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프롤로그
1.권위주의
2.중동분쟁과 네옴시티
3.자유시장에 관하여
4.국가 자본주의
5.미국의 역외 균형 전략
6.러우 분쟁 여담
에필로그
프롤로그
“미국의 자원은 한정돼 있으므로 몇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특히 중국 같은 강력한 라이벌을 마주하고 있다면 말이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덕분에 유럽은 더 강해지고 러시아는 전쟁 전보다 훨씬 약해질 겁니다. 단기적으로는 군사적 손실을 감당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경제 제재까지 버텨내야 하거든요. 러시아의 젊은 인재들은 계속 러시아를 떠날 겁니다. 그러면 유럽 국가에 방위 부담을 더 지울 수 있고 미국은 더 많은 자원과 관심을 아시아로 돌릴 수 있겠죠. 미국이 중동에서 신경 쓸 부분은 단일 국가가 원유 공급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건데 그건 어차피 불가능합니다. 지역 전체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중동 국가는 없으니 미국이 신경 안 써도 되죠.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면서 중동의 전략적 가치도 낮아질 겁니다. 따라서 미국은 중동에 개입하는 대신 중동에서 더 절제된 외교 정책을 펴도 된다는 거예요. 미국 지도자들은 해외 개입을 유지하라는 압박을 받을 거예요. 또한 미국의 외교•안보 분야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선택적이고 절제된 외교 정책을 펴라는 주장에 반발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주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건 힘이죠. 미국은 내키지 않더라도 가장 강력한 잠재적 경쟁 상대에게 집중하게 될 겁니다. 바로 중국입니다. 역외 균형 전략은 중국의 도전을 막아낼 최고의 전략이죠. 그러므로 미국은 역외 균형 전략을 대전략으로 채택해야 하고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스티븐 월트
1.권위주의
권위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적 저항도 커지고 있다. 권위주의는 기본적으로 독재정치와 동의어이며, 궁극적으로는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한편, 민주주의는 정기 선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또한 권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다른 많은 자유주의 , 다원주의 및 헌법 기관도 가정한다. 이 경쟁은 명시적으로 "우파"와 "좌파"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양쪽 끝에 권위주의가 있을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라고 개념 정의하며, 궁극적으로 자유민과 농노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으로 묘사했다. 이스라엘의 포퓰리즘 지도자이자 야심찬 극우주의자 벤저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는 적어도 몽테스키외가 권력분립을 주장한 이후 자유의 전제조건으로 보편적으로 간주되는 기관 중 하나인 독립 법원을 파괴하는 데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번 테러로 약해진 국내 입지를 회복할 기회로 삼을 것이다.
싱크탱크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가 표현한 바와 같이 비슷한 흐름이 다른 곳에서도 민주주의의 “퇴보” 또는 “쇠퇴”를 야기하고 있다. 폴란드와 브라질은 물론, 터키, 페루, 헝가리 등 다른 지역에서는 내리막길이 가파르다. 그리고 부르키나파소와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두 번의 연속 쿠데타 이후 독일 바이마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주주의가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다. 북한과 이란은 독재 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분쟁 전부터 권위주의 체제를 고수했으며 이스라엘이 우크라이나(러시아인 추방을 일삼은 젤렌스키를 푸틴은 나치라 칭한다)를 어떻게든 간접적으로라도 지원했음을 감안하면, 이번 테러의 배후가 러시아(이것이 사실이면, 나탄야후는 푸틴을 나치라 칭해도 무방하다)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중국은 오웰식 감시 인프라와 위구르족 전체를 투옥하고 “재교육”하는 등 점점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림이 모두 암울한 것은 아니다. Freedom House에 따르면 작년에 35개국이 더욱 권위주의적이 되었지만 콜롬비아와 레소토를 포함하여 거의 34개국이 더욱 민주화되었다. 신정주의적인 이란에서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보여줄 수 있는 단순한 권리를 포함하여 그들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시위를 벌였다. 가장 고무적인 점은 이스라엘 사회가 네타냐후가 제안한 개혁에 반대하여 봉기했고 지금은 개혁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교훈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언제나 미묘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히틀러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를 닮으려고 하는 조악품도 피해야 한다. 오늘이나 내일의 위협은 칫솔 콧수염을 기른 남자에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다른 남자, 혹은 여자에게서 그런 성향이 나올 수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독일 공화국이 선포된 후 약 14년 동안은 민주주의가 활발했다. 오늘날 미국인, 브라질인, 헝가리인, 이스라엘인 등에게 이 기간(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은 아이러니하게도 들어 맞는다. 피상적인 유사점은 100년 전 독일이 초인플레이션과 더 중요하게는 디플레이션을 포함한 연속적인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이를 2008년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포함해 그에 따른 모든 혼란과 비교할 수 있다. 더 관련성이 높은 유사점은 오늘날 미국 및 기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바이마르 사회도 극도로 양극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선거 시스템으로 인해 바이마르에서는 분열(정당의 확산)의 형태를 취했지만 미국에서는 양방향 분열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분파주의는 국가를 적대적인 진영, 즉 빨갱이 및 적색주의자 대 군주제, 민족주의자, 나치 등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쪼개어 놓았다.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 진보, 대 공화당, 보수 진영으로 나눠도 대충 그 당시와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불운한 다수의 실용주의적이거나 온건한 중도주의자들이 이러한 전선 사이에 끼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의견 차이가 있다고 나쁠 것은 없다. 사실 논쟁은 예의바르게 유지된다면 민주주의와 다원주의가 번창하는 기반이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다른 사안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안으로는, 먼저 당시의 미디어가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이에 따라 객관성과 진실성이 표준 이하로 평가절하되었다. 즉, 바이마르 독일의 반유대주의처럼 권위주의자들은 그러한 현실 왜곡을 조장한다. 또 다른 요인은 포퓰리즘의 등장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대중의 분노(희망이나 이상이 아닌)에 호소하는 정치 스타일이다 . 포퓰리스트의 목표는 자신(드물게 그녀)을 권력으로 추동하는 폭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 당시 포퓰리스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영토 손실이나 전쟁 배상에 대한 굴욕을 늘어놓았다. 포퓰리즘은 정치를 '우리'와 '그들' 사이의 투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국내외의 적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권력 추구에서는 정적 정의가 더 우선이다. 충성스러운 야당으로 여겨져야 할 동포들이 오히려 반역자로 묘사된다. 폭력배들 (ANTIFA)이 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할 때, 폭력은 처음에는 잠재의식적으로 정치에 스며들고, 다음에는 수사적으로, 그런 후 육체적으로 스며들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 점차적으로 유권자들은 금기 사항(사회 통념)이 깨지는 데 익숙해지며, 이는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의 헝가리 통치 첫 10년 동안처럼 금기 사항이 무감각해질 때까지 포퓰리스트는 많은 작은 거짓말에서 하나의 큰 거짓말로 전환할 적절한 시기를 고려한다. Big Lie라는 용어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래되었다. 첫 번째 쿠데타가 실패한 후 감옥에서 쓴 그 책에서 그는 거짓말이 너무나 거대해서 “그렇게 악명 높게 진실을 왜곡할 뻔뻔함을 가질 수 있느냐"고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이론화했다. 이 통찰에서 그는 독일이 결코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지만 국내 반역자(유대인, 사회주의자 및 그가 싫어하는 기타 집단)가 "뒤통수 때리기"를 했다는 자신만의 큰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민주주의 부패의 마지막 요소는 개인화이다.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부터 시진핑, 오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위주의자는 충성심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이전에는 국기, 국가, 공화국 또는 헌법을 향한 것이 이제는 지도자인 총통, 두체(Duce)에게로 전환된다. 걱정스럽게도 이러한 개인화는 지난 20년 동안 정당의 추세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쇠퇴하는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소설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점진적으로, 그러다 갑자기 파산하듯 그 때가 언제 가까웠는지 미리 알 수 없다. 히틀러는 1923년에 권력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후 1933년에 다시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 해에 그는 자신을 진지하게 지지하지 않는 엘리트들에 의해 총리가 되었다. 다음 달에 방화범들은 독일 의회에 불을 질렀다. 현재까지 그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히틀러가 즉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를 비난하고 결국 처형한 후 그의 국내 적들을 제거하고 다음 달 의회에 의지하여 총통에게 독재 권한을 부여하는 활성화 법안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는 히틀러가 바이마르 헌법을 폐지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류상으로는 1945년까지 법률로 남아 있었다. 독재자는 이제 독일인들이 문서가 아니라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무시했다.
1990년대에 훨씬 더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갖춘 새로 통일된 독일은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겼고, 의회는 다시 독일의회 건물로 옮겼다. 그 건물은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작업자들은 석고와 판넬을 벗겨내야 했다. 그러던중 갑자기 과거가 평소처럼 다시 나타났다. 벽에는 1945년 4월 소련군이 건물을 점령할 때 남긴 총알 구멍뿐 아니라 그들이 휘갈겨 쓴 키릴 문자 낙서도 남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썼고, 다른 사람은 여정을 썼고, 다른 사람은 욕설을 썼다. 새로운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자리에서 독일의 '0시'(패배와 수치심)를 상기시키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낙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통합하고 부각시키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 오늘날, 연방의회 의원들은 투표를 위해 본회의에 들어갈 때 그 앞을 지나가고 있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건축물에 담긴 미묘한 권고를 알고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른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다시 한 번 극우와 극좌에 포퓰리스트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경고는 거기에 있으며,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속삭인다. 그 일은 여기서 일어났고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 그러므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2.중동분쟁과 네옴시티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은 중동뿐만 아니라 새롭고 오래된 지정학적 단층선을 모두 노출시켰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지상 침공을 준비하면서 며칠 간의 분쟁 끝에 이미 총 사망자 수는 2,000명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새로운 전쟁은 러시아가 19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약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부상을 입힌 분쟁을 촉발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추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 러시아에 전력 우위인 유럽에 우크라이나 방어를 맡기고, 미국의 무기와 주력이 우크라이나에서 레반트 지역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가자지구 분쟁도 최대한 빨리 작전을 마치고, 여력이 동아시아 중국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동시에 두 가지 전쟁을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동맹국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크렘린이 그 갈등에서 서방의 군사력 분산과 석유 가격 상승으로 군사적 및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하마스의 전쟁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세계 평화를 이루려는 나라로 보이려는 중국의 노력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지난 3월 라이벌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작은 화해 조짐을 인정하면서 중동 평화 과정에 뛰어들었다. 이 협정이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이 협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은 석유가 풍부한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에 대한 대응과 마찬가지로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대한 중국의 대응도 미온적이었다. 이 전쟁은 사우디아라비아에도 타격을 입힌다.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왕세자의 중동 비전은 이스라엘과의 역사적인 동맹을 포함하여 공유된 경제적 이익을 핵심에 두고 있다. 그는 이미 점령지 내 팔레스타인인의 권리에 대해 왕국의 이전 원칙으로 돌아가 이스라엘과의 거래에 대한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있는 듯 하지만 왕세자의 권력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미국 서방에 기원을 두고 있어 이번 테러로 정책의 큰 물줄기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치더라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편에 서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네옴시티 구축사업 수주를 준비하던 국내 기업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미국이 사우디의 정치적 입장을 문제삼을 경우 삼성물산 등 건설사와 네이버 등 IT기업들의 네옴시티 사업 참여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제기된다. 11일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9일(현지시간)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통화한 뒤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을 지키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평온과 안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빈 살만 왕세자의 이같은 입장 표명은 종교적인 이유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사우디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이슬람교 수니파의 종주국이다. 사우디는 최근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도 했지만 이번 전쟁으로 차질을 빚게 됐다.
국내 기업들은 빈 살만 왕세자의 발언을 받아들이는 미국의 입장에 주목하고 있다. 국내에는 서울의 43배 규모 스마트시티를 짓는 네옴시티 수주를 숙원사업으로 삼는 기업들이 많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미국과 안보 동맹으로 묶여있는 한국 기업들의 사우디 사업 진출에 난관이 닥칠 수 있다. 미국이 최근 하마스의 배후로 지목되는 이란의 자금 60억달러를 재차 동결했듯이, 사우디에 대해서도 일종의 금수 조치를 행할 가능성이 있다. 사우디 역시 국내 기업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네옴컴퍼니는 아시아 로드쇼투어 첫 지역으로 지난 7월 한국을 찾았다. 로드쇼 이전부터 마제드 알 호가일 사우디 자치행정주택부 장관 등 사우디 정부 관계자들이 경기 성남 네이버 1784 사옥에 9차례 방문하며 스마트시티의 핵심인 ICT 기술력을 접하고, 디지털 전환 관련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앞서 지난 2월 컨퍼런스콜에서 "네옴시티와 관련해 로봇, 디지털 트윈, 자율주행, AI(인공지능) 등 여러 미래 기술을 건설회사와 협업해 스마티빌딩, 스마티시티 구축 솔루션으로 제공하는 방식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우디와 일본 일부 프로젝트에서 이르지만 RFI(요청서)를 준비하는 기초 단계"라고 덧붙였다. 한편 네이버 등 네옴시티 관련 기업들은 이-팔 전쟁으로 인한 사업 전망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아직 전쟁이 확전으로 번지지 않았고, 사우디의 지지 대상이 테러단체 하마스가 아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라는 점에서 빈 살만의 팔레스타인 지지 발언의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 국가의 인권은 문서로 보장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인권은 신이 부여한 권리라는 빈 살만의 발언은 종교적 권위주의에 가까워 경제적 이익보다는 종파가 우선인 듯한 모습을 보이고, 다양한 정치 성향 스펙트럼을 보이는 이스라엘 정치권도 전쟁을 장기적으로 가져가기 힘들 것이다.
3.자유시장에 관하여
요즘 경제정책 세계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리즈 트러스(Liz Truss)는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의 가장 큰 추종자이자 경제 자유화에 대한 열광적인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첫 번째 조치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정부 개입을 발표한 것이었다. 소매 에너지 시장에 대한 가격 상한선은 전체 NHS 예산보다 재무부가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여론의 악화로 진행을 멈추었다. 이는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Truss 전임자의 주요 재정 정책인 "평준화"는 본질적으로 자유 시장이 지역 전반에 걸쳐 투자를 할당하는 데 있어 자유 시장에 제멋대로 맡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었다. 화폐와 금융 세계에서 양적 완화 시대는 세계 주요 채권 시장의 상당 부분을 효과적으로 국유화했다. 국제적으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보호주의(정확히는 권역별 보호무역이며 그 권역내에서는 관세가 없다) 강국으로 변모했으며, 반면 공산주의 중국은 자유 무역의 마지막 위대한 챔피언으로 다보스에서 축배를 들었다. 이는 기묘한 이야기에 더 가깝고 글로벌 경제 정책은 거꾸로 뒤집힌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U턴에 따른 불일치에 우리는 얼마나 놀랐을까? 이는 아마도 완전 자유 시장이라는 개념 전체가 극히 최근에 발명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합의가 단독으로 안정성, 성장 및 사회 정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훨씬 더 역사적인 실수에 가깝다. 게다가,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정확히 구성하는 것에 대해 가장 강력한 옹호자들에 의해서도 항상 심한 논쟁을 벌여 왔다. 한가지 예는 자유롭게 기능하는 시장이 적극적인 사회 정책을 대체할 수 있는지 여부다. 경제 사상의 전통적인 역사는 종종 영국-네덜란드 이론가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의 1714년 시 The Fable of the Bees에서 시작된다. 이 시는 시장 경제에서 순전히 이기적인 개인 행동이 온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반(half)직관적인 주장을 개척했다. Mandeville의 간결한 부제에 따르면 "사적인 악덕, 공공의 이익"으로 그는 자본주의를 설명한다.
그러나 Jacob Soll은 훨씬 더 오래된 경제 사상의 자유화 전통이란 시장이 강력한 윤리적 틀 위에 구축될 때만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정반대의 견해를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지적 역사는 18세기 영국이 아니라 거의 2000년 전인 후기 공화주의 로마에서 시작된다. Soll에 따르면, On Duties(그가 번영을 뒷받침한다고 본 스토아학파 도덕률을 명확히 표현하려는 위대한 웅변가 Cicero의 시도)는 시장경제학의 기본 텍스트이다. 그렇다면 건전한 경제 발전을 촉진하려면 어떤 종류의 정부 개입이 필요할 지는 자유 시장 사상의 전통이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개인에게 자본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지시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이라며 Adam Smith는 덧붙여 말한다. 낮은 세금과 좋은 법이 있다면 전 세계의 국가와 개인의 번영을 위해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단다. 여기서 루이 14세의 위대한 재무장관 장 밥티스트 콜베르를 짚고 넘어가자. 영국의 눈부신 경제적 도약에 대응하여 태양왕의 임무를 받은 콜베르는 영국의 자유 무역 교리를 특별한 주장으로 일축했다. 이는 국가가 이미 우수한 산업 및 상업 기반을 갖춘 경우에만 효과가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콜베르는 성공적인 시장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패키지 경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관세 보호, 국가 주도 투자, 활동적인 산업 정책(국가 자본주의가 어느정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이 뒤따라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해밀턴의 미국과 비스마르크의 독일,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 정책을 지배했던 이론가들, 그리고 1979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발전 성공을 거둔 중국(예를 들면, '중국 제조 2025' 전략인 10가지 분야에 대한 국가의 집중 지원)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울려 퍼진 공식이다.
전체적으로 콜베르주의는 자유주의 경제 전통에 대한 더 좁고 전통적인 설명에 대한 풍부하고 가치 있는 해독제를 제공한다. 즉, 영국 경제 정책에 덩샤오핑이나 후안 페론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자신이 어떤 지적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믿는 실용적인 사람들은 대개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이다”라고 유명한 글을 남겼다. 자유 시장은 우리 지도자들이 어떤 사라진 경제학자들의 노예인지 설명한다. 따라서 그들이 영원할 것으로 추정되는 진실을 버리고 결국 대안이 있다고 발표할 때 우리는 조금 덜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4.국가자본주의
보통 자본주의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국가가 경제의 구원 투수 구실을 한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촉발된 세계경제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기부양책을 서둘러 내놓았고 금융시장의 회복을 위해 양적완화 정책들을 펼쳤다. 당시 미국 정부는 부도 위기에 처한 금융기관들을 일시적으로 국유화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금융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어쨌든 국가가 경제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전면에 나섰고, 선진국이나 신흥국 모두에서 국유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대했다. 경제에서 국가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유기업의 비중이 높아진 대표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2011년 중국 주식시장에서 국유기업 비중이 80퍼센트에 이르렀고, 전 세계 순이익 상위 10대 기업 중 세 개가 중국의 국유기업이었다.
1990년대 이래로 세계화 추세가 강화되면서 신자유주의(또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세계자본주의를 주도하고 국가 부문은 최소한도로 축소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많았다. 1991년 소련의 몰락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서방의 승리로 인식됐다. 국가의 축소, 세계화와 자유시장의 확대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2008년 서구가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중국 경제는 잠깐 경기 침체를 겪었지만 정부의 거대한 경기부양 정책 덕분에 빨리 회복됐다. 러시아·브라질·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지에서도 국가와 국유기업의 관여가 증대됐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민경제에서 국유기업의 비중이 증대되자 ‘국가자본주의’ 담론이 인기를 얻으며 부상했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를 계기로 국가 개입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가자본주의’ 논의가 부상한 또 한 가지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있다. 하지만 니얼 퍼거슨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시장 자본주의 vs. 국가자본주의의 대립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정 시기에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수 있고 또 그런 역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국가냐 시장이냐’가 아니라 국가의 역할이 어느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지를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부 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23퍼센트)보다 독일(48퍼센트)이나 네덜란드(58퍼센트)가 훨씬 높기 때문에 이런 기준으로 보면 국가자본주의는 아시아적 현상이 아니라 서유럽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중국은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미국과 독일은 각각 17퍼센트, 18퍼센트고 덴마크는 27퍼센트에 이른다. 중국이 서방에 비해 앞선 영역은 투자(총고정자본형성이라는 항목)였다.
이언 브레머에 따르면, 독재정부들은 계획경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진정한 자유시장을 허용할 경우 자신들이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자본주의이다. 국가자본주의에서 정부는 다양한 형태의 국영기업을 통해 국가의 핵심자원을 통제하며 고용을 창출하고 유지한다. 선별한 민영기업들을 통해 특정 산업분야를 지배하며, 소위 국부펀드를 통해 여유자금을 투자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세 가지 경우 모두 최종 목표는 경제적(경제 성장 극대화)이라기보다는 정치적(국가의 권력 증대 및 정부 지도자의 생존)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지만, 정부가 경제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장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다. 이언 브레머가 말한 국가자본주의의 핵심은 세 가지인데, 국유기업과 민간 대표기업 그리고 국부펀드다. 브레머는 정부가 직접 시장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경제를 운영했던 체제는 1990년 무렵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면서 종지부를 찍었고, 중국이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룬 것도 1970년대 후반, 즉 중국 지도자들이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실험적으로 도입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
이언 브레머는 1990년대 초반에 몰락한 동유럽과 옛 소련, 시장을 도입하기 전인 1949~1978년의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로 지칭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자본주의 용어가 공산주의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것도 아니며, 중앙계획경제가 시대에 맞춰 변모한 것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옛 동구권 사회를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이코노미스트》는 동인도회사가 등장했던 17세기부터 국가가 경제에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니얼 퍼거슨도 전쟁과 같은 특정 시기에는 국가가 경제에 개입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등장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시기에 국가가 크든 작든 경제에 개입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모두 국가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국유기업이 정부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 극적인 부흥을 겪으면서 국민국가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가자본주의는 국유기업이 핵심을 이루는 국민경제가 자유시장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중간 기착지가 아니라 하나의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됐을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럼에도 ‘국가자본주의’를 이렇게 규정하면, 무엇을 국가 개입이라고 판단하고 또 어느 선까지를 국가자본주의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모호함이 남는다. 니얼 퍼거슨은 아돌프 바그너가 국가지출 증대의 법칙을 처음으로 정식화했던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 국가가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한 세기 이상 동안 계몽적인 군주의 싱가포르에서부터 고장 난 전제정의 짐바브웨, 평등주의적 복지국가 덴마크를 거쳐 개인주의의 천국인 론 폴의 텍사스 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자본주의 영향 하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전파를 포함한 주류 경제학설은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을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국가가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위기의 소방수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은 이런 경제 위기가 저절로 해소되기를 기대했다. 세계 지배자들은 제1차세계대전을 하나의 예외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초반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상대적 안정기를 맞이하자 그들은 전쟁 전의 경제 질서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국가는 경제 개입을 줄이고 균형예산을 추구했으며, 금본위제로 복귀하고자 했다. 1929년 대공황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경제 신조(국가의 경제 개입 금지와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위기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이 처방안은 국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노동력 재생산(교육, 보건, 고용보험 등), 사회적 규율(법과 질서), 제국주의적 야망의 충족(국방)을 보장해 주는 제한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대기업의 필요에 부응하는 독점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의식적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하고 잉여가치를 경제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이전하며 주기적인 경기 변동을 억제해 국가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상이한 구성요소의 국제 경쟁력을 보장하도록 개입하는 것으로 점차 바뀌었다. 이런 조짐들은 1930년대 이전에도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주요 참전국들은 군사적 승리를 위해 개별 자본의 생산 시설들을 통제해 어떤 재화를 생산할지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을 통제하고 원료와 식료품을 배급하는 정책도 펼쳤다. 레닌과 부하린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이런 변화를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또는 단순히 “국가자본주의”라고 설명했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경제가 물러나고 독점 자본과 금융과두제가 산업계를 다시 지배했다. 하지만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경제 위기가 도래하자 어쩔 수 없이 국가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1933년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1928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계획과 강제 집산화, 1933년 히틀러의 집권, 1931년 만주사변에서 드러난 일본의 군국주의화 등이 이런 추세를 잘 나타냈다. 일본과 독일 그리고 소련의 군사적 국가자본주의가 경제 불황에서 탈출하는 데 효과를 내자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기 시작했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맥도널드의 영국 등이 국가의 경제 개입을 강화해 철강·석탄 같은 주요 부문에서 국가독점체를 형성하고 무역을 통제하며 국가 지원을 통해 국가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세계 자본주의 추세를 설명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등장했다.
처음에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890년대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 볼마르의 개혁주의 입장에 반대해 당내 혁명가들이 처음 사용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가 국가사회주의를 준비하게 될 정책(국유화 등)을 채택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은 이런 주장에 반대하며 국가의 확장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불리한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의회 활용과 관련한 개혁주의자들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만큼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고, 국가사회주의가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을 나보다 더 확실하게 증명한 사람도 없다!”고 주장했다. 리프크네히트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썼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의 구실이 증대되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변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진화하면서 국가의 구실이 이전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엥겔스도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 대표기구인 국가가 생산에 대한 지도를 떠맡아야만” 하는 상황을 말하거나”, “현대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로, 자본가들의 국가이고 일국 총자본의 관념적 인격화”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둘 모두에게 국가자본주의는 옛 소련이나 동유럽 또는 중국 같은 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을 뜻하지 않았다. 어찌됐던, 부하린은 국가가 국민경제의 모든 생산과 사회의 주요 기구들을 관리하고 국가 개입으로 국내 경쟁은 조절되며 자본들 간 경쟁은 세계시장으로 그 영역이 전환된다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이런 현상을 자본주의 발전의 더 높은 새로운 단계라고 보고,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 1917년 혁명 직후 러시아 볼셰비키 내에서 국가자본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오신스키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조직화는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전혀 준비되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 즉 국가자본주의가 준비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자본주의가 한동안 공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레닌, 부하린, 오신스키 등 볼셰비키들은 국가자본주의를 국가 간섭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노동자 국가 하에서의 시장 경제로 폭넓게 해석했다. 그런데 1930년대를 거치면서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 구실을 하는 경제라는 의미가 됐다. 레닌 등 볼셰비키가 사용한 용어와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편, 평의회 공산주의자 오토 륄레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장이 핵심이라고 보면서도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국가의 경제적 구실에 주목했다. 1931년에 쓴 ‘세계 위기인가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는가’The World Crisis, or Towards State Capitalism에서 륄레는 자본주의가 대규모 카르텔화와 독점화 과정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위기에 직면해 각국 정부의 지원이 중요해졌고, 그 결과 국가의 개입과 계획이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지배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국가의 개입이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설령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륄레는 이런 관점을 소련에도 적용했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자유 자본주의 경제’가 충분히 발전하기도 전에 ‘계획 경제’가 도입됐다고 봤다. 즉, 세계 전쟁은 러시아의 봉건제를 파괴했고, 그다음에는 평화를 정착시킬 수 없었던 부르주아지를 집어삼켰다. 전쟁이 끝난 뒤에 자본주의 기업들이 혼란에 빠졌고, 결국 국유화됐다. 은행, 상선, 대외무역 등이 국가 통제 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륄레는 이미 신경제정책 시기에 국가가 산업 지휘부를 장악하면서 조직된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됐다고 주장했다. 국유화를 통해서 중앙 정부가 확고하게 주도하는 대규모 국가자본주의에 이를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사적 자본주의에 비해 여러 이점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몸부림을 쳐도 부르주아 정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도 볼셰비키가 해외 자본가들한테 엄청난 양보를 해, 광물 자원과 노동력이 해외 자본가들의 착취를 위해 넘어갔다. 이들은 국가와 이윤을 배분했다. 주식시장이 다시 개장됐다. 딜러들, 기업인들, 중개인들, 은행가들, 폭리 업자들, 투기꾼들, 증권 중개인들이 다시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1921년 5월 27일 포고령을 통해 다음 같은 점들이 인정됐다. 공장·작업장, 산업·교역 시설들, 생산 수단과 도구들, 농업·공업 생산물, 주식 등에 대한 소유권; 발명권·특허권·상표권; 저당을 잡거나 대부할 권리, 유증이나 상속권과 함께 부르주아 질서가 완전히 확립돼 산업생산에 완전히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됐다.
륄레를 비롯해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스탈린이 공업화와 강제집산화를 실시한) 1928년이 아니라 신경제정책이 실시된 1921년부터 자본주의로 변모했고, 1929년 경제 위기를 맞이해 다른 자본주의들이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할 때 러시아도 그 대열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스탈린의 소련 사회가 보여 준 높은 수준의 계획과 협동으로 향하는 경향은 미래 사회주의에 유익한 것이라고 주장해, 사상적 뒤죽박죽과 혼란을 드러냈다. 1960년대에 독일 출신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폴 매틱이 륄레와 비슷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도 소련 사회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외형적 차이가 있지만, 동방(국가자본주의)과 서방(혼합 자본주의)은 자본주의라는 본질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즉, 자본-노동 관계의 유지, (자본가 또는 국가의) 생산수단 통제, (자본가 또는 국가에 의한) 잉여가치의 전유와 배분 등에서 서방과 동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적 기업과 국가 통제 경제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볼 때 후자가 잉여생산물에 대한 집중적인 통제권을 가진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모순되게, 매틱은 혼합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사이의 깊은 분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 생산의 의식적 조직화가 사적 자본의 전유를 전제하기에, 혼합 경제에서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라 혁명적 과정일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자본주의적 형식이라고 궤변을 늘어놨다. 궤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틱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혁명이 하나의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할 때 필요하지만 하나의 생산양식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이 빈약한 사회에서 국가가 생산과 분배의 사회화를 통해 자본 형성을 촉진할 수 있는데, 이런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매틱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서방 혼합 자본주의는 결코 국가자본주의가 될 수 없다. 매틱은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지만, 그가 정의한 국가’자본주의’는 아주 제한적인 정의, 즉 임노동과 노동자 통제의 부재에 근거했다. 그래서 매틱은 국가자본주의와 혼합 자본주의 체제 간 경쟁(특히 군사적 경쟁), 소련 내에서 국영 기업들 간 경쟁, 가치법칙의 적용, 소련 사회에서 잉여생산물이 아닌 이윤의 존재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이 매틱은 국가자본주의 사회가 케인스주의적 조치를 통해 (자본 축적의 모순적 과정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할지라도) 노동과 유휴 자본을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는 재화’ 생산에 투입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점에서 매틱의 국가자본주의는 소련을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법칙에서 벗어난 사회라고 보는 관료 집산주의와 비슷하게 본다.
“자본은 이윤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지정한 곳으로 간다.” 그래서 이윤은 자본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개별 자본은 총자본에 압력을 가해 잉여가치 몫을 분배받는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자본들 간 경쟁은 시장에서 이윤을 통한 경쟁이 아니라 국가 계획을 통한 경쟁으로 나타난다. 이런 경쟁이 국가 계획으로 나타난다면 결국 소련 당국의 공식 입장대로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즉, 일정한 사회에서 사회적 자본 전체가 한 사람의 자본가 또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기업의 수중으로 통합될 때에만 이런 자본의 초집중에 도달할 것이다(중국의 산업 정책). 이는 현실주의 정치에서 현재 미국의 독점금지법이 적용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의 국유 기업과 미국의 자유주의 기업이 경쟁하는 지금, 어설프게 독점 금지법을 적용하면 중국으로 자본이 집중될 염려가 있다.
한편, 샤를 베틀렝은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됐다고 보고, 그 사회에서 부르주아 권력이 복원된 이유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의 전제 조건을 노동계급의 생산수단 통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전위 조직이 지도하는 계급투쟁으로 봤다. 베틀렝의 사회주의 개념은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아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계급의 통제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행사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베틀렝은 소련에서 기업이 자율성을 획득해서 계획이 아니라 시장 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 1965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총리 코시긴은 공장 관리자들의 성공 여부를 생산량으로만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의 견지에서 측정하는 새로운 평가 제도를 도입하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려 했다.(그러나 새로운 개혁 조처들은 곧 흐지부지됐다.) 베틀렝은 ‘코시긴 개혁’ 이후로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투쟁에서 자본주의가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계획이 아니라 시장이 지배하면서 가치법칙도 복원됐다. 베틀렝은 국가 소유가 노동 대중의 통제와 지도력에서 벗어나 관리와 행정가들의 조직에 의해 지배당한다면 그 사회는 더는 사회주의가 아니고, 관리와 행정가는 국가부르주아지가 된다고 말했다. 베틀렝은 1965년의 경제 개혁을 통해 이윤이 산업에서 객관적 범주로 자리잡고, 경제 활동이 국가의 수중에 집중됐지만 그 국가와 잉여가치는 국가부르주아지인 국가 관료들이 통제했으며, 경제 발전은 경기순환적 특징과 축적의 위기를 보여 줬으며, 노동계급은 완전 고용 상태지만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권리를 모두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베틀렝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은 기업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때 기업은 이중의 분리(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분리와 기업들 간 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소련에서도 기업은 이중의 분리를 나타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산, 가격, 임금 등에서 독립적이었다. 이것은 소련의 현실과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또한, 베틀렝은 임금이 존재하는데도 노동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임금이 성과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금노동이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오류와 혼란은 (가치법칙을 언급하면서도) 가치법칙의 의미와 그 법칙이 소련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베틀렝은 《소련의 계급투쟁》 제3권에서 1917년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 혁명(80년 한국의 광주 항쟁도 국가 주도 경제의 수익을 좌도 갖기를 바랐을 것이다)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가 소련에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 대해서도,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몰락한 뒤 화궈펑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확립됐다며 중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베틀렝의 이런 태도 변화는 마치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직전에 중국 사회의 토대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자본주의적 요소(즉, 주자파)가 등장해 사회를 바꾸려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로 중국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사회주의라고 보는 좌파들에게서도 베틀렝의 방법적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과 다른 저작들에서 밝힌 자본주의의 핵심을 견지하면서 소련 사회를 분석해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교화시킨 사람은 토니 클리프였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이 계급 사회고 소수의 착취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배제된 직접 생산자들을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사회라는 점을 보여 줬다. 클리프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이 때문에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며, 이런 강제에 기초해 지배계급이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한다고 지적했다. 또, 클리프는 잉여가치의 추출과 더불어 다수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자본들 간 경쟁은 개별 자본으로 하여금 축적을 위한 잉여가치의 재투자와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게 만들며, 이런 추동력이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가속화시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촉진한다고 봤다. 클리프는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착취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켜 소련 사회에 적용했다. 소련 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이론들(국제사회주의경향이 아닌 다른 경향의 국가자본주의론들이나 관료 집산주의 이론 등)은 소련 사회의 착취 관계에만 주목할 뿐 (세계적 규모에서 이뤄지는) 착취자들 사이의 경쟁 관계는 고려하지 않았다. 클리프는 (소련을 세계 자본주의와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지만) 소련은 세계적 국가 체계의 일부고, 그 체계에서 발생하는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으며, 소련과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무엇보다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클리프는 소련의 관료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군사적 경쟁의 압력 때문에 중공업과 군수부문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켰고, 이런 동향이 제1차 5개년계획을 계기로 소련을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변형시켰다고 주장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었다. 클리프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세계경제의 회복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에르네스트 만델 같은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판했다. 클리프는 동방과 서방 세계의 군사적 경쟁이 소련으로 하여금 자본 축적을 강제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는데, 전쟁 이후에도 높은 수준의 군사적 경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군비 지출에 투입되는 자본은 평균이윤율 형성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 동방 자본주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대와 이윤율의 하락을 일시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또 군비 경쟁은 왜 소련 국가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지 않고 한동안 안정적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줬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지닌 확장성의 둘째 사례는 제3세계 혁명들을 분석할 때였다.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3세계(특히, 중국, 베트남, 쿠바) 혁명이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입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국가들에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가 수립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클리프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과정이 없는 제3세계 혁명이, 반제국주의적 과제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일지라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귀결됐다는 점에서는 ‘빗나간 연속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7년에 클리프는 중국을 러시아와 비슷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이 사회를 고대의 동양 사회와 비교했다. 고대의 전제국가는 당시 경제 생활에서 핵심 영역이었던 관개 체계를 관리했지만 생산의 많은 부분은 개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마오쩌둥의 국가는 산업, 은행 그리고 유통이라는 핵심 영역을 관리했고, 산업·농업의 모든 생산·분배에 대한 통제를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 경제 전반에 대한 마오쩌둥의 관료적 관리와 함께 중국공산당과 국가 관료는 … 삶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비록 실패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통해 대중의 모든 삶을 통제하려고 했다. 서방의 많은 좌파들이 중국의 1949년 혁명과 마오쩌둥 그리고 문화혁명에 찬사를 보냈지만 신중국 등장 이후 중국 사회는 클리프가 말한 바처럼 소련과 비슷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신중국 등장 초기에 그 국가의 미래와 마오쩌둥의 노선을 정확히 예측한 클리프의 놀라운 통찰은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지닌 현실 설명력 덕분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된 소련과 동유럽의 격변이 1991년 소련의 몰락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사회들을 사회주의라 믿었던 많은 좌파들이 동유럽과 소련 몰락으로 사기 저하와 방향 감각 상실로 고통을 겪었고 우파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클리프를 비롯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국가자본주의 이론 덕분에 사기 저하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겪게 될 갈등과 모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서방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국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 집합적 자본가 노릇을 하기 때문에 소련이나 동유럽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소련과 동유럽 같은 국가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서도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된다.
5.미국의 역외균형 전략
미국과 중국의 관계 악화로 신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한국 외교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오랜 동맹국이다. 중국과는 1992년 수교 이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미중 대립 구도 속에 한국의 균형 외교는 지속될 수 있을까. 특히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브레인스토밍 이후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외교를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한미관계의 발전적 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외교정책 방향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미국의 국제정치 현실주의 이론가 스티븐 월트 미 하버드대 교수는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와 더불어 국가 간 관계에서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미국의 대표적 현실주의자이자, 논쟁적 학자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전 30년간 이어져 온 미국의 외교정책인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을 명백한 실패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그가 성역화된 이상주의적 정책을 과감히 비판했다는 찬사도 있지만 그 실패의 원인을 자국 내 정치체제에서 찾은 탓에 반박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에 따르면 냉전 이후 세계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미국은 미국이 지향하는 모습대로 세계의 많은 지역을 개조하려 했다. 세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로만 이뤄진다면 더 평화롭고 번영할 것이라는 믿음하에 군사적 수단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동유럽으로 확장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됐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를 침공하고 리비아 등의 내정에 개입하면서 수조 달러를 썼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사이 중국은 미국이 만든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면서 경제 성장을 거듭해 강력한 패권 도전국으로 떠올랐다. 그는 미국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고수한 이유를 외교안보 분야 기득권층의 확고한 의지에서 찾았다. 그는 버락 오바마 정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가 써 논란이 된 '블롭(Blob)'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했다. 로즈는 외교정책 기득권층을 블롭, 즉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경멸적으로 지칭했다. 블롭을 구성하는 싱크탱크, 언론인, 재단, 특정 개인들은 자유주의 패권이 세계를 위한 올바른 전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동시에 자유주의 패권은 이들의 권력과 지위를 보장해 줬다. 그는 그들의 의도 자체는 최선이었지만 다른 국가와 미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폐기하고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역내 동맹국을 활용하고 미국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만 개입하는 역외균형 전략은 수십 년 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논리였지만 냉전 종식과 함께 버려졌다.
그는 미국 외교의 큰 전략에 관한 다양한 시각 중 현실주의자의 제한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표방하는 바이든 행정부 외교안보팀도 월트 교수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의 비판 목소리를 의식하는 모양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이던 2019년 초 미어샤이머·월트 교수의 현실주의 외교관(觀)을 반박하는 기고문에서 "(미어샤이머·월트 교수의 주장은)군사력 사용을 줄이고 있는 외교정책 그룹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최근에는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결정을 놓고 미국 외교정책이 현실주의로 복귀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또한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외교안보의 현실주의적 전환 요구가 커지고 있고, 한국과 미국 간 안보 파트너십의 가치는 더욱더 높아질 것이다. 물론 한국이 그 기회를 잡을 전략적 안목과 민첩성이 있느냐는 별도의 문제다.
6.러우분쟁 여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배경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 보자. 러시아의 지형은 한국이나 미국의 지형과 다르다. 한반도는 산간지형이고 진입점이 거의 없다. 미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륙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열린 평원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경계에는 '침략 통로'가 있는데 이곳을 통해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50번이 넘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침입을 당했다. 50번의 침략 모두 9개의 관문 통로 중 한 곳을 통해 이뤄졌다. 그리고 지금 푸틴의 계획은 러시아를 확장해 모든 9개의 통로를 틀어막는 것이다.
![[Pasted image 20231014150239.png]]
러시아가 코카서스(카프카스, the Caucasus)에서 한 일들, 예를 들어 조지아 침공이나 지난 여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의 해결 등은 러시아군을 이 통로들에 배치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의 경찰 역할도 마찬가지이며, 우크라이나가 이 통로들 중 두 곳으로 가는 길에 있어 나토의 동진을 막으려고 분쟁을 일으켰다. 한 곳은 루마니아에 있는 '베사라비아 갭'이라고 불리는 곳이고, 다른 곳은 폴란드 평원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일이 끝나면 러시아는 계속 진군해 실제로 통로들을 막을 것이고 이 지점에서 NATO와의 끔찍한 전쟁이라는 위협이 생겨난다. 사안을 달리하여, 이번 전쟁이 발생한 가장 핵심적 이유는 러시아의 출생률 저하로 5-10년 후에는 군인이 급감하여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부족하여 전쟁을 연기할 수 없었다. 지형과 인구 변화가 전쟁의 이유를 말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우리에게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몰락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을 준다. 왜냐하면, 이 전쟁에 투입할 러시아 군인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구통계는 지난 반세기 동안 돌아섰고 이제 이들은 말 그대로 남아있는 군인들이 없어지고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훨씬 나은 기량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러시아가 전장에서 맥을 못추는 이유를 분석해 보면 1980년대 중반 모스크바에서 교육제도가 붕괴되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중 가장 젊은 집단이 지금 50대 후반이고 이들이 전장에 나가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병사들의 수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이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지도자들의 역량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 이번 분쟁은 에너지 패권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 유럽에서 가장 광물이 풍부한 지역인 우크라이나 동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티타늄 및 철광석 매장지를 포함해 미개발 리튬 및 대규모 석탄 매장지 등을 러시아가 차지한 것이다. 캐나다 싱크탱크 세크데브(SecDev)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가 압수한 매장량의 가치는 12조4000억 달러(약 1경6000조원) 규모다. 우크라이나는 농업 강국이지만, 산업적으로 가장 널리 이용되는 광물 및 금속 120종 가운데 117종과 화석연료의 주요 공급원이기도 하다. 세크데브와 우크라이나 광업·철강 산업 경영진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 2월 24일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의 석탄 매장지 41곳을 포함해 천연가스(27), 프로판가스(14), 석유 유전(9), 철광석(6), 티타늄 광석(2), 지르코늄 광석(2), 스트론튬(1), 리튬(1), 우라늄(1), 금(1), 석회석 채석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석탄 매장량의 63%, 석유 11%, 천연가스 20%, 금속 42%, 희토류 및 리튬 등 중요 광물 33% 등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러시아 자원에 아쉬워 해야할 NATO 동맹국, 미국, 일본, 한국, 타이완, 호주 등 러시아의 반대편에 서기로 한 모든 이들은 몇 개월이 지난 뒤 동시다발적인 농업과 에너지, 금속, 제조 분야의 부족을 겪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한편,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들은 확실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부터 몇 년이 지나더라도 러시아는 이번 전쟁으로부터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미래와 NATO의 미래는 우크라이나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제재의 목표가 전쟁을 막고 러시아를 철수하게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전쟁을 절대적인 국가적 생존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전쟁을 일으켜 실패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멈추는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여전히 유라시아 중부에서 불안정할 것이고, 이미 전쟁을 일으킨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이번 분쟁으로 러시아 산 석유가 인도와 중국으로 판매 루트가 변경되어 아직까지는 러시아 경제에 별반 영향이 없으며, 러시아에 타격을 주기 위해 유가를 하락시키려는 시도도 힘든 게임이 될 것이다. 1980년대 사우디는 다양한 이유로 하루 4백만 배럴이 넘는 아주 많은 잉여 생산 능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크게는 이란 혁명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이란으로부터 전체 (원유)시장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이건이 사우디 가문과 운명적인 대화를 했던 1985년에도 그 유휴 생산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휴 생산능력이 하루 백만 배럴 밖에 없다. 그러더라도 이것을 운영상태로 돌리는 데 1년이 걸린다. 베네수엘라는 20년이 걸릴 것이고 단지 증산이 아니라 감산을 막는 데만 500억 달러의 투자가 들어갈 것이다. 리비아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고 있어서 해결책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란은, 만약 이란과 미국이 오늘 화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1년이 더 지나야 하루 백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바이든이민주당 환경주의자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나가서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의 돈을 쓰기 시작할 수 있다면 1년간 셰일가스의 새로운 생산에 추가한 최대량은 하루 2백만 배럴이 약간 넘는다. (증산이) 문제없이 진행되었을 때 러시아산 원유가 지금으로부터 1년 후 사라질 양을 간신히 채워 넣을 만큼 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날 어쨌든 유가는 (배럴당)100(달러)까지 올랐다. 시장에 원유를 쏟아붓는 것은 안타깝지만,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
에필로그
개입주의에는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전략과 역내균형(onshore balancing)전략이 있다. 역내균형전략은 바로 해안가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의미로 미국이 지상군을 배치해 역내 균형을 맞춘다는 뜻이다. 역외균형전략은 지상군을 역내에 배치하지 않고 해·공군으로 뒤에서 치고 빠지면서 선별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의미다. 1950년대를 보면 유럽은 역내균형이고 소위 애치슨라인이라고 일컫는 알류샨 열도의 일본과 필리핀 연안선은 역내균형, 한국과 대만은 역외균형의 상태로 있다가 전쟁이 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을 역내균형으로 만들어 놓은 후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미국의 전반적인 정책이 역외균형전략으로 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군사력을 해외에 주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은 약 700군데의 해외기지에 약 18만 명을 배치하고 있는데, 운영 비용이 미 국방비의 30% 내지 40%에 해당한다. 미국으로서는 이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구태여 지상병력을 유지하는 역내균형전략의 인센티브가 줄었다. 냉전이 역내균형전략 필요성을 줄이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는 에너지 자립이다. 미국은 에너지 때문에 더 이상 세계 경찰국가를 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필요할 때 날아가 공격하면 되는데 굳이 지상군이 주둔할 고정기지를 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세 번째는 국제정세를 좌지우지 하는 힘이 과거 미소 냉전 때는 군사력 위주였는데 지금은 다양한 옵션이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로 미국은 달러 패권이나 지식, 통상 문제 등 경제적으로 레버리지를 엄청나게 많이 갖게 되었고, 여러 국제기구를 두는 외부적 요인으로 군사적 필요성이 훨씬 줄어든 것이다. 네 번째는 미국 국민이 역내균형전략을 위해 더 이상 해외기지를 지키는 데 비용과 희생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 군사기술의 발달로 해·공군이 비약적으로 발달해 지상군이 아니더라도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훨씬 많은 수단을 갖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다.
전 세계에서도 미국의 직접 개입주의가 줄었지만, 특히 한반도 내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에 주둔하는 미 2사단 같은 지상군이 크게 필요 없어졌다는 뜻이다. 미국은 현재 그냥 일본과 필리핀 연안선만 지켜도 중국 함대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돼 있다. 더구나 미중 간 갈등에서 중국이 무릎을 꿇으면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의외로 한국이 전략적 가치를 위해 다른 나라와 상호 의존성을 더 만들어내고 외교적으로도 다양한 수단을 쓰는 일들이 중국이 굴복하는 기간 동안 이뤄질 것이라고 본다.
사안을 달리하여, 중국같은 권위주의 정부는 인기가 없는 개혁을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데 민주 정부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으므로 인간이 초래한 기후 및 환경 악화를 해결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권위주의 정부가 인기 없는 정책을 시행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은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을 통해, 예를 들어 인도보다 인구 증가를 더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권위주의 정권이 시행하는 인기 없는 정책은 사회 전반의 이익을 증진하기보다는 지배 엘리트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부유하게 만드는 데 더 자주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의 체제 전환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다. 이에 대해 부연하자면, 미국은 현실정치를 무시한 것 같다. 구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1991년 세계 4위 군사 대국인 이라크를 이겼고 미국 내 많은 이들이 지정학적 경쟁, 즉 강대국 간 경쟁은 끝났다고 봤다. 또 폐쇄적인 권위주의 체제에 비해 자유롭고 열린 사회가 우위를 보장받았다고 믿었고, 미국의 기술력이 경쟁 우위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중국이 경제적으로 전 세계의 환대를 받는 가운데 중국은 곧 (민주적으로) 변하고 번영하며 경제자유화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자유세계 전역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과 제도, 절차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미국은 9·11 테러로 충격을 받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사용자에게 점점 더 극단적인 콘텐츠를 표출하면서 서로를 더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회복력이 있다. 권위주의 정권은 겉보기에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취약하다. 지난해 중국에서 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 중국이 말하기 싫은 또 다른 행사도 있었다. 구소련 종말 30주년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안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유세계 전역에서 우리의 자손들에게 자유사회에서 사는 것이 매우 운 좋은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이다. 또 국제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규칙을 재작성하려는 권위주의 정권도 문제다. 중국 공산당은 코로나19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전 세계의 노력을 방해했고, 팬데믹 와중에 미국의 의료 및 연구시설을 대상으로 산업 스파이를 운영한다. 한국·일본 영공을 비행하는 것은 물론 대만 영공을 침범하며 대만을 위협하고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곳의 (인공)섬을 무기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제적 협력이 훨씬 더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한미동맹뿐 아니라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오커스(호주·미국·영국) 등이 있고, 최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는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의 인식을 확인했다. 중러의 위협 덕택에 우리는 현재 글로벌 경쟁의 본질과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을 이해하게 됐다.”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에 따르면 ‘협상 테이블에 힘(군사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다면 그 협상은 항복의 완곡 어법’이라고 했다. 한미 군사훈련의 재개 목적은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한일 관계도 개선돼야 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때 한미일의 단합된 대북압박은, 북한을 이용해 미국을 (한일로부터) 분열시키려는 중국에 북핵이 자신들의 이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는 방법이다. 또한, 중국의 대규모 핵무기 축적과 북한의 핵무기 보유능력 확산으로 미국이 할 일은 핵우산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핵능력과 재래식 무력을 감안할 때 중러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살무기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김정은(북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를 쓸 우려에 대해서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미국의 3대 핵전력(대륙간탄도미사일·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장거리폭격기)이 유능하다. 만일 (한국의 핵무기 보유로) 동북아 비확산 체제가 무너지고 일본,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도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세계는 훨씬 더 위험해질 것이다.
참조문헌
How Russia benefits/Bloomberg
—Margaret Sutherlin
사우디 왕세자 팔레스타인 지지…네옴시티에 불똥 튀나
머니투데이/ 이정현 기자
Authoritarianism and Democracy
By Ingmar Persson, Julian Savulescu
“민주주의·권위주의 경쟁의 시대… 우크라를 보라, 공짜 자유란 없다”
허버트 R 맥매스터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석좌
History's Whispered Warnings on Authoritarianism vs. Democracy
From the US to Hungary, Israel, Brazil and beyond, the struggle is worldwide and never ends. A look back offers hints of what’s ahead.
By Andreas Kluth
Andreas Kluth is a Bloomberg Opinion columnist covering US diplomacy, national security and geopolitics. Previously, he was editor-in-chief of Handelsblatt Global and a writer for the Economist.
Free Market: The History of an Idea by Jacob Soll
국가자본주의론의 역사와 의미/이정구
현실 주의자들의 정치/스티븐 월트
스티븐 월트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40년 가까이 현실주의 정치를 연구 중인 미국의 정치학자이다. 월트는 기존 현실주의 이론이 강조해온 ‘세력균형’ 개념에서 좀 더 나아가 국가들이 동맹을 맺을 때 ‘힘이 센 나라’를 상대로 동맹을 형성하기보다는 ‘위협적인 나라’를 상대로 동맹을 형성한다는 「위협균형론」을 제시했다. 또한 스티븐 월트는 오늘날 초강대국인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는 건 잘못된 외교 정책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과거 미국이 외교 전략으로 채택 했던 ‘역외 균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스티븐 월트는 현재 미국의 유력한 외교 전문지인 ‘포린폴리시’에 세계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동맹의 기원>, <혁명과 전쟁>, <미국 외교 대전략> 등이 있다.
트럼프-바이든, 누가 되든 美中 신냉전 올 것/ 신원식 국방부 장관
美 외교가 '자유주의 패권' 대신 '역외균형'으로 돌아온다면
한국일보 /김소연 기자
피터 자이한이 보는 푸틴의 전쟁, 원인과 결말
피터 자이한(Peter Zeihan, 1973년생, 국적: 미국)
세계적 지정학 전략가로 2017년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The Absent Superpower)'에서 미국이 에너지 자립에 따라 고립주의로 돌아가면 전 세계적으로 3대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그 첫 무대가 우크라이나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러, 우크라 미래 암흑 만들었다…1경6000조 자원 매장지 장악
중앙일모/ 박형수 기자
네이버 프리미업콘텐츠에서 헤이즐라를 검색해 보세요. 모든 콘텐츠를 무료로 보실수 있습니다.
캡쳐사진이나 도표가 있는 원본은 부크크에서 파라과이 박을 검색해서 유료로 구독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