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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

지경학 콜리바사누 리뷰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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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2.캅카스 개관
13.남캅카스와 러시아
14.북캅카스와 러시아
참과문헌


  

12.캅카스 개관

유럽과의 접경이자 만남의 지대인 캅카스에서 터키는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과의 관계를 미국 및 NATO 내 입지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남캅카스에서 터키는 러시아와 이란의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충족시키되, 이를 NATO 내 입지와 모순되지 않는 범위에서 추진한다. 세 지역 강대국 간의 경쟁과 때로는 협력을 뒷받침하는 이해관계를 이해하려면 캅카스 지역 전체를, 즉 문명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특징과 문명 간의 경계 역할을 하는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제르바이잔의 석유 매장량은 소련이 유럽 대륙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이 이 석유 자원을 확보하고 군사력을 고갈시켜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이 전투는 참전 인원과 사망자 수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러시아인이 아닌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은 1922년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여 20세기를 뒤흔들 사건들의 토대를 마련했다. 캅카스 지역은 소련이 몰락해 가면서 그 약점의 진정한 규모를 세계에 드러냈다. 1980년대 말 조지아에서 반소련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 독립하여 아르메니아에 합류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소련 블록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이로써 세계 주요 강대국 중 적어도 한 곳이 유럽 대륙에 주둔했던 500년 시대가 막을 내렸다. 캅카스 지역은 남캅카스와 북캅카스로 나뉘는데, 북캅카스는 현재 러시아 영토 내에 위치하여 냉전 이후 현대 러시아에게 핵심적인 지역이다. 남캅카스 지역은 오늘날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를 비롯하여 사실상 독립국이자 분쟁 지역인 압하지야, 남오세티아, 나고르노카라바흐, 그리고 영토 분쟁은 없지만 분리된 지역인 나히체반을 포함한다. 나히체반은 과거 제국들의 지배를 받으며 끊임없이 혼란을 겪었던 지역으로, 현재는 중앙아시아의 지역 강대국으로 변모했다. 캅카스는 여러 관점에서 바라본 국경 지대의 집합체이며, 각 관점은 과거 제국들이 자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를 감시했던 시각을 반영한다. 산맥이 없다면 캅카스는 카스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폭 480km의 육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캅카스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산맥이다. 이 산맥은 지역을 두 개의 산맥으로 나눈다. 대캅카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더 높고 험준한 산맥이다. 조지아 남부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굽어 아르메니아를 지나 세반 호수를 돌아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까지 이어지는 소캅카스 산맥이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쿠라 강은 두 산맥 사이를 흐르며 계곡을 형성하고, 점차 완만해지는 평야를 거쳐 카스피해로 흘러간다. 조지아의 이 비옥한 평야는 온화한 기후 덕분에 농업뿐 아니라 조지아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와인 제조 산업에도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쿠라 강과 그 주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이 동쪽 길은 수천 년 동안 거대한 군대들이 지나다니며 전투를 벌여온 몇 안 되는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이다. 대캅카스 산맥에는 역사적으로 북쪽으로 통하는 길이 두 개뿐이었는데, 둘 다 매우 좁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북쪽에서 오는 적의 진입을 막기 위해 알렉산더의 문이라는 성벽을 건설했다. 조지아 군사 도로는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러시아 제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던 역사를 공유하는 곳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캅카스 산맥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캅카스 산맥은 1년 중 눈이 없는 달이 몇 달에 불과할 정도로 험준한 지형이었다. 모든 군사적 목표는 겨울이 보급선을 끊어 군대가 식량과 탄약 없이 고립되기 전에 달성해야 했다. 캅카스 지역 부족들의 지원을 확보하지 않고 각 원정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족들은 자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지만, 캅카스 지역에서 군대를 유지하려는 제국에게는 그들의 지원이 매우 중요했다. 오늘날 이란을 보호하는 자그로스 산맥은 두 제국의 영토였다. 당시 사파비 왕조의 수도였던 이란 북서부의 타브리즈는 두 제국 간에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결국 사파비 샤는 수도를 동쪽의 테헤란으로 옮겼다. 약 130년 동안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등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캅카스 지역뿐만 아니라 북캅카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부터 러시아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오스만 제국을 희생시키면서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아제르바이잔은 주로 시아파 무슬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란에는 아제르바이잔보다 3배나 많은 아제르바이잔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인들은 투르크계 민족이기 때문에 터키의 투르크인들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아제르바이잔어는 터키어와 매우 유사하여 화자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 상당한 규모의 아제르바이잔계 인구를 보유한 이란은 아제르바이잔을 넘어서는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2,500만 명에 달하는 자국 내 아제르바이잔계 주민들이 이슬람 정권에 도전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적 유대감이 동맹을 촉진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모두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새롭게 건국된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를 되찾으려 했고, 이는 러시아의 전략적 이익을 위협했다. 러시아는 이러한 위협을 오래 용납하지 않았다. 양측의 민족주의는 1921년 아제르바이잔에 할양되었던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싸고 아르메니아와 갈등을 일으켰다. 1990년대 초 전쟁이 발발했고, 현재 이 지역은 사실상 전부 아제르바이잔의 통제 아래 있으며, 아르메니아도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보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협상해 왔다. 2025년 8월 워싱턴에서 양국이 평화협정 문안에 가서명했다. 다만 정식 서명과 비준에는 아르메니아 헌법 개정 문제 등이 남아 있다. 말리크(17~18세기 페르시아(사파비·아프샤르 왕조) 지배하의 카라바흐 산악 지대에서 아르메니아계 세습 영주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지역 자치와 군사력을 갖고 페르시아 황제에 신속했다.)는 왕이란 뜻인데, 아르메니아 측에서는 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인의 오랜 자치 전통이 있었다는 근거로 인용한다. 아제르바이잔 측은 이 지역의 역사적 소유권과 인구 구성을 다르게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들을 차례로 살펴보고 주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그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논의할 것이다. 조지아와는 달리 오세티아는 1700년대 후반부터 대체로 친러시아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조지아가 1918년 러시아 내 반볼셰비키 세력인 멘셰비키를 지지했을 때, 볼셰비키는 훗날 소련 내에서 남오세티아 자치주(사파로프)를 설립하여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그 호의에 보답했다. 압하지야는 남오세티아와 마찬가지로 조지아 내의 반자치 지역이다. 조지아는 이 지역을 두고 13개월간 전쟁을 벌였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야를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일부로 재통합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조지아가 이 두 지역을 장악하여 조지아 군사 도로와 트랜스캅카스 고속도로의 남쪽 끝, 그리고 러시아와 흑해를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러시아는 1990년대에는 간접적으로, 2008년에는 직접적으로 두 지역의 독립을 지지했다. 조지아가 서방의 지원을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결국 러시아의 개입을 촉발했다. 조지아는 러시아와 서방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선두에 서 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카슈빌리는 조지아와 최근 관계가 개선되었던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러시아는 미국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국가이다. 러시아와 서방에게 조지아를 둘러싼 갈등은 남캅카스 지정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다. 조지아는 이 지역의 유전에 직접 접근할 수는 없지만, 남캅카스 중심부에 위치하여 이 지역에서 나가는 석유 파이프라인의 중요한 동쪽 수송로에 자리 잡고 있다. 카스피해 석유를 터키로 수출하기 위한 파이프라인 중 하나는 바쿠에서 시작하여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 한까지 이어진다. 트빌리시에서 카르스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은 2017년에 가동되었다. 러시아는 이러한 수송로에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 조지아는 서방과의 경제 관계를 확대하고 모스크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조지아 역시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환영하지만, 2008년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협력 관계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의 경쟁 관계 때문에 바쿠에서 터키까지 이어지는 송유관과 철도를 건설할 때 아르메니아를 거치지 않으려 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독립한 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유럽 최후의 전쟁 중 하나였다. 당시 코카서스 지역 인구 1,600만 명 중 2만 명이 사망하고 거의 1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러시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분쟁 양측을 지원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전략이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국제 기구(IOC)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어 아르메니아를 서방, 특히 터키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13.남캅카스와 러시아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국가 안보 전략은 러시아, 이란, 터키,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유연성을 잃게 될 것이다. 게다가 시아파 인구가 대다수인 아제르바이잔은 북캅카스 다게스탄의 수니파 지하디스트들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데르벤트 고개 북쪽 끝에서 수니파의 봉기가 일어날 경우와, 서방에서 등을 돌리고 러시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캅카스 북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이란 사이에 끼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캅카스 지역의 영향력이 약화될 경우 이란은 그 기회를 틈타 캅카스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갈등은 수십 년 동안 잠재되어 왔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자치주(州)는 소련에 자신들의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아르메니아 영토 내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월경지인 나히체반이 있다. 이곳 역시 소련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의 산물로 생겨났다. 나히체반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지만, 30마일(약 48km)에 달하는 적대적인 아르메니아 영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고립되어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주된 이유는 지리적 안보와 서방에 대한 가장 중요한 완충지대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하면서 다른 국경 지역도 확보하려 했다. 러시아 완충지대의 불안정성 또한 심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특히 캅카스 지역의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제르바이잔 시위대의 반발로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연결하는 핵심 통로인 라친 회랑이 2022년 12월부터 수개월간 봉쇄된 상태이다. 라친 위기는 러시아의 지역 내 입지를 위협할 수 있다. 러시아 평화유지군은 회랑 통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아르메니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으며, 실질적인 진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봉쇄로 인해 식량과 의약품 조달이 어려워졌고, 잦은 정전 사태도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지난 1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자국 영토 내 훈련을 거부하며 CSTO의 장기적인 존립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레반 정부가 G20 국가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압력을 가해 이 문제에 개입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유럽연합은 이미 아르메니아에 민간 대표부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상황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문제에 너무 몰두하여 다른 나라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와의 관계가 위태롭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상황은 다르다. 아르메니아와 러시아 간의 경제 관계, 특히 에너지 분야 관계는 대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모스크바는 예레반의 파트너였다. 2021년 러시아와의 무역액은 26억 달러였으며, 이는 2022년 아르메니아 경제 성장률 13%의 34%를 차지했다. 아르메니아 경제는 러시아 이민자와 무역 및 병행 수출 증가에 힘입어 13% 성장했다. 아르메니아의 IT 부문 인적 자본이 25% 증가했다고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가 밝혔다. 파시냔 총리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가 아르메니아 영토로 인정된 지역을 공격한 것에 대해 바쿠를 비난했다. 기사에 따르면 CSTO 회원국은 공격받는 회원국을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난 1월 카자흐스탄의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도 반정부 시위 발생 후 러시아에 군사 지원을 요청할 때 같은 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아스타나에 진입했다가 새 정부 수립 후에야 철수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경우 모스크바는 군사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모스크바는 긴장 완화를 위한 중재에 나섰다고 밝혔다. 2022년 9월에 발생한 충돌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장기적인 분쟁에서 최근 발생한 심각한 교전이었다. 모스크바의 중재와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파병으로 휴전이 이루어진 2020년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에도 간헐적인 국경 충돌이 발생하여 더 큰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주로 거주하는 분리주의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와 그 주변 지역에서의 적대 행위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더욱 격화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단기간에 종식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면서 독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지역의 주요 동맹국인 터키와 함께 유럽에 절실히 필요한 천연가스 대체 공급원을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잠재적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로도 여겼다. 미국과 유럽 대표단이 에너지 회담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에 머무는 동안, 바쿠는 모스크바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분리주의 지역의 독립을 선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터키와의 협력을 유지하고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기회를 추구했다. 9월 봉쇄는 우크라이나군이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로 다음 날 시작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가 지원할 수 없는 시점에 아르메니아를 공격할 기회를 포착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모스크바는 나고르노-카라바흐 휴전 협정 조건을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평화유지군이 총격을 받는 상황이었다. 예레반은 현재의 봉쇄가 잔게주르 회랑 건설 계획 거부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이 회랑은 나흐치반 자치공화국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인들과 아제르바이잔 본토를 연결하는 통로였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라친 회랑 위기는 아제르바이잔이 캅카스 지역에 압력을 가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으며, 해결에는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나고르노-카라바흐가 러시아의 새로운 전선이 될 수 있는지라는 더 큰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위의 모든 증거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략적 관점에서 러시아는 남부 국경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러시아의 핵심 영토마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들은 예전부터 주민들과 지역 행정 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을 통제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베니히센 브록섭에 따르면, 북캅카스는 19세기 후반 차르 체제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동시에, 산악 지형은 남쪽의 주요 이슬람 세력, 예를 들어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가 이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는 캅카스 지역 정복을 위해 남캅카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두 나라는 18세기에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축적했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었지만 영토를 잃기 시작했고, 중동에서는 치열한 경쟁에 휘말려 있었다. 결국, 광활한 대캅카스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각축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러시아는 이러한 문제에 구애받지 않았다. 러시아가 오스만이나 페르시아처럼 내부 위기나 다른 전선에 발목 잡히지 않고 캅카스 정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두 경쟁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진 틈을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파고든 셈이다. 정교회 기독교 국가였던 러시아는 비록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북캅카스 지역을 정복하는 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캅카스와 달리 북캅카스에 독립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대신, 이 지역은 러시아의 일부이며,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8개의 연방 지구 중 두 곳인 북캅카스 연방 지구와 남캅카스 연방 지구로 나뉘어 있다. 러시아가 이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반 4세(이반 더 테러블) 시대였다. 이반 4세는 1552년 카잔 칸국을 무너뜨린 데 이어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했다. 아스트라한은 볼가강이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하구에 있다. 이를 차지하면서 러시아는 볼가강 전 유역을 장악했고, 카스피해와 캅카스,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무역로와 통로를 열었다. 이반 4세 시기의 아스트라한 정복은 러시아가 캅카스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이러한 문제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앞의 서술처럼, 오스만과 페르시아가 서로 다른 전선에서 힘을 쓰는 동안 러시아는 이미 수백 년에 걸쳐 남진의 기반을 다져 왔다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1604년부터 1783년까지 이 지역은 사실상 고립된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캅카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제한받았다. 러시아의 침공 시도가 중단되고 오스만 제국과 크림 타타르족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8세기부터 이 지역에 존재해 온 이슬람교는 고립된 틈을 타 북캅카스 중부와 서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2세 통치 하에 북캅카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지하드 기반 운동이 촉발되었고, 이는 소련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북캅카스 정치에서 수피즘의 영향력이 커졌다. 미 육군의 로버트 F. 바우만 교수는 러시아의 팽창이 무슬림의 종교적 열정을 자극했고, 그것이 저항을 동원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바우만 교수의 분석은 "러시아가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까지 오래 걸린 이유"를 설명한다. 이슬람 저항으로 인해 러시아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완전히 저지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의 북캅카스 식민화는 영국과 프랑스의 아프리카와 인도 식민주의와 비견될 만한 결과를 초래했다. 1996년 한 기사에서 전 CIA 및 국가안보 담당관 폴 헨즈는 러시아의 식민주의가 북캅카스 지역에 질서와 발전을 가져왔다고 썼다. 당시 북캅카스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부족민들이 거주하는 혼란스러운 지역이었다. 헨즈에 따르면 모스크바는 실제로 고속도로, 철도, 항구, 도시와 같은 현대적인 기반 시설을 이 지역에 제공했지만, 이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진압하기 위한 장기간의 공세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러시아는 다른 유럽 열강들이 먼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자국과 훨씬 가까운 이 지역을 지배하려 했다.
  

14.북캅카스와 러시아

로욜라 대학교의 호다르코프스키 교수는 러시아가 북캅카스 정복을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때때로 동맹을 찾기도 했지만, 특히 토지를 획득하고 지역 주민들을 몰아낼 때는 무력을 사용했다. 러시아는 지역 동맹이 필요할 때 봉건적인 무슬림 엘리트를 자주 포섭하여 모스크바의 지지자로 만들었다. 북캅카스 지역의 엘리트들은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고, 그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 문화와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북캅카스 지역의 동화를 진전시키는 데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모스크바는 북캅카스 지역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할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지주 계층에 불만을 품은 지역 주민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진행된 정교회 개종 운동은 지역 충성 유지를 위한 제국의 절박한 이해관계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개종 노력은 이슬람 성직자들에게는 당연히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로운 정부 형태가 지역의 법적 관습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슬람법과 관습법의 상충으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성직자 편에 섰다면 무장 종교 저항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러시아는 러시아 관습을 기꺼이 받아들일 현지 동맹을 원했기 때문에 현지 정치·경제 엘리트들을 선호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차르 시대 내내 북캅카스 지역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은 이 지역에 친러시아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많은 지역 엘리트들이 러시아화만이 유럽 근대화를 가져올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합은 해체되었고, 몇몇 분쟁 지역과 함께 남캅카스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의 독립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1999년부터 2009년까지 두 차례의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다. 독립 체첸은 체첸 내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이슬람 체첸은 더 큰 북캅카스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 이슬람 국가 건설과 같은 보다 세계적인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캅카스 에미레이트는 2007년에 설립된 지역 운동이다. 체첸 출신의 일부 전사들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이동하여 지하드 정부에 합류했다. 따라서 카디로프 일족이 이끄는 안정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이는 적어도 10년 동안 안정을 유지해 왔다. 이는 체첸 반군이 카디로프 정권을 지지한 덕분이며, 사실 이는 2000년대 초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했을 때 직면했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 단명했던 독립 체첸의 전 무프티(최고 종교 지도자)였던 아흐마드 카디로프의 충성을 얻음으로써 푸틴은 체첸에서 더 이상의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내전 이후 민족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 세 세력이 등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카에다와 연계된 초국가적 지하디스트들이 러시아와의 갈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민족주의자들은 영향력을 잃었다. 하지만 2003년 푸틴이 정권을 잡은 지 7개월 만에 지하디스트들이 아흐마드 카디로프를 암살하면서 체첸은 모스크바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크렘린이 카디로프와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이 지역에 개입했던 또 다른 사례는 2017년 체첸 동성애자 문제였다. 푸틴은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동성애자 인권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2017년 당시 탄압으로 12명이 사망하고 최소 100명 이상이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카디로프는 당시 공식 성명을 통해 체첸에는 이슬람 전통 때문에 동성애자가 없다고 주장하며 어떠한 개입도 부인했다. 하지만 이슬람 종교 전통을 수호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체첸에서 카디로프는 여성 복장 규정을 시행하고, 남녀 혼석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주장하며, 일부다처제를 옹호함으로써 이슬람 신앙의 수호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일반적으로 카디로프의 상관들은 그가 종교를 옹호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침묵을 지켰는데, 이는 양국 정부 모두 지금은 지하디스트들에게 힘을 실어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러시아의 자원이 이미 고갈되었고, 초국가적인 지하디스트 단체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에 영합하는 것의 문제는 결국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쪽이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이슬람 정부들은 지하디스트들에게 정당성과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신들이 막으려 했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체첸은 크렘린과 카디로프 간의 암묵적인 협력 관계 하에 독립국으로 통치되지만, 모스크바로부터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카디로프는 체첸에서 약 3만 명 규모의 카디로프치 군대를 독재적으로 통제하며 러시아 법을 무시하고 있다. 그의 병사들 중 일부는 러시아 정부 소속으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모스크바가 아닌 카디로프의 지휘를 받는다. 체첸에는 경쟁하는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없으며, 카디로프 일가 구성원들이 주요 직책을 맡고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카디로프는 체첸 내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스크바의 자금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카디로프치는 지난 10년간 푸틴 정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들은 러시아 반대 세력에 맞서 정권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체첸 공화국은 모스크바가 이슬람 세계와의 거래에서 중개자 역할을 자주 수행한다. 이슬람교 배경과 크렘린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카디로프는 완벽한 후보이다. 푸틴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UAE)와 체첸 공화국을 칭찬하며,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해 북캅카스 지역에 개인 보호 장비를 기증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카디로프는 다른 협력 분야에 대한 논의 외에도 UAE의 프로젝트들이 체첸 개발에 기여한 바를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학에서 '체첸화 과정'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중앙 정부가 지역 지도자에게 중앙 권력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일정 수준의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나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충성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양측 당국 모두에게 매우 안정적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지도부가 러시아 연방군(Rosgvardiya)을 약화시킬 경우 매우 취약해진다. 카디로프는 2022년 3월 텔레그램에서 러시아를 지지하는 7만 명 이상의 체첸 전투원을 모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후 분쟁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의 불안정한 직업 군인 모집 노력을 도왔다. 강압적인 모집과 가족에 대한 압력이 체첸 동원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모든 상황으로 인해 카디로프는 2022년 9월 하르키우 반격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전쟁에 대한 공개 담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의 동원은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원령 발표 이후 러시아 전역의 여러 도시, 특히 비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체첸을 포함한 북캅카스 지역에서는 반전 시위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마리우폴에서는 소위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아흐마트 카디로프 재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시 동원령 발표 이전까지 반전 시위는 주로 북캅카스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카디로프와 두 정권 간의 정치적 충성심, 그리고 모스크바와의 두 차례 전쟁을 겪었던 지역 주민들의 기억, 러시아의 침략 행위에 대한 익숙함이 이러한 시위의 주요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시위는 소규모로 제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원령 발표는 북캅카스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카디로프의 강제 동원은 비판을 받았지만, 북캅카스 지역을 겨냥한 정치적 동원이 지역 외부에서도 확산되고 있으며, 이는 북캅카스 지역의 불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유럽에 거주하는 체첸인들 또한 러시아 제국주의에 ​​맞서는 공동의 투쟁으로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이치케리아)을 지지하기 위해 참여했다. 우크라이나 내전을 러시아와의 분쟁으로 묘사하고 이를 서방을 공격할 기회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체첸 대대는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벌여온 부대이다. 이치케리안 민족주의자들의 4개 무장 세력 중 하나인 이 부대는 체첸에서의 목표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맞서는 것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이치케리안 민족주의자들에 따르면, 서방의 강력한 우크라이나 지원은 반러시아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카디로프에게도 위협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반란의 가능성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전개에 달려 있다. 캅카스 지역의 반란은 2016년 이후 완전히 진압되었다. 북캅카스 지역을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람잔 카디로프가 연방 차원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전쟁으로 이득을 볼 수도 있지만, 정치적 불안이 고조될 가능성은 러시아의 추가적인 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며, 이는 크렘린궁에 가장 큰 위험 요소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는 서방에 대한 새로운 봉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의 역할은 지리적 이점, 즉 이란으로 가는 육로이자 남아시아와 세계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에 있다. 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이 제재를 가한 이후 양국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 중 하나일 뿐이다. 그 해 러시아와 이란은 핵 에너지 협력뿐 아니라 무역 및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2016년에는 이란이 러시아에 천연가스를 수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란은 러시아 제품의 유망한 시장이다. 그러나 이란은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이란은 러시아가 기존 공급업체로부터 중단된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는 산업 설비 및 반제품 생산국이 아니다. 러시아와 이란은 유럽과 서방 제재를 우회하여 유라시아 대륙으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새로운 해상 운송로인 국제 북부 회랑을 개발해 왔다. 러시아발 보도에 따르면 이 회랑은 이미 운영 중이며, 일부에서는 뭄바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주요 운송 경로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화물은 기존 인프라를 이용하여 코카서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운송되어야 한다. 이 운송 회랑 프로젝트는 2000년 9월 12일 러시아, 이란, 인도 간에 체결된 정부 간 협정에 따른 것이다. 2022년 회의에서 러시아 외교부 장관과 그의 측근인 에브라힘 라이시는 이란 북부의 라슈트 구간을 가능한 한 빨리 완공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회랑은 2030년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라슈트에서 이란 남부 항구까지는 1,000km가 넘는 거리이다. 파키스탄을 거치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참고문헌

Geopolitics, Geoeconomics
and Borderlands
A Study of a Changing Eurasia and Its
Implications for Europe
By Antonia Colibășa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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