치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슷한 목표와 수단을 동원했다고 지 적했다. 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했다. 뉴딜정책이 민간기업들의 심기를 건 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부의 재 정지출을 추진한 것이라면, 스탈린과 히틀러 등은 국가를 통해 민간기업을 통제하고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재편함 으로써 1930년대의 대불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베리 아이 켄그린은 1930년대의 대불황에서 벗 어나게 한 공헌은 뉴딜의 루스벨트가 아니라 히틀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하워드 진은 뉴딜정 책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좌파적이 라고 하는 것에서 파시즘적이라고 하 는 것까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진은 루스벨트 행정 부가 전체적인 계획이 없이 사태에 대응해 실험과 개선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적이라고 평가했다. 1930년대 대불황과 뉴딜정책은 몇 가지 점에서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뉴딜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를 대불황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뉴딜정책이 약간 효과를 보는 듯하다가 1937∼1938년 의 심각한 더블딥에 빠졌다. 미국 자 본주의가 1929년 이전 수준을 회복 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에 본격적으 로 뛰어들었던 1941년 이후였다. 반 면 소련과 독일 그리고 일본은 국내 산업 생산을 전쟁 준비를 위해 재편 함으로써 1930년대 대불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 나 그의 뉴딜을 지지했던 케인스 모 두 민간기업들을 강력하게 통제할 정 도로 경제에 개입하지 못했고, 따라 서 경제 개입의 효과도 미적지근했 다. 둘째, 1930년대의 대불황은 국가자 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계기가 됐다. 대불황의 여파로 당시의 경제 입안자들은 전에 믿고 있던 고전파 정설을 버리고 뉴딜정책이라는 이름 으로 국가의 경제 개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경제 개입이 커지면서 정부 부문의 중요성이 새롭 게 인식됐고, 연준이 실질적으로 중 앙은행 구실을 하게 됐다. 또한 위기 에 직면해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무능 력이 드러나면서 연방정부의 구실이 경제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증가했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는 미국 자본주의에서 연방정부의 강화 로 나타난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이 것은 GDP에서 연방정부의 예산이 차 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1930년대 대불황 이전에는 정부 예 산이 GDP의 5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의 뉴딜정 책이 추진되는 동안에는 정부 예산이 GDP의 10퍼센트에 이르렀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로는 20퍼센트를 넘나들게 됐다. 미국의 국내총생산에서 연방정부 지 출이 차지하는 비중(퍼센트) 그림 14 셋째, 1930년대 대불황이 오늘날 우 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1930년대 대불황이 미국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위기였다는 점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1930년대 대불황을 순조로운 역사 발전에서 나타난 하나의 일탈로 보지 만,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상으로 인식 한다. 1930년대 대불황은 케인스주 의적 뉴딜정책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 경제는 전쟁에 돌입한 1941년 이후에야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회복했고, 국내총생산도 대불황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 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는 자체적인 원인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 국 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제적·군사적 경쟁을 벌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로 초래된 이번 위기와 관 련하여 1930년대 대불황이 주는 교 훈은 분명하다. 미국 자본주의가 제1 차세계대전을 거친 뒤로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고 1920년대에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지만 그 번영 이 바로 1930년대 대불황의 원인이 됐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시작된 세 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두 차례 의 전쟁과 한 차례의 심각한 공황, 러 시아 혁명 같은 격변을 수반했다. 오 늘날 우리는 2008년의 위기에서 완 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 위기로 인해 1930년 대 대불황 이래 최악의 위기를 경험 하고 있다. 1930년대의 역사적 경험 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위기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격변으로 이 어질 수 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7.1940년대

 

개관: 1940년대는 세계대전과 전후 시대였다. 1939년 2차 대전이 시작되 면서 미국 주가도 하락세로 돌아섰 다. 이 추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후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대전에 참여하 면서 상승세를 유지한다. 경제와 시 장은 고전적으로 전쟁이 주도하였다. 각 나라의 정부는 많은 돈을 빌리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찍어내면서, 전 쟁을 지원하는 민간 고용 부문과 군 수 고용 모두를 자극했다. 생산은 많 았지만, 생산된 대부분은 전쟁으로 사용되고 파괴되었다. 그래서 경제 성장과 실업의 고전적인 척도는 오해 의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통에 생산된 산물은 미국을 대공황 이후의 슬럼프에서 구해냈다. 통화 정책은 전쟁후, 부채의 차입과 상환을 받아들이기 아주 쉽게 유지되 었다. 구체적으로, 통화 정책은 금리 억제로 양적 완화 기조가 유지되었 고, 재정 정책은 전쟁 중 자유롭게 예 산 적자를 발생시키며, 전후 해외 재 건 ( 마셜 플랜 )을 증진시켰다. 결과 적으로, 그 시기에 주식, 채권, 상품 가격은 모두 상승했다. 전쟁 초기에 상품가격이 가장 많이 오르고, 전쟁 후반에 주식들이 가장 많이 올랐고 (연합군의 승리가 더 유력해 보였을 때)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 채권가격 이 상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은 우세한 강대국이었고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와 연동되었고, 달러는 금본위 세계 기축통화로 되었다 (1944). 이 기간은 막대한 재정 적자 로 중앙은행의 금리를 낮출 수 있는 힘과 메커니즘을 예시하기에 좋은 시 기였고, 전쟁 기간 동안의 시장 행보 를 이해하기 좋은 시기였다. 1946년 유럽발 정치위기로 인해 주 가는 보합세를 유지했고, 1949년 마 셜플랜이 진행되면서 상승세를 회복 한다. 한편, 미국의 국무부 정책 기획 본부장으로 발탁된 조지 케넌의 조언 에 따라 소련의 봉쇄가 외교 정책이 되었다. 케넌은 소련의 권력 붕괴가 일어날 때까지 ‘전면 불변의 반격 능 력’을 사용하여 ‘봉쇄’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 정책은 1947년 3월 미국 의회에서 트루먼 독트린 연설에서 표 명되었고, 미국은 공산주의 ‘봉쇄’를 위해 40억 달러를 내놓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그리스와 터키, 이 란에서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식 되면서 그 중 그리스에서 내전(1946 년 -1949년)이 벌어지는 동안의 일이 었다. 트루먼은 만약 그리스와 터키 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지 못하면,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지 할 것이고, 그 결과는 도미노 효과로 지 역 일대를 공산주의자에 빼앗기게 된 다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자신의 당 인 민주당 다수의 지지를 얻었을 뿐 만 아니라 의회 여당인 공화당의 지 지도 얻었다. 공화당 상원 의원 아서 반덴버그가 공화당의 국제파 의원을 이끌고 로버트 태프트 등 고립주의파 의 반대를 설득했다. 트루먼은 1947 년 5월 트루먼 독트린에 서명하여 입 법하고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로 4억 달러를 승인했다. 1946년 슈투트가르트 연설 이후 미 국은 독일의 점령 정책에 영향을 준 모겐소 플랜에서 느긋함을 떠나 재건 정책의 방향으로 진행했다. 유럽의 퇴색한 경제와 정치 정세를 본 미국 은 1947년 중반에 우선 서유럽에서 이어 일본(남한과 대만 포함)에서 경 제 재건을 시작했고, 1949년에는 서 독도 포함했다. 이 마샬 플랜은 서유 럽에 120억 달러를 할당했다. 스탈린 은 마셜플랜이 소련의 위성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독일에서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 깊숙이 있는 베 를린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군 사적 충돌이 다가오는 가운데, 트루 먼은 소련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부양책을 취했다. 즉 소련 점령 지역 을 넘어 베를린에 큰 공수 작전을 시 작한 것이며, 이것은 1948년부터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8.1950년대

 

개관: 1950년대는 전후 복구시대였 다. 20년간의 불황과 전쟁 후, 1950년 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정적으로 보 수적이었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안전을 선호했다. 매우 높은 위험 프 리미엄을 가진 주식의 마이너스 수익 마진으로 실질적 가격을 책정(예: 1950년 S&P 500 배당 수익률는 6.8% 로 10년 만기 채권 수익률 1.9%의 3 배가 넘었고 수익률도 14%에 육박했 다)하였고 시장은 이를 반영했다. 전 후 경기는 부분적으로 지속적인 경기 부양 정책, 즉 저금리를 통해 (10년 동안 4%의 실질 성장률) 빨리 회복되 었다. 그 결과, 주식은 활황이었다. 정 부가 큰 적자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 부채부담은(소득 백분율로 본 정부 부채 )은 감소했지만, 민간 부채 수준이 소득 성장과 나란히 가는 바 람에 부채 증가도 소득 증가와 동행 했다. 상대적으로 완만한 성장과 낮 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물가와 함께 50년대는 재정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끝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또 한 중산층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했고 번영했던 시기였다. 1953년 비교적 짧고 가벼운 이 경제 불황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의 불황 과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국방비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고 그에 따라 전쟁이 지속되던 3년간 군수 산업을 필두로 한 미국 산업은 크게 성장한다. 그러 나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성장 동력 을 잃게 되어 산업 구조가 재편되었 으며 이 기간 동안 GDP는 2.2% 하락 하였고 실업률은 6%를 기록하였다. 재무부는 국채 만기를 연장하고 유연 한 금리 정책을 추구했다. 이러한 정 책과 함께 재무부는 이자율을 더 높 이고 이후 낮은 이율의 채권을 발행 하는 부채 상환을 시작했다. 연방 준 비 은행은 금리 인상을 인식하고 더 많은 준비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결 정했다. 이것은 효과가 있었지만 이 자율은 미국을 수요 주도의 생산 및 고용 침체로 몰아 넣었다. GDP는 정 부 지출과 투자로 인해 감소했다. 1953 년의 불황은 수요에 의해 주도 되었다. 그해 초 금리의 극적인 변화 로 인해 경제에 대한 비관론이 증가 하여 총수요가 감소했다. 연방 준비 은행이 준비금의 가용성을 높이기 전 에 금리 인상을 계속했다. 연방 준비 은행의 행동은 불가피한 경기 침체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를 증가시켜 총수 요를 더욱 감소시키고 저축을 증가 시켰다. 얼마 안있어 주가는 반등했 다. 1957년 홍콩에서 시작된 독감 바이 러스는 인도를 지나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이 아시아 독감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 질병으로 인 해 미국의 수출은 40억 달러 이상 위 축되었고 세계적인 경제 침체로 이어 졌다. 이 기간 동안 미국 GDP는 3.3% 감소하였으며 실업률은 6%를 넘겼 다.

 

9.1960년대

 

개관: 1960년대는 호황에서 통화 붕 괴로 이어진 시대였다. 10년 전반부 의 레버리지 호황은 하반기에 국제수 지 문제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브레 튼우즈 통화체제를 종식시키는 큰 패 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졌다. 전반기에, 시장은 느린 성장을 애서 무시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빠 른 성장으로 회복하며, 주식은 1966 년까지 호황이었다. 그리고 나서 대 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15년간 주식 시장의 큰 수익을 되돌아보았고 여전 히 지금도 강세장이었다. 하지만, 부 채 속도와 경기성장이 너무 급했고 인플레이션은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 에, 연준의 통화 정책은 긴축되었다 (예: 수익률 곡선이 1929년이래로 처 음으로 반전되었다). 그야말로 20년 동안 깨지지 않은 주식 시장의 실제 (즉, 인플레이션 조정) 정점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 후반, 부채는 소득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인플레이션은 "성 장 둔화"와 더불어 상승하기 시작했 고, 이어서 진짜 경기 침체가 60년대 말에 왔다. 그 즈음, 금 보유고가 유출 되면서, 미국의 국제수지 문제는 더 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두 가지 나쁜 대안 중 하나 를 선택해야 했다. 즉, a) 너무 긴축적 인 통화정책은 경제를 너무 약하게 만들거나, b) 달러 가치를 높이고 인 플레이션을 낮추기에는 너무 많은 국 내 자극이 필요하였다. 이는 통화 시 스템을 포기하고 1970년대 스태그플 레이션을 맞이하는, 패러다임의 큰 변화로 이어졌으며, 그 변화는 1960 년대와 정 반대로 많이 달라졌다. 여기서 브레튼우즈 체제를 잠간 짚고 넘어가자. 1947년 당시만 해도 미국 이 전 세계의 금의 70%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 국의 금 보유량이 계속 감소하기 시 작한다. 실제로 미국은 1957년 228억 달러 수준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지 만, 1960년에는 무려 50억 달러가 감 소한 178억 달러 수준에 그쳤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걸까? 그 이유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증가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 서 미국은 유럽과 동아시아, 남미 등 지에서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재정지 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미 국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나라들이 고속 성장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국가가 서독과 일본입니다. 특히 이 국가들은 미국을 대상으로 꾸준히 수 출을 늘렸고, 그 결과 미국의 화폐 가 치는 하락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달 러화 가치 하락은 금태환의 가속화를 불렀고, 미국의 금 보유량은 계속 줄 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우려 를 표한 사람이 예일대학교의 로버트 트리핀 교수였다. 그는 미국이 대외 무역에서 적자를 보면 볼수록(경상수 지 적자),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타 국가들은 달러를 보유하기보다 안전 하게 금을 보유하려는 심리가 높아질 것이라 했다. 이를 해결하려면 방법 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미국이 경상 수지 흑자 국가가 되는 것이다. 문제 는 이렇게 되면 미국의 물건을 서독 과 독일 등 전쟁에서 회복하고 있는 국가들이 많이 사주어야 하는 상황인 데, 이는 해당 국가들의 경상수지 적 자를 발생시키고 전 세계적 침체를 초래한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미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경상수지 적자를 감 내하는 방법 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미국에서 경상수지 흑자를 본 나라들 이 그 돈을 자기 나라에 투자하는 것 이 아니라, 미국에 재투자하는 것이 다. 그러면 당연히 재투자를 받은 미 국의 경기는 회복될 것이고, 미국의 달러 가치는 상승한다. 당연히 다른 나라들은 금을 보유하는 것만큼이나, 달러화를 보유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낄 것이고, 브렌트우즈체제는 존속 될 수 있다. 문제는 미국에 대해 재투 자가 일어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미 국에 대한 자본투자가 계속되면 미국 달러화는 상승할 것인데 그렇다면 미 국의 수출경쟁력이 또 취약해지는 문 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또 미국의 경 상수지 적자가 증가하게 되고, 다시 달러화 환율이 낮아지는 문제가 발생 한다. 결국 미국 입장에서는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두고 트리핀 교수는 '트리핀 딜레 마'라고 불렀다. 때문에 트리핀 교수 는 차라리 브렌트우즈 체제를 하기보 다 전 세계적인 통화를 하나 만들어 서 거래에 활용하면 어떨지 제안했 다. 사실 이 제안은 브렌트우즈 체제 가 논의되던 1947년에 이미 나온 내 용으로 당시 브렌트우즈 체제를 제안 했던 미국에 맞서 영국의 케인즈는 세계화폐인 방코르를 쓰는 방안을 제 안한 바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초 강대국인 미국의 입김에 케인즈의 주 장은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특 히 앞에서 미국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재정지원을 열심히 했다고 했는 데 이로 인해 발생한 재정적자는 미 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더불어 달러 환율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즉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환경 이 계속된 것이다. 결국 전 세계 최대 금 보유국이었던 미국은 브렌트우즈 체제의 존속을 위해 다른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1960년대 들 어 유럽과 일본의 금 보유량은 미국 을 뛰어넘었고, 미국 달러 가치가 하 락하면서 과연 달러를 금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금태환에 대한 회의 와 의심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에 맞춰 금 투기꾼들도 기승을 부 리기 시작한다. 달러화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보 다 금을 가지고 있는 게 낫다는 생각 을 하는 투자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 고, 금을 사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미국도 혼자서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다 른 나라들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 기로 한다. 즉 국제통화기금(IMF)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나선 것 이다. Rolling Recession은 경제 후퇴를 지 칭하는 말인데, 특정 산업 분야 (Sector)에 침체가 집중될 때 쓰는 말 이다. 타격을 받은 그 산업 분야가 회 복기에 접어들면 연쇄적으로 침체의 영향이 다른 산업 분야로 전가(Roll) 되며 연쇄 구조적인 경기 침체로 이 어진다. 다만 이 경제 후퇴는 특정 산 업, 지역에 집중되는 비교적 약한 후 퇴로 인식되고 있다. 1960년 4월부터 61년 2월까지 두 가지 이유에서 경제 후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째로 소비 트렌드의 변화이다. 특 별히 자동차 산업 분야의 변화가 두 드러진다. 소비자들은 미국 내 생산 된 자동차에서 해외 수입 자동차를 선호하는 현상이 생겼고 이로 인해 자동차 업체들은 재고를 줄이며 소비 자 취향에 대응하느라 단기 이익이 감소하였다. 두 번째로 경기 후퇴 국 면에 금리가 인상되었다. 당시 물가 가 통제 가능한 범위였음에도 불구하 고 미 연방준비위원회는 인플레이션 우려로 금리를 인상하였으며 이는 소 비 활동 및 기업 활동에 악영향을 미 쳤다. 그에 따라 생산성 저하는 가속 화되었고 GDP가 감소하고 실업률이 증가하는 침체 국면으로 이어졌다. 1961년 12월부터 1962년 6월까지 약 6개월 동안 S&P 500 지수는 22.5%까 지 하락한다. 그 당시 재임 대통령은 존 F. 케네디(JFK, John. F. Kennedy)였 다. 1961년 JFK가 취임했을 때 미국 은 경기 후퇴를 극복하고 있었고 산 업 성장 국면이었다. 그는 취임 이후 미국이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강하게 말했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한듯 얼 마지 않아 주가가 폭락하였다. 그래 서 사람들은 이 때의 폭락장을 케네 디 슬라이드라고 불렀다. "왜 폭락이 발생했는가?"에 대해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 책임자인 에드윈 포스너 (Edwin Posner)는 주가 하락이 지난 10년간의 경제 성장에 따른 조정이 라고 말했다. 이후 미 증권 거래 위원 회가 특별 조사단(SEC,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을 꾸려 조사 했지만 불법 행위 등은 발견되지 않 았으며 "합리적이고 심리적인 동기 와 다양한 하락에 대한 압박, 인과관 계에 의한 복잡한 상호 작용"에 의해 주식 장이 하락했다고 결론지었다. 쉽게 말해, 왜 폭락했는지 모른다는 것니다. 1966년 8월 29일부터 약 7개월동안 증시 장은 꾸준히 감소하여 -22%까 지 하락한다. 단기간에 하락했던 직 전 케네디 슬라이드에 비하면 꽤 긴 기간동안 꾸준한 하락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하락장은 1950년 이래 가 장 작은 베어 마켓으로 "베이비 베 어"라는 별칭을 얻었다. 대부분 베어 마켓은 전고점을 회복하는 시간이 하 락 시간의 2배 정도 걸리지만 베이비 베어 마켓은 평소 보다 1.2배 빠르게 전고점을 회복한다. 경제 위기가 수 반되지 않은 하락장(베어 마켓)들은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기가 어렵다. 어떠한 설명을 하더라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설명 뿐이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이 기간 의 중앙 및 시중 은행의 금리 인상과 긴축 정책으로 인한 산업체 수익성 하락을 원인으로 꼽는다. 1966년 3월 타임지에서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 린다. "주가가 하락하는 것은 베트남 전에 대한 투자자들의 (어쩌면 과잉 반응일지도 모르는) 우려때문이다. (전쟁의 여파로) 투자자들은 세금이 오르는 것과 중앙 정부의 금융 통제 를 두려워하고 신용이 위축되며 수익 마진이 줄어드는 것에 당혹스러워하 고 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보 건데 당시 국제 정세 상에는 많은 변 칙들이 있었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 로 작용하여 조정장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0.1970년대

 

개관: 1970년대는 저성장과 고인플 레이션(즉, 스태그플레이션) 시대였 다. 70년 초에, 높은 부채 수준, 국제 수지 문제, 그리고 1971년에 폐기된 금본위제로 세계 각국은 불만이 팽배 해 있었다. 그 결과 화폐를 금으로 바 꾸겠다는 약속은 깨졌고, 화폐는 자 유롭게 찍어내 부채 부담을 완화하였 다. 달러는 외부 적자를 줄이기 위해 평가절하되었고, 성장은 느렸으며,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되었고, 인플레 이션을 대비한 자산 투자는 훌륭했지 만 주식과 채권은 재미를 못보았다. 인플레이션, 인플레이션 기대치, 이 자율에서 두 개의 큰 파도가 몰려왔 다. 첫번째는 1970년부터 1973년까 지, 두번째는 더 큰 규모로 1977년부 터 1980-1981에 경기를 악화시켰다. 70년대 말에, 시장은 매우 높은 인플 레이션과 낮은 성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60년대 말에 등안시했던 상황 과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폴 볼커 는 1979년 8월에 임명되었으며, 이 선택이 1970년대와 거의 정반대로 정책을 펼 1980년대의 발판이 되었 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이 있다. 70년대 초 미국의 실물 경제는 금융 경제에 비해 이윤이 남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즉 이자 놀이를 하 는것이 물건 팔아 벌어들이는 일보다 더 이윤이 남는다는 얘기다. 실 예로 1971년 미국은 근 80년만에 무역 적 자를 기록한다. 그 이후 독일과 일본 은 플라자 합의로 어느 정도 미국 체 면을 살렸 주었지만, 현재 실물 경제 의 주도권은 중국이 잡고 있다. 유념 해야 할 일은 중국이 금융 경제까지 미국을 넘보면 헤게모니 싸움이 일어 날 것이란 점이다. 지금이 그 위기다. 하나 더, 1971년 당시 연준 의장은 닉 슨 대통령의 재선을 돕기위해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올리지 않았다. 현재 바이든 대통령이 재임하는데 스테그 플레이션 우려 속 금리가 어떻게 영 향을 미칠지는 두고 봐야할 문제다. 한편, 1969년 말 물가 상승률은 5%를 웃돌기 시작합니다. 이 기간 미 연방 준비위원회(연준)는 금리를 빠르게 인상했고 그로 인해 소비가 위축되며 기업 활동이 억제되었습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도 다가올 스 테그 플레이션(Stagflation)은 예상하 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60년대 미국 산업의 호황기와 더불어 과열된 경제 를 식히는 과정으로 이해 된다. 따라 서 GDP 감소율은 크지 않았고 실업 률 또한 5% 정도로 통제 가능한 수준 이었다. 따라서 경기 후퇴가 발생한 이후, 연준이 금리를 인하하자 경제 는 금세 회복되었다(1970년 말). 1973년 11월-1975년 3월의 경제 위 기는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미국이 겪는 혹독한 경제 불황이었다. 16개 월이라는 긴 기간도 힘들었지만 중동 석유 수출 기국(OPEC)의 담합으로 석 유 가격이 치솟자 그에 따라 물가도 치솟게 된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 다. GDP는 성장했지만 높은 물가가 성장 GDP를 다 깎아 내리면서 실질 GDP는 역으로 성장했고 주가는 곤두 박질 쳤다. 미국은 보호 무역 주의를 통해 물가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고 임금을 동결하고 금리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인상하는 정책을 폈지만 물 가를 잡지 못했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이 기간이 바로 불경기 를 뜻하는 스테그네이션Stagnation 과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 Inflation의 합성인 스테그플레이션 Stagflation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GDP는 3.3% 이상 감소하였고 실업 률은 8.8%로 대공황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다. 이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연준은 금리 인하 정책을 폅니다. 인 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금리를 인 상했으나 석유 파동이라는 외부 요인 에 의해 물가가 좀처럼 안정되지 않 았고 고용과 경제가 후퇴하는 역효과 가 발생하자 금리를 인하한 것입니 다. 이 당시에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 임은 분명하다. 금융 정책은 금리를 통해 시장 경제를 통제한다. 금리를 인하함으로 인해 시중에는 돈이 많이 풀리게 되었고 일시적으로는 경제 지 표들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 로는 80년대 초 제 2차 석유 파동으 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격"으로 물가가 치 솟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1.1980년대

 

개관: 1980년대는 고성장과 떨어지 는 인플레이션, 즉 디스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 그 10년은 높은 인플레이 션과 느린 성장을 평가절하하면서 시 작되었지만, 인플레이션 하락과 빠른 성장이 돋보인다. 그래서 인플레이션 을 대비한 자산 투자는 실패했고 주 식과 채권 투자는 성공했다. 패러다 임의 변화는 80년대 초에 발생했다. 그때, 폴 볼커가 부과한 긴축 재정 조 건은 디플레이션 압력, 큰 경기 위축, 부채 위기를 촉발시켰다. 부채 위기 로 인해 신흥시장은 미국 은행에 채 무 상환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 황은 잘 관리되었고, 은행들에 적절 한 유동성이 제공되었고 부채는 은행 융자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손 상되는 방식으로 대차대조표에 기록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달러 의 부족과 달러가치의 상승을 이끄는 자본의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이윽 고, 성장이 강하면서 금리가 하락할 수 있도록 하는 인플레이션 억제 압 력을 만들어 내었다. 이로서, 주식과 채권 가격은 급상승하였다. 결과적으 로, 이 시기는 디스인플레이션 성장 과 주식과 채권에 대한 높은 투자 수 익을 일굴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기였 다. 1979년 중동은 극단적으로 석유 공 급을 중단했습니다. 당시 이란은 이 슬람 혁명을 일으키며 아예 석유 공 급을 중단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세계에서 석유 수요는 증가하였고 물 가는 유례없는 수준으로 치솟는다. 이 당시(1980.1.~1980.7.)인플레이션 은 13%를 웃돌았고 미국 연준은 빠 른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였다. 국제 적인 정세에 따라 매우 급박하고 짧 은 시간 내에 발생한 사건임에도 GDP는 1%넘게 감소했고 실업률은 8%에 육박하였다. 1981.7.~1982.11.까지 더블 딥 경기 침체기간이다. 경제가 불황을 벗어나 단기간 성장을 기록한 뒤, 얼마 지나 지 않아 다시 불황에 빠졌다. 이 시기 에는 3차 석유 파동이 있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끝이 났지만 석유 공 급에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물가는 여전히 높았다. 지속적인 물가 상승 으로 인해 연준은 사상 가장 큰 폭으 로 금리를 인상한다. 이 당시의 기준 금리는 19%를 넘었다. 이 기간, 생산 의 증가로 전체 공급이 늘어나며 경 제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침체 되어 있는 소비 심리와 가계 경제 활 력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가 다시 하 락하였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빚을 부담하며 경제 확장 정책을 펴는데, 이것이 성공적인 회복을 이끌어내었 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오히려 늘어난 지출에 따른 재정 적자로 경기를 더 욱 끌어내리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 러나 지속적인 정부 지출과 세금 감 면, 막대한 국방비 지출 등으로 미국 내수 경제는 17개월의 장기 침체를 극복하고 회복하였다. 검은 월요일은 1987년 10월 19일 뉴 욕 월 스트리트에서 하루 만에 주가 가 22.6%나 빠진 사건을 말한다. 천 만원을 투자했다면 2백만원이, 1억원 을 투자했다면 2천만원이, 10억을 투 자했다면 2억원이 하루 아침에 증발 해버린 것이다. 이 수치는 1929년 경 제 대공황을 촉발한 하락폭을 넘어서 는 수치이다. 많은 사람들은 대공황 의 악몽이 재현될까 두려워했다. 이 날 폭락의 명확한 원인규명은 초기부 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와 회계 검사원 등이 대폭락의 원인 규명에 매달렸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 데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사후적으로 규 명해본 폭락의 원인은 ‘포트폴리오 보험’이었다. ‘포트폴리오 보험’이란 주가가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기관투 자가들이 미리 주식 선물을 매도해 놓고, 주가하락의 직접 손실을 선물 매도로 메우는 투자방식을 말한다. 전반적인 주가하락이 시작되자 그 속 도를 이 같은 포트폴리오 보험이 가 속 시켰다. 투자자들이 붕괴되는 시 장에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선물을 팔았지만 현물 주식가격도 같이 떨어 졌다. 이는 포트폴리오 보험자가 더 욱 많은 선물을 팔도록 하는 결과, 다 시 말해 주식매도를 더욱 심하게 만 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장에서 투 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기법이 전체 시장의 붕괴를 촉발시킨 셈이 다.

 

12.1990년대

 

개관: 1990년대는 시작과 끝이 버블 붕괴로 이어지는 다이내믹한 시기였 다. 이번 10년은 1차 걸프전으로 인 한 불황으로 시작되어, 통화정책 완 화, 상대적으로 빠른 부채금융 성장 및 주가 상승으로 진행되어, "테크/닷 컴" 버블(즉, "테크" 주식 및 기타 금 융자산에 대한 부채 상환 매입)로 끝 났다. 이 시기는 1960년대 말 50 우량 주 버블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다. 90 년대가 끝나자마자 닷컴 버블이 붕괴 되었고, 동시에 9/11 테러가 있었고, 이윽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막대한 전비가 드는 전쟁들이 뒤따랐 다. 1990년은 전쟁으로 시작한다. 이라 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무단 으로 침공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 는 군사적 응징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이 당시 유가는 두 배 상승하며 물가를 끌어올렸다. 또한 저축 대부 (S&L: Saving and Loaning) 조합의 줄 도산이 발생했다. 저축대부 조합은 예금자들로부터 투자금을 만들어 모 기지(Mortgage) 대출을 주로 하던 단 체이다. 그러나 당시의 건축 산업이 위축되며 주택담보 대출을 받지 않았 고 그 영향으로 저축대부 조합이 연 쇄적으로 도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8개월(1990.7-1991.3)의 경 기 침체가 발생하였고 GDP는 1.5% 까지 감소하고 실업률은 7%대까지 상승하였다. 당시 미 연준은 금리를 적극적으로 인하하는 정책으로 경제 를 부양했다. 그 결과 미국 산업은 큰 어려움 없이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 후 1990년대 S&P 지수는 90년대 초 에 비해 10년동안 약 6배까지 상승한 다. 이 과정에는 1998년 8월 17일 러 시아의 디폴트Default 사태와 채무 불이행 선언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 주가 충격이 가해진 하락 사례가 있 었다. 그러나 이 사태는 비교적 빠르 게 회복되었고 이후 급속도로 주가에 버블이 형성되며 2000년대 초 닷컴 버블 사태를 초래한다.

 

13.2000년대

 

개관: 2000년대는 호황에서 버블 붕 괴까지 다이나믹한 시기였다. 이 10 년은 1920년대와 가장 비슷했는데, 큰 부채 버블이 1929-32년 부채 붕괴 와 유사한 2008-09년 부채/경제 파탄 으로 이어졌다. 두 경우 모두, 금리를 0%로 끌어내렸고 중앙은행들이 많 은 돈을 찍어내면서 금융 자산을 매 입하게 했다. 패러다임 전환은 2008- 09년 양적완화가 시작되면서 일어났 다. 금리는 0% 가까이 유지되었다. 이번 10년은 닷컴 버블 기간 동안 매 우 높은 성장(예: 비싼 주식)에도 걱 정하지 않고 시작해서, 이전 90년 간 성장률 중 가장 낮은 실질 성장률 (1.8%)로 이어졌다. 이는 1930년대에 가까웠다. 그 결과, 주식은 1930년대 이후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한 10년 이었다. 1930년대처럼 이 10년 동안 금리는 0%로 떨어졌다. 연준은 금리 0%의 양적 완화로 많은 돈을 찍어냈 다. 달러 가치는 하락했고, 금과 국채 가 최고의 투자 방법이었다. 2000년 대 말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부채가 남아있었지만, 그러나 시장은 느린 성장을 도외시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실리콘 밸리의 인터넷 스타트업 기업 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식시장은 비합 리적인 거품 가격이 형성되었다. 투 자자들은 기대감에 휩쌓여 입증되지 않은 산업에 돈을 쏟아 부었으며 인 위적으로 가치를 부풀렸다. 2001(2001.3—2001.11)년에 모든 거 품이 꺼지자 나스닥은 가치의 75%를 잃었고 경제는 큰 침체를 겪게 된다. 이후 9.11. 테러까지 겪으며 미국 사 회는 경제, 정치, 사회 전반적으로 위 축되었다. S&P500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간 가치의 43%를 유 실한다. 2000년대 들어 세계경제는 정보기술(IT) 버블의 붕괴로 고전했 다. 미국은 1990년대에 IT경제의 붐 에 힘입어 연 5~6%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과잉 설 비투자가 이뤄졌고 IT 버블이 꺼지면 서 2001년과 2002년 경제성장률은 각각 0.3%, 2.3%로 둔화됐다. 미국 중 앙은행은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2000년 연 6.5%였던 기준금리를 2001년 연 2%, 2003년 6월 연 1%까 지 낮췄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도 이 같은 저금리정책을 2004년까지 유지 했다. 각국은 이런 조치로 성장률이 높으면서도 물가상승 압력이 낮은 ‘골디락스(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 지도 않은 상태) 경제’를 이뤄냈다. 하 지만 장기간 유지된 저금리는 위기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금리가 낮 으면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게 된다. 기 업이나 가계는 차입 비용이 적어지기 때문에 돈을 빌려서 투자를 하거나 주택을 구입한다. 금융회사들이 수익 을 높이기 위해 대출을 늘리면서 신 용도가 낮은 사람이나 기업에게도 자 금을 빌려줬다. 경기는 활성화되지만 기업이 투자로 수익을 내지 못하거나 가계가 대출을 갚지 못하면 경제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면 서 경제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세 계 각국에서 주택과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주식 가격도 크게 올랐다. 2007년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중 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주가지수가 사상최고치를 경신했다. 경기 호황으로 원자재 가격도 급등했 다. 우리나라의 추석 연휴기간이었던 2008년 9월15일, 미국 4대 투자은행 (증권사)중 하나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미국발 금융위 기의 신호탄이었다. 2007년부터 미 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 보대출)의 부실로 HSBC·씨티 등 대형 금융회사들이 모기지 사업에서 대규 모 손실을 기록했다고 발표하기는 했 지만 미국 대형 금융사가 파산할 것 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리 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세계 각국 금 융회사들은 투자를 꺼리고 현금을 보 유하는 등 안전자산 선호현상을 보였 다. 자금이 돌지 않고 실물 경제도 위 축되는 자금경색 현상이 벌어지자 미 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0~0.25% 로 크게 낮췄다. 또 금융회사들이 보 유한 국채나 모기지담보증권(MBS)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총 1조7,000억 달 러를 시중에 공급했다. 미국 정부는 금융회사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AIG 에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했 고 씨티·BOA(Bank Of America)·모건 스탠리 등 대형 금융사들에도 공적자 금을 투입했다. BOA는 부실화된 투 자은행 메릴린치를 합병했다. 금융위 기는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경제성장률은 2008년 4분기 -6.8%를 기록했고 2009년에도 마이 너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 2009년 에 GM이 파산위기를 맞는 등 자동차 산업을 비롯한 제조업도 휘청거렸다. 미국 서브프라임발 금융위기는 아일 랜드·동유럽·두바이 등을 거쳐 2010 년에는 그리스· 스페인 등 남부 유럽 으로까지 확산됐다. 이들 국가들은 국가 파산 상태 직전까지 갔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반 미국 부동 산가격이 급등한 원인은 무엇일까? 혹자들은 그 원인으로 '2000년대 초 반 Fed의 저금리정책'을 꼽는다. 2000년대 초반 Fed는 IT산업 버블 붕 괴의 충격을 흡수하고자 2001 년-2006년 기간동안 최저 1%(2003 년 6월)의 저금리정책을 유지했었다. Fed가 낮은 금리를 인위적으로 오랫 동안 유지하면서 금융시장내 유동성 이 과다해졌고, 이러한 유동성이 부 동산시장에 흘러가 거품을 만들어냈 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1년-2006년 사이 Fed 이사를 역임했던 Ben Bernanke는 2000년대 초반 미국 부 동산시장 거품은 Fed의 저금리정책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 다. 버넹키에 따르면, 테일러준칙은 일시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물가상승 률(inflation that they expect to be temporary)과 오랫동안 높게 유지되 는 물가상승률(inflation that are expected to be longer lasting)을 구 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물가상승률이 증가했더라도, 테일러 준칙에 의하면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 다. 그렇지만 실제 중앙은행은 물가 상승률이 일시적으로 증가했다고 판 단했을 시에는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 는다. 그는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정책효과 시차를 고려하여, 일시적 물가상승률 증가와 오랫동안 지속되 는 물가상승률 증가를 구분한다는 것 을 생각한다면, 2001년 미국의 경기 후퇴 이후 Fed의 통화정책은 적절했 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Fed가 시장에 유동성을 과다공급하였고, 이러한 유 동성이 부동산시장에 흘러들어가 거 품이 발생한 것 아닐까? 이러한 주장 에 대해 Ben Bernanke는 "미국 부동 산시장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즉, Fed가 느슨 한 통화정책을 시행하기 이전에 부동 산가격 상승이 시작되었다."라고 말 한다. 하지만 미국부동산 가격이 가 장 크게 올랐던 시기는 2004년-2005 년이다. 따라서, 2001년-2006년간 느 슨하게 유지되었던 통화정책이 부동 산시장 거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 제할 수 없다. 그림 15 Ben Bernanke는 거시경제 주요지표· 부동산가격 · 통화정책 사이의 역사 적 관계를 바탕으로 만든 모델을 이 용하여 살펴봤을때 "Fed의 느슨한 통 화정책은 2000년대 초반 미국 부동 산가격 상승 중 오직 작은 부분만을 차지한다." 라고 말한다. 첨부한 두 개의 그래프 중 왼쪽 그래프를 살펴 보자. 왼족 그래프의 선은 Fed의 기 준금리 추이를 나타내고 있고, 음영 처리된 부분은 정상상태(normal)로 간주되는 기준금리 범위이다. 2001 년-2006년 사이 Fed의 기준금리는 정상범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 른쪽 그래프의 음영부분은 거시경제 주요지표 · Fed의 기준금리의 역사적 관계를 고려하여 추정한 부동산가격 예측 범위이다. 오른쪽 그래프를 보 면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당시 실제 부동산가격(파란선)은 음영부분을 크 게 벗어나서 상승했다. 쉽게 말해, 당 시 거시경제 지표나 Fed의 기준금리 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2000년 대 미국 부동산가격이 상승했다는 것 이다. 2001년-2006년 사이 Fed의 느 슨한 통화정책으로는 이정도 규모 (magnitude)의 부동산가격 상승을 설명할 수 없다. 첨언하면, 전세계 다 른 국가들도 느슨한 통화 정책을 유 지했고, 이 정책과 부동산가격 상승 사이의 관계는 통계적으로 약했다. 게다가 미국에 비해 엄격한 통화정책 을 유지한 20개 국가 가운데, 11개 국 가의 부동산가격은 미국보다 더 많이 올랐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반 전 세계 부동산가격 상승은 무엇으로 설 명할 수 있을까? Ben Bernanke는 "신 흥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자본유입이 선진국 내 실질이자율을 낮추고 자산 가격을 상승시켰다. 2000년대 초반 전세계 부동산가격 상승은 일명 글로 벌 과잉저축(the Global Saving Glut)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즉, 경상수지 가 적자일때 자본수지는 흑자를 기록 하는데, 자본수지가 흑자인 국가일수 록 부동산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게 다가 느슨한 통화정책이 자본유입을 감소시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느슨 한 통화정책과 부동산가격 상승 사이 의 관계는 약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즉,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의 '경상수지 흑자를 통한 외환 보유고 축적'은 미국에서 2008 금융 위기 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중 국과 동아시아 국가는 미국 채권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외환보유고를 쌓 아나갔다. 이로인해 미국(자본수지 흑자)으로 막대한 양의 자본유입이 발생하여 부동산가격이 크게 상승했 기 때문이다.

 

14.2010년대

 

개관: 2010년대는 통화 재팽창의 시 대였다. 시장과 경기에서도 바닥이었 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2008년 말/2009년 초 위험 프리미엄 이 극도로 높고, 금리 0%, 그리고 중 앙은행이 공격적인 양적완화("돈 찍 어내기"와 금융자산 매입)를 시작했 을 때 도래했다. 투자자들은 금융자 산을 중앙은행에 팔아 번 돈을 가져 다가 다른 재정 상품을 샀다. 이로인 해 금융 자산 가격이 오르고, 위험 프리 미엄과 모든 자산 종류의 기대 수익 이 하락하였다. 1932-37년 때와 마찬 가지로 금융자산가격이 많이 올랐고, 금융 자산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금 융 자산이 있는 사람들이 이익을 보 았으며, 이는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 켰다. 동시에, 기술 자동화와 인건비 가 적은 나라들로 생산시설을 이전하 는 비즈니스는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 층의 임금을 변동시켰으며, 지난 10 년간 더 많은 소득 증대는 회사와 고 소득자들에게 돌아갔다. 성장은 느렸 고, 인플레이션은 낮게 유지되었다. 지속적인 이자율 하락(예: 중앙 은행 경기 부양)과 높은 이익률(일부 자동 화로 임금 상승률이 낮아짐), 아주 최 근의 감세에 힘입어 주가가 지속적으 로 상승했다. 한편, 증가하는 부와 소 득 격차는 포퓰리즘의 세계적 확산을 추동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코로나 위기 전 자산 가격은 상대적으로 높 고, 성장은 적당히 강할 것으로 정해 져 있으며, 인플레이션은 낮게 유지 되도록 책정되어 있었다. 그림 16 그림 17 1930년대와 2010년대의 비교 고찰 1929년 미국의 대공황으로 인한 ‘부 채 거품’이 터진 후, 1930년대는 민간 부채의 ‘디레버리징’이 오랜 기간 지 속되며 버블의 붕괴와 경기 침체가 이어졌고, 이를 통해 자연스레 ‘정치 적 포퓰리즘’이 고조되었다. 당시, 10 년간 (1929~1939), 절대적인 규모로 는 큰 재정 부양정책이 이행되었지 만, 대출 손실(채무불이행)로 파괴된 화폐의 양과 미국 은행들의 대출 손 실에 비하면 당시 행해진 부양책은 적은 규모였다. 당시, 정책 입안자들 의 주요 목적은 은행 시스템의 재건 이었다. 다시 말해, 1930년대의 미국 경제는 버블 붕괴를 허용한 디레버리 징을 통한 ‘디스 인플레이션’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금융 시스템(Financial system) 안에서 총 레버리지 (Financial leverage) 비율을 측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는 은행 대출 총액 대비 MB(본원통화) 통화 량의 비율을 분석하는 것이다. 은행 대출 총액 대비 MB(본원통화) 통화 량이 적을수록 비율은 낮은 수치를 나타낸다. 쉽게 말해, 비율이 낮을수 록 금융 시스템에 레버리지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율은 1929년 대 공황이 발생하기 직전, 12%까지 내 려가며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까지 위험하게 내려간바 있었다. 그림 18 그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2008년, 장 기적인 민간 부채 거품이 터지며 대 공황 이후 나타났던 과정이 되풀이되 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각종 버블이 꺼지며 민간 부채의 ‘디레버리징’은 계속 이어졌 다. 흥미롭게도, 은행 대출의 총액 대 비 MB(본원통화) 통화량의 비율은 2008 금융위기 직전에도 또한, 12.5% 까지 하락한 모습을 보였다. 그림 19 2008년에 발생한 금융위기가 1929년 발생한 대공황 때보다 더 최근에 발 생했기 때문에, 더 정확하고 많은 데 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관점에서 당시 미국의 은행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 다. 다음 차트는 최근 30년간 미국 대 형 은행의 총자산을 백분율로 나타낸 것으로, 은행이 보유한 현금자산 및 국채등 무위험자산의 보유 비중을 나 타낸다. 그림 20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대형 은행의 전체 자산중 현금자산은 오직 3% 미만으로만 보유했고, 국채는 10% 미만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이 는 당시 미국의 대형 은행이 보유한 총자산중 무위험자산은 오직 약 13% 만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 이다. 당시 그들이 보유한 대부분 자 산은 대출 실행을 통해 보유하고 있 는 명백한 ‘위험’ 자산이었고, 그중에 는 주택시장의 붕괴의 ‘트리거’가 되 었던 위험 주택담보대출 자산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민간 부채 사 이클이 붕괴되며, 정책 입안자들은 무너져가는 은행 시스템을 살리기 위 해서는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부 채가 넘쳐났던 민간의 주택 소유자들 은 파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다음은 M2(광의통화) 대비 미국의 공 공 및 민간 부채 총액의 백분율을 파 란색 선으로 나타내고, 해당기간의 기준금리는 빨간색 선으로, GDP 대 비 MB(본원통화)의 백분율을 초록색 선으로 나타낸 차트이다. 그림 21 총부채는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 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M2(광의통 화-여기서는 담보가치를 말한다)보 다 더 빠르게 증가했고(2008년까지 는 파란색 선이 상승), M2(광의통화) 대비 총부채 비율은 최고 700%를 넘 어섰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에 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M2(광의통 화)가 총 부채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 하기 시작했다. M2(광의통화) 대비 총부채의 ratio는 2020년까지 내리막 길을 걸으며 450% 이하로 점점 낮아 지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미국 내 민간 부채의 절대량 을 (달러로 표시) 파란색 선으로, GDP 대비 민간부채율을 빨간색 선으로, M2(광의통화) 대비 민간부채 비율을 초록색 선으로 나타낸 차트이다. 그림 22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 수 십 년 동안 민간 부채는 GDP 대비 거 의 300%까지 증가했고, M2(광의통 화) 대비 민간 부채는 600% 이상 증 가하며 ‘부채 괴물’을 명목상으로 없 앨 방법이 없었다. 2008년부터 2012 년까지 명목상의 측면에서 민간 부채 의 ‘디레버리징’의 절대액은 45조 달 러의 총액의 8%인 약 3조 6천억 달러 가 줄어드는 데 불과했다. 이후 민간 부채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고, 현 재는 약 55조 달러 규모를 넘어섰다. 그 대신, 분모(M2)가 주로 바뀌었다. 부채는 보다 느린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 반면, M2(광의통화)는 더 빨 리 증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M2(광의통화) 대비의 ‘실질’ 민간 부 채 비율이 감소했다. 1930년대와 유 사하게, 2008년 금융위기 이후와 2010년대 초반의 미국 정부의 대응 은 상대적으로 큰 재정 요소를 가지 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부 양하기보다는 부분적인 대손만을 상 쇄했다. 이후 10년간은 분모가 증가 하여 M2대비 혹은 GDP대비로의 민 간부채가 줄어들며 전반적인 ‘디스인 플레이션’ 상황이 이어졌다. 2010년 대 말부터 자산 가격의 큰 상승을 포 함해 일부 지역의 경제 회복에도 불 구하고, 산업 부문과 전반적인 노동 참여율을 포함한 경제의 많은 부문들 이 2008년 금융위기 이전처럼 완전 히 회복되지 못했다.

 

15.2020년대 현재

 

영국의 감세 정책으로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한 것은 코로나 위기를 국가 부채로 경기를 유지해 왔는데, 또다시 부채로 경기를 살리려는 정책 으로 인해 국채가격이 폭락하고 환율 위기를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은 실물 경제로부터 손을 놓은지 30 년이 넘었다. 금융 경제로만 위기를 타개하는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는 제조업과 금융업은 같이 가야한 다는 교훈이다. 지금 미국은 리쇼어 링 정책으로 제조업을 살려 보고자 한다. 스테그플레이션 우려가 있지 만, 반도체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은 중국의 저임금 생산력과 비교해도 미 국의 가격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이 다. 한편, 퍼거슨에 따르면 코로나19 팬 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미중간의 갈등 격화 등 지금 2020년 대의 상황은 잘못된 재정통화정책과 전쟁, 에너지 위기가 이어진 1970년 대의 상황과 구성요소가 유사하다고 말했다. 광범위한 전염병 같은 예상 하지 못한 위기가 발생해 경제를 와 해시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규 모 통화재정정책에 이어 지정학적 위 기가 발생하면서 통제하기 힘든 인플 레이션이 발생하는 패턴이 이어졌다 는 진단이다. 특히 지금의 상황은 훨 씬 규모가 커진 부채, 생산성의 하락, 악화한 인구구조에 진영 간 관계 개 선(détente) 가능성도 낮아 지난 1970년대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퍼거슨은 사람들이 평균의 함정에 빠져 정규 분포를 믿 고 갑작스러운 위기 발생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지만 전쟁이나 금융위기, 수백만 명을 숨지게 하는 전 세계적 인 전염병은 비선형적으로 갑작스럽 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이 코로나19 위기도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안이하게 판단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퍼거슨은 연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이라면서, 역사적으로 실 질금리를 플러스로 전환하지 않고 인 플레이션을 잡은 적이 없다고 말했 다. 또 경기침체를 유발하지 않고 높 은 인플레이션율을 끌어내린 역사적 인 사례도 찾기 힘들다고 밝혔다. 퍼 거슨은 미국의 경우 아직 실질금리가 플러스가 되지 않는 등 통화정책이 고강도 긴축으로 돌아서지 않았고, 금융시장이 얼어붙지 않아 경기침체 에 빠졌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유럽 의 경우 경기침체에 접어들었음이 확 실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 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위기로 세계 경기는 이미 활력을 잃고 있다는 주 장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은 새로운 강 대국이 부상하면 기존 강대국이 이를 두려워해 전쟁이 일어난다는 투키디 데스의 함정(Tuchididdes Trap)에 비 유된다. 퍼거슨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타이완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냉전(cold war)이 아닌 진짜 무력충돌, 열전(hot war)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이 인플레 이션에 빠진 것과 달리 중국은 경기 침체에 빠져 있다. 코로나19에 대처 할 제대로 된 백신을 만들지 못했고, 제로 코로나를 외치며 봉쇄조치로 대 응하면서 경기침체를 심화시켰다. 부 채가 증가한 상황에서 부동산 경기가 침체돼 부실 대출 규모가 커지고, 인 구는 곧 급격한 감소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의 인구 는 21세기 말 최소한 지금의 절반 또 는 극단적으로는 3분의 1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당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진 핑 국가 주석은 3연임에 성공했다. 퍼 거슨은 경제상황이 악화하고 당에 대 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중국 공산당은 경제보다는 당의 권력을 우선할 가능 성이 높고, 그럴 경우 국가주의 (nationalism)가 부상할 가능이 높다 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 이어 고위 정치인 들이 잇따라 타이완을 방문하는 등 그동안의 전략적 모호성(ambiguity) 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타이완의 독립 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퍼 거슨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표방하는 중국으로서는 타이완의 독립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사안인 만큼 타이완 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신 냉전이 아닌 열전(hot war)으로 비화 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시진핑이 3 연임을 하는 명분이 타이완을 중국에 귀속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상 황에서 미국의 노골적인 타이완 독립 지지 움직임은 미국과 러시아의 실질 적인 무력충돌로 이어질 뻔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와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이번 경제위기에 앞서 두번의 비슷한 위기가 있었다고들 말한다. 즉, 1946 년에는 세계 대전 이후 소비재에 대 한 억눌린 수요가 폭발했고, 가격 통 제가 중단되면서 1947년 인플레이션 이 거의 20%까지 올랐다가 하락했 다. 현재 소비패턴도 팬데믹 이후 경 제 재개에 따른 억눌린 수요에 폭발 했고,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1973년에도 물가상승률이 7%를 넘 었었다. 당시엔 아랍 수출국들이 미 국에 수출을 중단하면서 음식료와 에 너지 가격이 치솟았으나 당시 인플레 는 1966년 시작된 인플레이션 상승 세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처럼 당시엔 낮고 오랜 안정적인 인 플레이션과 낮은 실업률이 지속되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던 때다.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조 바이든 현 대 통령이 공급망 차질을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돌린 것처럼 산업 특이 요 인들이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라고 설 명했다. 당시 연준을 이끌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의장은 수요가 너무 강하고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중의 기 대가 확고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했다. 저널은 제롬 파월 연준 의 장이 현재 직면한 과제는 오늘날의 인플레이션이 1946년과 1966년 중에 서 어느 때와 더 닮았는지를 판단하 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파월 의장은 전날 인플레이션이 "강한 수요"와 "공급 제약"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 으며,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고 정되지 않을 위험을 시사했다는 점에 서 두 시기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1940년대와 2020년대 비교 고찰 1930년대의 경제 침체와 더불어 세 계적으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된 이 후, 1940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 발했다. 1940년대에 발발한 제2차 세 계대전은, 1930년대의 재정적 부양 책의 축소를 이어가던 미국 정부를 포함한 대부분 국가의 정부에게 엄청 난 재정 부양을 강요하는 ‘외부적 기 폭제’로 작용했다. 미국은 국내에 엄 청난 양의 산업 및 생산 설비를 건설 하고 해외로 군인들을 파견한 뒤 귀 국한 800만 명에게 대학 교육, 공공 교육, 주택담보대출 지원 등의 혜택 을 쥐어주었다. 또한, 과잉 생산은 미 국 국내에서 사용되도록 하여 내수를 성장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의 예산 적자 가 너무 컸기에, 미 정부는 이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양의 국 채를 발행했다. 이에 연방준비제도 (Fed, 연준)는 미 정부의 국채를 매입 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 대한 양의 본원 통화 (MB)를 늘려 국 채를 매입하였고- 이를 통해 2차 시 장(유통시장)의 장기금리를 인위적으 로 낮게 유지하고, 미국 부채의 수익 화 (dept monetization)와 ycc (일드 커브 컨트롤)을 단행하였다. 1930년 대에 나타났던 ‘디스인플레이션’ 상 황과는 달리, 1940년대에는 대규모 의 재정지출과 미국 재정적자의 ‘수 익화’로 인해 마침내 미국 경제에는 ‘높은 인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40년대에는, 통화 공급과 총 수 요는 이를 충당할 공급보다 더욱 빠 르게 증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2010 년대부터 민간 부채의 ‘디레버리 징’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에도 불 구하고, 2020년대의 민간 부채는 여 전히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부의 집중으 로 인해, 미국의 수천만 명의 사람들 은 월급 없이는 한 달도 버틸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미국은 2018년 말부터 시작해 2019년 내내 경기가 둔화되기 시작 했다. 2020년 초 전 세계적으로 COVID-19가 확산되며 세계 각국은 경제활동을 중단시켰다. 이에 따라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던 경제는 경 제활동 중단 조치에 취약했고, 결국 붕괴되었다. 이처럼 많은 부채를 안 고 있는 경제는 지속적인 현금 흐름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세계적인 전 염병의 확산과 경제활동 중단에 대응 하기 위해 대부분 국가는 2차 세계대 전 이후 볼 수 없었던 규모의 재정 부 양책을 단행했다. 특히 미국은 GDP 대비 가장 큰 비율로 경기부양책을 단행했으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단행했던 재정 정책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조치였다. 그 결과, M2(광의통화)의 공급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던 1940년대 이후 가 장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림 23 이러한 흐름에 따라, 2020년에 미국 경제의 장기 부채 사이클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공 공부채 거품’이 1940년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의 집중과 포퓰리즘이 증가하며, 재정적 자에 대한 대중과 정책 입안자들의 인식을 바꾸었고 통화 공급의 수문이 열렸다. 여러 관점에서 현 상황을 바라봤을 때, 앞으로도 많은 부채가 생겨날 것 이고 중앙은행은 낮은 금리를 유지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인플레를 잡기위 해 금리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그러 나수년 전부터 몇몇 기관투자자들은 다음 경기 침체기에는 이와 같은 높 은 부채 수준과 낮은 금리를 동반한 비효율적이고 이례적인 대규모의 재 정 정책을 동반할 것이라 예측하였 다. 다시 말해, 현재 불안정한 경제 상 황은 세계적인 전염병 확산이 촉매제 가 되어 가속화되었지만, 경제를 무 너뜨릴 요소들은 전염병이 확산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크고 점진적 으로 구축되고 있었다.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한 현 경제 시스템은 어떠 한 방어책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세 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공동창 립자 레이 달리오는 2018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 'Big Debt Crises'를 통해 ‘헬리콥터 머니’를 포함해 수용적 통 화정책과 재정 지향적 현금 유입을 경제에 접목하는 '통화정책 3(monetary policy 3)' 개념을 설명했 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장기 부채 사이클의 개념을 대중화했고, 미국 경제의 2010년대 말과 1930년대 말 이 여러 가지 면에서 같은 양상을 보 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2019년이 되면 '통화정책3 (monetary policy 3)' 개념이 미국 경 제에 접목되어, 194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경기 침체기가 발생할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레이 달리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지난 2019년, 미 국 최대 규모의 자산운용사 BlackRock과 전 연준 부의장 스탠리 피셔 (Stanley Fischer)는 다음 경기 침체기에 ‘직접 가야한다(go direct)’라는 주제의 개념을 담은 논문 을 발표했다. 이 보고서를 통해, 이들 또한 다음 위기 때는 헬리콥터 머니 를 포함한 비효율적인 통화정책을 시 작해야 되며, 이에 더해 정책 입안자 들이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위험이 있 더라도 다음번 금융 억압 상황에 대 응하기 위해, 대규모의 재정 부양책, 낮은 금리를 지속해야 한다고 이미 19년 당시에 주장했다.

 

16.성장둔화에 대한 수요 및 공급측 관점

 

수요측 요인을 강조하는 연구들은 신 경제 호황 이후의 성장 정체가 총수 요의 구조적 부족과 밀접하게 관련되 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2013년 11 월 서머스는 국제통화기금 콘퍼런스 에서 1930년대 대공황 직후에 한센 (Alvin Hansen)이 제시한 장기정체론 을 재등장시켰다. 한센의 장기정체론 은 모든 저축을 흡수할 만큼의 적절 한 수요가 부족하여 투자에 대한 동 인이 약화되는, 즉 의도된 저축이 의 도된 투자보다 만성적으로 과잉되는 상황을 의미한 다. 이 이론은 불황을 일시적인 경기 변동으로 간주하는 주류의 경기변동 이론과는 달리 총수요의 지속적 부족 에 따른 시장의 실패로 인해 불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입장을 대변한다. 서머스는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 버블과 저금리, 재정적자와 가계부채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과열되거 나 인플레가 높아지지 않았음에 주목 한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금융시장 에서 장기금리가 지속적으로 하락했 음을 지적하며 이는 투자와 저축의 균형을 맞추는 균형실질금리 (equilibrium real interest rate) 또는 자연금리가 계속 낮아졌기 때문이라 고 강조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인 2010년대에는 경제가 금융위기로부 터 회복하고 실업이 감소했음에도 불 구하고 미국의 금리는 지속적으로 하 락하였다. 서머스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비의 부족으로 저축은 과잉되 었지만 투자도 둔화된, 즉 총수요가 부족한 거시경제의 현실을 반영한 것 이라고 설명하였다(Summers, 2014). 그렇다면, 장기정체론은 총수요의 부 족을 야기하는 구조적 원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먼저, 투자 감소의 요인으로는 자본재의 상대가 격이 하락하여 실제 투자가 흡수하는 저축의 양이 감소했으며, 거대 기술 기업들은 과도한 현금자산을 보유하 고 있지만 투자를 늘리지 않고 있다 는 점을 들었다. 기업들의 투자 둔화 는 금융위기와 같은 총수요 자체의 충격, 불평등 심화로 인한 소비 수요 둔화, 인구 증가와 생산성 상승 정체 로 인한 성장률 하락, 금융화와 단기 주의 확산, 자본스톡 대비 이윤율 하 락 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을 반영 한 것이다. 한편, 글로벌 저축 과잉 (global saving glut)으로 표현되듯 동 아시아의 개도국들이나 산유국들이 경상수지 흑자를 증가시켜 준비자산 을 더 많이 축적하고, 위기 이후 금융 규제 변화로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던 것도 저축 과잉으로 이어졌 다. 최근에는 저축을 증가시키고 금 리를 낮춘 요인으로 1980년대 이후 의 소득 불평등 심화 문제를 제기하 는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 다. 예컨대 진보적인 시각의 케인스 주의자들은 고소득층의 저축 성향이 훨씬 높은 현실에서 임 금 상승 둔화와 불평등 심화가 민간 소비를 둔화시키고 총수요를 정체시 켰다고 강조한다(Bivens, 2017). Mian et al.(2021) 역시 자연금리의 장기적 하락의 원인으로 소득 불평등 심화와 베이비붐 세대의 역할에 관해 분석했 다. 특히 Rachel and Summers(2019) 는 총요소생산성, 인구, 불평등 등 민 간 부문의 중립금리 하락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과 정부부채, 지출과 같 이 경제의 중립금리를 높인 요인들을 모두 포함한 실증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민 간 부문의 저축-투자 갭이 확대되어 실질중립금리가 크게 하락하였으며 정부지출이 이를 일부 상쇄하였음에도 장기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분석은 금리가 제로금리 하한에 직면한 상황 에서 민간 부문만으로는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경제적 호황을 가져오기 어 렵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는 현재 상황에서 균형재정과 정부부채 비율의 안정화를 추구한다면 경제의 장기정체가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 며, 장기정체를 극복하려면 재정 확 장과 투자 촉진, 불평등 개선과 사회 안전망 강화 등을 통해 의도된 저축 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적극적 정책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제언하였다. 나아 가 서머스는 장기정체를 극복하기 위 한 정책에서 다음 세 가지 유의사항 을 강조하였다(Summers, 2015). 첫 째, 경제를 더욱 유연하고 역동적으 로 만드는 구조개혁은 장기정체에 적 절한 대응이라 보기 어려우며, 수요 확대 없이 공급만 늘린다면 디플레 압력만 강화할 수 있다. 둘째는 공공 투자 또는 민간투자 확대로 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인데, 이는 실질균형금 리를 높여 장기정체에 직접 대응하는 노력이다. 특히 금리가 낮은 현실에 서는 정부의 공공투자가 중요하며 공 공투자 확대가 오히려 성장을 촉진하 여 정부부채 부담을 낮출 것이라 보 고한다. 셋째, 더욱 확장적인 통화정 책도 가능할 수 있지만 장기정체와 제로금리 하한에서는 그 효과가 약하 다는 점, 과도한 통화 확장은 금융 불 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 적하였다. 장기적 경제성장이 공급 측에서 결정 된다는 관점에 따르면, 성장 정체의 근본 원인은 생산성 상승의 둔화이 다. 공급 측 시각에서 성장을 설명하 는 대표적인 연구자인 고든(Robert Gordon)은 경제성장률 하락의 근본 적 요인이 기술혁신의 정체에 있으며 이에 따른 총요소생산성 증가율 하락 이 1970년대 이후 성장률 둔화를 유 발하였다고 설명한다. 미국 경제사에 대한 고든의 실증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에 혁신과 총요소생산성 상 승이 정체되었고 2000년대 이후 이 러한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Gordon, 2016). 이러한 변화는 다른 실증분석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된다 (Fernald, 2014; Goldin et al., 2021). 이들 연구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이 라고 불리는 기술혁명이 진행 중임에 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노동생산성과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있으며 미래에 관한 전망도 밝지 않다는 것이다. 즉, 1970년대 이후의 장기정체가 생산성 상승의 둔화에 기인한다는 것이 고든 의 공급 측 설명의 요지이다. 연구·개 발이나 슘페터(J. Schumpeter)적 기 업 혁신을 강조하는 일련의 연구 역 시 생산성 상승에 관해 비관적인 분 석을 제시한다. Bloom et al.(2020)에 따르면 연구・개발 자체의 생산성(새 로운 아이디어의 산출을 연구자 수 혹은 연구・개발 투입으로 나눈 값)이 1970 년대 이후 크게 하락했고 1990년대 신경제로 회복되었지만 2000년대에 다시 급속히 하락했다. 나아가 이들 은 연구・개발 지출을 임금으로 나눈 실질 연구자 수를 사용하여 경제 전 체뿐 아니라 산업별, 기업별로도 연 구의 생산성이 하락해 왔다는 실증분석 결과를 제시 한다. 반도체산업의 경우 집적회로에 패키지되는 트랜지스터 수가 2년에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 (Moore’s law)에 따르면 1971년부터 2014년까지 총요소생산성 상승률이 연간 약 35%를 유지했는데, 이는 이 를 위한 연구 노력이 약 18배나 증가 했기 때문이다. 또한 농업의 각 작물 수확량, 의료산업의 질병당 기대수명 상승 등에 관해서도 연구의 생산성은 역사적으로 크게 하 락했다. 이들의 연구는 기업이나 산 업 차원에서 로머(P. M. Romer)의 단 순한 내생적 성장 모형이 주장한 규 모효과(scale effect)가 작동하지 않음 을 보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결국 연 구・개발 투입은 크게 증가했지만 새 로운 아이디어를 얻기가 점점 어려워 져 연구의 생산성 자체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보다 최근의 생산성 상승 둔화에 대해 공급 측 경 제학은 무형자본 서비스의 둔화나 배 분 효율성의 악화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Goldin et al.(2021)은 신경 제 시기인 1995~2005년과 비교하여 2006~2017년 기간의 생산 성 상승 둔화의 원인을 분석하였는 데, 이들에 따르면 무형자본 서비스 의 둔화가 미국의 총요소생산성 상승 둔화의 약 3분의 1, 그리고 노동생산 성 상승 둔화의 17%를 설명한다. 또 한 Baqaee and Farhi(2020)는 1997~2015년 총요소생산성 상승 변 화의 절반 가량이 기업 부문의 역동성 약화로 인한 배분적 효율성 하락에 기인한다는 연구결과 를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공급 측 중 심의 성장이론은 잠재산출이 경제의 기술적, 인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 다고 가정하고 장기적 경제성장이 공 급 측 요인, 특히 총요소생산성에 의 해 결정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수요 측을 매우 강조하는 시각은 인 구와 기술 등 공급 측에 의해 결정되 는 잠재산출 성장의 둔화를 장기정체 의 근본적인 요인으로 강조하는 논의 에 매우 비판적이다. 이러한 비판은 수요 충격이 생산성과 장기 성장을 하락시키는 이력효과 이론에 기초한 것이다(Coibion et al., 2017). 따라서 최근 발전하고 있는 새케인스주의 거 시경제학은 공급 측에서 부분적으로 외생적 기술 변화로 인해 생산성이 결정된다고 인정하지만, 총수요 충격 또한 기업의 신기술 투자와 장기실업 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이력효과 를 통해 결국 생산성에도 영향을 미 친다고 주장한다(Anzoategui et al., 2019). 이와 같이 경제성장 둔화의 원 인에 대해서는 공급 측면과 수요 측 면이라는 경제학계의 오래된 이론적 대립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의 연구들은 총수요와 총공급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들 연구는 장기적 인 성장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성과 기술혁신이지만 불황과 같은 총수요 충격이 여러 경로를 통해 생산성과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 조한다. 공급과 수요가 현실 경제에 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라는 점 을 고려하면 경제성장과 생산성의 역 사적 추세 변화와 관련하여 수요 측 과 공급 측 요인을 함께 고려하고 통 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이론 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요 약하면, 소비하지 않고 저축을 늘리 는 것은 아시아 외환위기 때 배운 학 습 효과이지만, 이로인해 2008년 경 제 위기가 터진 직접적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 현 경제위기는 수요는 많 은데 공급망 차질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는이가 많다. 즉 수요와 공급 측면 모두 현 경제 상황에 중요한 요인이 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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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iples For Navigating BIG DEBT CRISES RAY DALIO

Populism: The Phenomenon Ray dalio

Capital Wars from 1600 to the Present Ray dalio

Largest Events Driving Changes to Life Expectancy Through Time Ray dalio

THE CHANGING WORLD ORDER country power index Ray dalio

Fiscal-driven inflation Lyn alden by fruting

美, 1890년 ‘셔먼법’ 제정 이후 법률 로 독점 규제…스탠더드 오일·파라마 운트 등 강제분할 문화일보 김석

미국의 번영과 히스테리적 소비, 마 침내 거품과 대공황을 낳다. DBR 고 영건

1930년대의 대불황과 미국의 뉴딜 이정구 1

930년대 세계 대공황과 2008년 위 기 양동휴

미국의 경제 불황 역사: 1950년대— 2010년대 투자생각

브레튼우즈 체제의 위기 권형우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옐 로우의 블로그

1970년대 美 ‘경제 재앙’ 타산지석 박 남규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 정재형

2000년대 초반 Fed의 저금리정책이 미국 부동산거품을 만들었는가? 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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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미국 경제정책 패러 다임 전환과 시사점 이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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