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청일전쟁과 동북아의 정체성
청일 개전 당시 일본은 큰 승리를 예상하지는 못하였다. 1890년 국회 개설이래 시끄러워진 내정문제의 돌파구를 뚫고자 하는 계산도 있었지만, 전쟁의 목표는 ‘독립’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립과 약간의 배상금 정도였다. 잇단 승전과 反淸 열기로 영토 점령으로까지 팽창된 무리한 강화조건, 특히 랴오뚱반도의 할양은 열강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조약 조인 불과 일주일 뒤인 1895년 4월 23일, 랴오뚱반도의 할양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며 제동을 걸어 왔다. 일본은 배상금을 얹어 받고 물러났다. 이른바 ‘삼국간섭’과 ‘랴오뚱반도 還付’ 사건이었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까지 10년간 일본은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국론으로 삼았다. 청일전쟁 중에 이미 여물어진 ‘광적인 애국심’이 전쟁 직후의 국민적 적개심과 융합하여 제국주의의 심성을 다졌다. 당대 으뜸가는 계몽주의자이며 여론지도자였던 랴오뚱반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전승의 감격에 눈물을 흘렸고”, 토쿠토미 소호오(德富蘇峯)는 “삼국간섭을 계기로 정신적으로 딴 사람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1930년대의 국수주의는 한 세대 이전인 이때에 다져진 토양 위에서 쉽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물적 토대와 정신적 토대를 일군 1895년은 따라서 일본의 근대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청일전쟁은 중국·일본·조선에만 영향을 미친 사건이 아니었다. 영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세계전략과 동아시아 정책을 면밀히 재구성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조선에 함대와 병력을 파견하는가 하면 강화교섭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이 전쟁의 결과뿐 아니라 동아시아 대륙에서의 각국의 지위는 물론 전쟁 당사국들의 장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즉 19세기 말, 1890년대 일본의 침략행위는 조선과, 또는 청국과 일대일로 독자적으로 진행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의 침략정책은 제삼자인 서양 열강 세력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원’이나 ‘간섭’을 받았던 것이다. 일국 대 일국의 침략과 전쟁 행위는 이미 국제적인 사태로 바로 연결되는 이른바 역사의 세계사화의 과정에 들어 선 것이다.
패전 중국은 이 전쟁으로 20세기 전반 역사의 서막을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5년 뒤의 의화단운동은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의 배외 감정 반제국주의 감정이 민중 중심의 난동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이미 불이 지펴있던 공화·국민 혁명의 열기도 전쟁 이후 더욱 거세게 일었다. 마치 러일전쟁 중에 일었던 러시아혁명운동 전야의 양상을 방불케 한다.
청국의 패전 원인은 일반적으로 봉건적 청정부의 부패와 무능, 군대의 부패와 제도적 전략적 미숙 등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시적 분석 외에도 이 전쟁의 패전을 단순한 전쟁사의 주제를 너머 역사의 패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일찍부터 있었다. 일본의 승리는 진보의 승리였으며 나아가 그 진보는 미국의 제독 페리(Mathew C. Perry)가 안내한 결과였다. 중국은 이제 절망적 상태일 뿐 아니라 그 몽매한 반 진보성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일본과 같은 손에 의해 충격을 받아야 할 것이며 한국은 일본의 지도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들 부패 무능한 지도자들 손아래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전쟁을 전쟁에 국한시켜 개전에서 종전까지 다루면서 단절된 시기의 역사로써 해석할 때의 전형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해석은 이미 일본이 이 전쟁을 ‘의전’으로 규정하고 서양 각국에 언론 홍보활동을 시작할 때의 논리와 다름없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19세기말의 역사를 연장해서 근대사 또는 근현대사 또는 현대사라는 시대구분적 시각을 가지고 해석을 가할 때는 전쟁의 승패만을 가지고 내리는 해석과는 달리 오히려 예리하고 공평한 해석에 도달하기 쉽게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전쟁의 결과가 일본의 인민들에게 그리고 이웃 나라의 인민들에게 가져다 준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안으로는 일본이 근대적 혁신으로 국민국가 형성에 성공했으며 그 결과물의 하나로써 청일전쟁의 승리를 예시할 수 있다. 따라서 통합된 국민적 에너지의 효율적 결집과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일본군의 편제나 작전도 정녕 그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구성원인 일본의 ‘국민’은 곧 제국주의 제국의 ‘신민’으로 편제된다. 이 전쟁 이후 일본의 아이들은 목제 무라타 총을 장난감으로 삼게 된다. 군가가 동요를 대신했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깥으로는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제 민족에 대해 ‘성실함’과 ‘겸손함’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이 다. 이는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에 멈추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적어도 50년간 끊임없는 전쟁과 전장으로 이 지 역에 참화를 몰고 오는 시발점을 이 전쟁으로 인해 만들 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인한 일본인들의 사회 경 제적 고통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이 전쟁에서 이미 수 만의 일본 젊은이들이 전사했고 중국의 군인, 비전투원 수만이 죽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앞으로 50년 동안 연 달아 닥쳐 올 전화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전쟁에 이김으로써 번 돈은 그러나 거의가 다음 전쟁을 위한 군 비 확장에 재투자되었다. 중국에서의 승리는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의 ‘의화단운동’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연 합군의 보조 역할, 이른바 ‘극동의 헌병’ 역할을 떠 안고 아시아에의 압박국으로 된다. 청일전쟁에서 보여 준 실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전쟁으로 말미 암아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되었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다시 한번, 1890년대를 하나의 세기말적 기준으 로 잘라 평가한다면 모를까 동아시아의 역사를 현재까 지의 연속·단절의 문제와 결부시켜 해석한다면 이 패전 의 역사적 의미는 단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청일전쟁 후 5년 뒤의 의화단운동 뿐 아니라 이 전쟁 후 15년 뒤 에 성공한 1911년의 신해혁명은 모두 역사의 단절이라 기 보다는 연속적 의미가 강하다. 아시아에서 실질적으 로는 최초로 공화정 체제이며 반 왕조체제 혁명도 중국 근대사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난제 가 1919년의 5·4 운동과 20∼30년대의 민중운동으로 연 장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9세기 말, 아니 19세기 중 반부터 중국 근대사의 핵심문제는 언제나 인구의 90퍼 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인민문제와 제국주의의 침략문제라는 이중적 모순과 맞닿아있지 않은 적이 없 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청일전쟁 시기 중국의 인민 이란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계층적·계급적 의미를 지니 는 동시에 반 외세와 반봉건의 역사적 주체성을 지니는 ‘인민’으로 상당 기간 활성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들의 역사적 역할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은 평가하 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제도적으로는 1949년의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실제적으로는 현재의 중국에 이르는 20세기 전반 중국과의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른바 대내적 통합과 대외적 주체성을 현재 진행형으 로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신 제국주의로 등장한 뒤로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은 반 세기 동안 파죽지세의 팽창으로 '국위'를 선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 중국, 미국과 차례로 전쟁을 치른 50년간,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 인민들에게 가한 폭력은 물론, 일본 인민의 간단없는 고통과 희생은 핵 공습과 미군 점령으로 막을 내린다. 딱하게도 일본은 패전 후 또 하나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무엇이 일본의 바람직한 미래상인지 제시하지 못한 채 역사의 주체성 을 회복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 일본 역사의 실상이 있었던 그대로의, 객관적인 해석을 아직 도 받지 못하고 있는 증거는 최근의 정부 주도의 인위적 인 역사 교과서 해석에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기 때문 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첫째, 일본이 갑오농민 전쟁을 진압한다며 한반도에 자의로 파병하면서<천진 조약>이라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내세웠던 점이다. 동 시대의 역사에는 같은 역사상의 고유명사만 바뀐 채로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고유명사를 뺀다면, 한반도의 내정에 외세가 국제법적 근거를 내세우며 개입할 수 있 는 전례는 1890년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둘째, 일 본은 청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한국의 근대화 즉 조선의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개혁파를 지원한답시고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유례없는 만행도 주저하지 않았 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논리를 같이 하는 한국인들이 서슴치 않고 일본을 도왔다. ‘근대화’를 지향하는 이념적 친일파였다. 이들에게는 그러나 민족 역사의 발전에는 민족적 주체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역사 인식이 결 여되어 있었고 ‘근대화’에 관한 한 그 으뜸가는 역사적 모범 사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 알다시피 일본의 근대 화 과정이다. 셋째, 일본은 ‘동학란’으로 어지러운 한국 민중에게 유포했듯 국제 사회에서도 이 전쟁을 절망적 인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구해내는 ‘의로운 전쟁’으로 선 전하며 친일적 여론을 조성하였다. 미국의 여론은 일본 에 기울고 뻬이징과 토오쿄오 주재 외교관들은 표면적 으로는 국외 중립을 내세우면서도 청일간의 교섭과정 에서 효과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이 전략에는 국제적으 로 잘 알려진 일본의 평화주의자도 동참했고 고대 일본 이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군부 주도의 역사 해석까지 동 원되었다. 근대화된 역사학이 국제 정치에 이용되는 모 습과 이때 형성된 언론 매체망의 국제화라는 현대적 모 습이 실제 사례로 이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 로 지적할 것은 청일전쟁-시모노세키조약 당시 미국 과 일본 두 신생 열강은 정녕 협조자였으나 이후 동아시 아-태평양지역에서 양국관계는 점점 악화된다는 사실 이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새로운 제국주의 일본 이 등장함과 거의 동시에 1898년 미국 또한 이 지역에 서의 새로운 팽창주의자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하와이 와 필리핀 한국 그리고 중국은 두 신생 팽창국의 공통된 목표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두 나라의 갈등은 미국이 하와이와 필리핀을 선점함으로써 본격화된다. 일찍이 청일전쟁이 막 끝나자마자 일본이 호주를 침공하리라 는 소문이 국제 사회에 나돌았다. 일본은 일찍부터 필리 핀과 하와이를 침공, 식민지로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었 다. 미국이 남·북미 대륙을 벗어난 지역에서 지향했던 팽창의 목표지점과 동일했던 것이다. 19세기가 다 가기 전에 두 나라는 일단 자신의 영향권을 수립했고 러일전 쟁 중에는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 이익범위를 확인 했다. 바로<태프트-카츠라 밀약>을 통해서다. 이후 수십년간 미·일 양국간에는 갈등과 협상이 교차했으나 중국문제,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문 제, 미국 서부에서의 일본 이민문제 등 크고 작은 문제 들이 두 나라를 끝내는 태평양전쟁으로까지 몰고 가는 요인으로 된다. 이렇게 본다면 태평양전쟁과 전후 체제 란 19세기말에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 등장한 두 신팽 창주의의 반세기 동안의 대립과 모순관계가 전쟁에 의 해 해결된 그 결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청일전쟁이 그 시발점에 자리잡은 것이다. 한국을 둘러싸고 19세기말 에 형성된 밑그림이 21세기에 접어드는 지금의 그것과 비교해서 기본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문제이다. 만 약 피동·능동의 주체들이 고유명사만 바뀐 채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구조가 연속되고 있다면 당시의 한·일관계 의 침략·피침략·지원·간섭의 구조적 틀에 대한 올바른 분 석과 해석을 토대로 한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인 개방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해석과 관 련해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근대 한국사나 한·일관계사 의 큰 줄기를 ‘침략과 저항’ 또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이 분법적 접근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리라 생 각된다. 한국의 근대사, 특히 1894∼95년과 같은 결정적 인 시기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구조적 모순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수직적으로는 조선사회 의 누적적인 역사적 모순이 있고 수평적으로는 1890년 대의 현실적 모순이 있다. 따라서 조선 인민의 절대 다 수였던 농민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반제’와 ‘반봉건’이라 는 종·횡의 축을 전제하고 구조적으로 접근되어야 할 것 이다. 동아시아 근대에 있어서 이 시기는 총체적으로 보 아 조선의 모든 인민이 와해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속 에서, 상·하, 지배·피지배를 묻지 않고, 새로이 강요되는 인식과 세계를 맞아 사상과 행동, 나아가 인식체계의 구 조 자체를 재편성하여 가는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움직 임을 일구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기였다. 이러함에 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을 침 략 대 저항으로 단순 도식화시킨다거나, 일본과 비교하 여 ‘민족에너지의 분열’로만 규정짓는다는 것은 각 민족 사의 내재적·주체적 발전과 이에 반드시 소요되는 역사 적 도정을 부정함으로써 패배주의적 역사관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반 세기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족’ 개 념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의 역사에 존재 하지 않았던 근대사적 의미의 ‘인민(people)’이라고 불 리는 계층을 탄생시켰다. 같은 기간 조선이 경험한 역사 는 민족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인민’과 ‘국민’을 아우르 는 분열된 역사상을 맺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쟁 이전에 이미 형성된 천황제 하의 ‘신민’으로써 20세기 중반을 맞는다. 패전 이후 이들 일본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민’으로부터 ‘시민’으로 변신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 ‘신민’ 시대의 역사를 과거의 역사로 잘라서 단정할 수 있는 증거가 아직은 빈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2.독립운동 배경이 된 상해
1910년대는 일본의 세력이 극동지역 전역으로 팽창하 던 시기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시 베리아로부터 長江에 이르는 지역을 세력권으로 확장 하였는데, 이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유럽국가들은 전 쟁의 수렁에 빠져 극동지역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고, 러시아나 볼세비키정권도 여력이 없었다. 윌슨정부가 일본의 산동반도 점령을 반대하였으나, 당시 미국정부 는 국제연맹의 설립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팽창 주의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10년대 국제정 세는 한국독립운동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상해가 반일독립운동의 주요 무대가 된 배경으로는, 첫 째 국내와 가깝고 미국이나 유럽으로의 교통요충지라 는 점, 둘째 국제열강을 비롯한 각국의 외교기관이 주재 하고 있어, 외교활동을 통한 효율성이 기대되었던 점, 셋째 租界로 대변되듯이, 제국주의국가 간의 힘의 균형 상태가 유지되어, 활동공간의 확충이 가능하였던 점, 넷 째 중국·월남·인도·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세력과의 국제연대 형성의 가능성이 기대 되었던 점 등이 꼽힌다. 이와 함께 辛亥革命도 한인의 중국행에 영향을 미쳤다. 한인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중 국혁명의 성공 소식에 고무되어 망명을 결심한 경우가 많았다. 呂運亨은 “황흥과 孫文의 사진이 서울 중국인 상루에 걸리고, 혁명의 새로운 음파가 유지청년의 귀를 난타하는” 정황에서 중국행을 결정하였다. 金奎植도 압 록강을 건널 때 “신해혁명의 주도자인 손문을 만나서 일 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조국을 잃은 한인 청년 들은 신해혁명의 소식에서 희망과 기대를 발견하였다. 손문은 한인 청년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한인은 프랑스조계와 공공조계에 둥지를 틀었고, 일부는 상해 현에도 살았다. 1910년 이전 한인의 거주지역 선택에 있 어서는 정치적 판단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으나, 1910년 이후에는 일본세력이 개입할 수 없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프랑스조계가 한인의 주된 거주지로 부상 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조계가 1910∼1920년대 한인독립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한 배경으로는 다음의 사실을 살 펴볼 수 있다. 먼저 영·미와 프랑스간의 전통적인 경쟁· 견제관계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대일본 이해관계와 맞물려 한층 심화되었다. 1900년경 이래 영·미는 러시아 의 만주독점과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한반 도 점령을 묵인한 반면에, 프랑스는 영·미에 대항하는 정책의 기조 위에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만은 아 니었다. 이러한 구도는 자국이익이라는 기준에 의해 가 변적인 것이었으나, 한인정책의 한 배경으로 작용한 것 은 틀림이 없다. 지엽적인 예이지만, 프랑스는 도쿄에 체제 중인 베트남왕국 망명세력을 매개로 일본과 신경 전을 벌였다. 전 베트남왕국의 왕자 콘테(Conte)는 동경 에서 반프랑스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양국 정부의 외교 현안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프랑스조계 당 국의 한인정책에도 투영되었다. 프랑스조계 당국은 한 인독립운동에 대해 방관적 또는 지원 입장을 취하였으 며, 한인을 대일본 정보수집 및 외교활동에 투입하였다. 이는 이 지역 한인세력에게 유리한 환경조건이 되었다. 1910년대 한인독립운동이 이곳을 주무대로 전개되었 고,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곳에서 수립되어 1932년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탈출할 때까지, 프 랑스조계가 한인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던 사실에는 이같은 국제관계가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조계 당국의 입장도 상해근대사의 진전 에 수반하여 변화해 갔다. 즉 상해는 중국 공산주의운동 의 발원지였으며, 1920년대 중반 이래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의 주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환경하에서, 프랑 스조계 당국의 한인민족운동세력에 대한 입장도 변화 하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 중반 이래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침체상황은 이러한 상해의 정세변화 및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
사회주의 운동은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주역이 었다. 연해주 항일 무장투쟁도 한인 독립군이 중심이었 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옛 일이 됐다. 볼셰비키 정 부는 처음에 일본과 싸웠지만 결국 일본과 타협했다. 붉 은 군대에 편입된 한인들은 더 이상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이 아니었다(아마도 적색군에 편입된 한 인 독립군은 이제 일본편에서 만주나 연해주 잔류 독립 군과 전쟁을 벌여야할 처지가 되었다. 따라서 1940년 전 후 대부분의 독립군은 친소로 회귀했다. 스탈린의 의중 은 한국의 소련식 공산화였을 것이다). 자유시에서 만주 로 돌아간 독립군과 흩어진 독립군들은 힘든 시절을 보 냈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일본군의 간도 습격 을 피해 밀산(密山)으로 이동했고,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레닌 정부에 희망을 품고 우수리 강을 건너 연해주로 갔다. 그는 자유시 참변 전부터 적군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래서 자유시로 향하지 않고 회군하여 만주 로 돌아왔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다시 독립군을 키우려 애쓰다가 1930년 한인 공산주의자(저자는 볼세비키 파 가 아닌가 의심된다)에게 살해됐다. 서일(徐一, 1881- 1921)은 대종교 지도자였다. 2대 종사 김교헌이 그에게 3대 종사직을 물려주려 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김좌진 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을 때, 그는 최 고 지휘관인 총재였다. 자유시에서 홍범도와 지청천이 투항할 때, 서일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김좌진과 밀산으로 회군했다. 밀산으로 돌아온 서일은, 농사지으 며 전투하는 식으로 독립군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마 적 떼의 습격으로 허사가 됐다. 자유시 참변으로 수 천 의 독립군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다 도적 떼의 습격으로 남은 독립군마저 잃자, 그는 조식법(調息 法)으로 자진했다. 조식법은 호흡기관을 스스로 정지시 켜 자진하는 방법이다. 1916년 홍암 나철이 일제의 종교 탄압에 항거하여 자진할 때도 썼다. 자유시에서 저항하 다 살아남은 독립군은 흩어졌다. 사할린 의용대 지휘관 박일리아는 구사일생으로 자유시를 벗어나, 중소국경 이만(Iman, 현재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그가 이 만에서 만주 서쪽 요하(饒河) 지역으로 이동한 후 알려 진 소식은 없다. 볼셰비키 사상에 투철했던 오하묵은, 소련군 5군단 소속 ‘합동민족여단’의 지휘관이 됐다. 붉 은 군대에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연대장과 사단장이 됐 지만, 1936년 숙청 대상자가 되어 처형됐다.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강요 받고 독립군 300명과 투항한 홍범도는 붉은 군대 대위가 됐다. 홍범도의 나이 53세, 사령관 오 하묵의 나이는 26세였다. 홍범도는 살아남아야 항일투 쟁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자유시 참변때 소련에 투항했지만, 스탈린의 소수민족 말살 정책으로 중아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 곳에서 적색군에의해 암살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군복을 벗었다. 그리 고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노동하며 지냈다. 홍범도(洪範 圖, 1868-1943)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 고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다했다. 승려가 된 적도 있고 포수가 된 적도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충격을 받고서 항일투쟁에 나섰 고, 1908년에는 연해주로 옮겨와 항일 독립군을 이끌었 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과 함께 치른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그의 이름을 드높였다. 1937년 강제이주 때 그는 카작스탄 크질오르다(Kzilorda)로 갔다. 블라디 보스톡 문화활동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크질오르다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는 블라디보 스톡에서 크질오르다로 옮겨온 ‘고려극장’의 수위로 말 년을 보냈다. 그가 살았던 집 근처 거리는 ‘홍범도 거 리’가 됐다. 고려인들은 그를 장군으로 기린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 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 대 막 쓰러진다.” 이 민요풍 노래는 함경도 사람들이 홍 범도 대장을 칭송하며 불렀던 노래다. 코민테른은 어떻 게 됐을까? 1920년대 초 드높았던 세계 혁명의 분위기 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았다. 1922년 스탈린이 집권 하고서 코민테른의 역할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 은 1943년에 코민테른을 해산했다. 1934년 스탈린의 절 친인 키로프(Sergei Mironovich Kirov, 1886-1934)가 암 살 당한 후(또는 스탈린이 비밀리에 죽인 후), 스탈린을 반대한 공산당 간부들은 체포되고 처형됐다. 숙청은 모 든 분야로 확산됐다. 1937년부터 두 해 동안, 스탈린에 게 조금이라도 비판적이면 숙청됐다. 70만 명이 처형됐 고 200만 명 이상이 굴락(Gulag, 강제수용소)에 끌려갔 다.
4.비공산당계 한국 독립군 해체
한국독립군은 오의성 휘하의 시세영·史忠恒 등의 부대, 중국공산당 계통의 琿春·汪淸유격대, 한인부대와 연합 하여 중·소국경지대의 동녕현성을 공격하였다. 이 연합 부대는 1933년 9월 6일 밤 이 성을 포위, 공략하여 거의 점령했으나, 만주국군과 일본군 연합부대가 대포와 장 갑차 등 중화기를 동원한 격렬한 반격으로 한중연합군 은 결국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중연합군은 많은 적을 무찔렀지만 결국 패주하게 되었고, 적은 많은 병력 을 투입하여 계속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구국군 부대장 사충항이 부상당하는 등 중국군의 피해도 컸고, 한국독 립군도 총사령 이청천이 부상당하고 군의관 姜振海 등 수십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동녕현성 전투 이후 한국독립군은 이들 부대와 함께 대전자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이 때 참모장 주보중은 陳翰章 등 다수의 중국공 산당원과 함께 구국군 부대의 공산화와 통일전선공작 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또 유격대에는 다수의 한인 공산 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차츰 이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주보중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오의 성 부대내에서 고립되어 갔다. 여기에 연변지방 한인들 의 다수가 좌경화하여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어려 워졌다. 같은 해 8월 초 오의성 등은 한국독립군에 대해 구국군에 합류·편성될 것과 무기의 절반 이상을 넘기라 는 무리한 요구를 몇 차례나 강요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대전자령 전투 이후 전리품 분배시 발생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거부되었다. 더욱이 주 보중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독립군 장병들이 1932년 2월 龍井에서 성립한 친일반공단체 民生團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음해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몇 가지 요인으로 오의성은 산하 부대를 동원하여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하며,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을 무고하게 구금하는 사태를 일으켰다. 이른바 ‘민생단 사건’은 후일 중국공산당계 유격대와 동북인민 혁명군에 적극 가입하여 투쟁하고 있던 다수의 한인들 에게 ‘일제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한·중 양 민족 사이는 물론 서로 믿고 지내던 동지간에 도 분열과 의심을 조장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무렵 동만지역에서는 이미 유격대 안에서 소위 ‘反民生團’ 투 쟁이 전개되어 무고한 한인들이 다수 희생되고 있는 상 황이었다. 그런데 그 여파가 한국독립군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 같은 위기는 시세영 등 일부 간부들의 변호와 독립군측의 항의로 가까스로 극복되었으나, 한국독립군이 중국의용군과 결별하는 중 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구국군의 포위를 벗어나 기 위해 다수의 장병이 흩어지거나 도주한 데다가, 구국 군에 대한 반감이 깊어져 더 이상의 공동투쟁이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군은 8월 12일 경 그곳을 떠나 이후 동녕과 영안현 등 산악지대를 전전했다. 또 이무렵 간부회의를 열고 소규모 유격작전 위주로 적과 싸우며, 열악한 생존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병사들 스스로 농사 를 지으며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屯田制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이 러한 전략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한국독립군이 이처럼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관내에 있던 金九와 의열단을 이 끌었던 金元鳳 등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협조로 한인 청 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받게함 으로써 조국의 독립전쟁에 대비한 정예간부를 양성코 자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중앙육군군관학교 洛 陽분교에 ‘한국청년군사간부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의 주요 간부들과 청년 들을 관내로 이동시켜 교육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이청천이 교관겸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김구는 일찍 부터 만주지역 독립군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윤봉길·이봉창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정부 요 인들의 신임과 지원을 받고 있던 김구로서는 만주 독립 군 요원들을 관내로 이동시켜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무장투쟁의 기반과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반임시정 부 계열에서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對日戰線統一 同盟’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김구의 군사훈련계획 은 1933년 10월 초순 이규보·오광선 등을 통해 한국독 립군에 전해졌다. 이에 따라 10월 20일 경 마침내 한국 독립당 당수 홍진 및 총사령 이청천, 조경한·오광선·公震 遠(본명 高雲起)·金昌煥 등 한국독립군 주요 간부들과 병사 가운데서 선발된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등 40여 명 은 중간거점인 北京을 거쳐 중국관내로 먼저 이동하게 되었다. 이들 중 홍진·이청천·조경한 등 일부 간부는 관 내 이동 초기에는 조선혁명당과 민족혁명당 등 반임시 정부 및 反김구 계열에서 활동했으나, 나중에는 결국 통 합 한국독립당 및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 때 이동한 34명의 청년들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이 해 12월에 입학 하여 1935년 4월 졸업하였다. 관내지역 이동 직후 이들 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 다. 그러나 이들도 이후 조직된 조선의용대나 광복군에 참여하여 만주독립군의 무장투쟁론을 계승·발전시키며 관내지역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사령관 등 주 요 성원들이 만주를 떠나게 되자 사실상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崔岳과 安泰振 등이 거느 리는 일부 지대가 密山·虎林 등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 며 항전을 지속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 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이들은 얼마 후에 적과 싸우다 희생되거나 흩어져 버렸고, 일부 인사들은 중국공산당 계열의 유격대나 동북인민혁명군 등에 참 가하여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1932∼1933년 북만과 동 만 일대에서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던 한국독립군이 해체됨으로써 북만주 지역 민족주의계열 독립군의 활 동은 끝나고, 대신 적지 않은 한인들이 중국공산당 만주 조직이 영도하는 항일부대에 참가하여 무장투쟁을 전 개하였다.
5.1940년 전후 친소 친중 독립군 파벌
만주에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조직과 군대는 이미 1930 년대 초부터 중공 중앙이 아니라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 표단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33년 당시 동만특위(東滿 特委)의 기관지는 양조전선(兩條戰線)이었 는데, 이 명 칭은 왕밍(王明)이 1931년 2월에 자신의 혁명노선을 정 리해 간행한 양조노선(兩條路線)에서 따온 것이다. 왕밍 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1931년부터 코민테 른 주재 중공대표단 대표를 맡았다. 그는 코민테른과 스 탈린(Joseph Stalin)의 노선에 충실한 인물로, 1930년대 부터 중공 중앙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항일민족통일 전선론을 둘러싸고 노선투쟁을 벌였다. 왕밍은 항일민 족통일전선을 강조한 반면,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정치적·군사적 독립을 강조했다. 만주의 당조직과 군대 는 코민테른의 인민전선론과 왕밍의 항일민족통일전선 론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고, 이 같은 사상적 경향은 길동성위 와 동북항일연군에 지속되었다. 그리고 길동 성위는 일제의 대토벌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인들과 의 통일전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따 라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민족혁명의 과제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민족해방단체와 민족혁명군을 결성하고자 계획했다. 따라서 동북항일연 군의 조선인들은 일제의 대토벌 과정에서 민족혁명의 과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인정된 민족혁명 의 과제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동북항일연군이 1940년 전후 만주에서 유격근거지를 상실하고 만주국 군·경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들은 새로 당지도기관을 구성하 고, 항일연군을 중국공산당 중앙의 군사계통에 편입시 키고자 구상했다. 이 결정은 항일연군이 소련으로 넘어 가는 것을 전제로 수립되었다. 중요한 점은 동북항일연 군의 월경이 소련 극동군사령부와 교섭을 통해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 다.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과 소련 극동 군사령부의 장성들은 1940년 봄부터 9월 말까지 서신 을 통해 동북항일연군의 월경문제를 논의했다. 소련극 동군은 동북항일연군을 소련에 집결시켜 자신들의 영 향력을 강화시키고자 구상하였다. 그러나 주보중은 동 북항일연군이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부대이며, 소 련은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각국 공산당의 독립성을 존 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공 중앙의 결정을 만주에 전달하던 ‘중공상해중앙국(中共上海 中央局)’이 1935년 2월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만주성위(滿洲省委) 와 중앙당 의 연락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이후 만주의 당조직과 동북항일연군은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으 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1938년에 중국공산당 길동 성위로부터 민족혁명의 과제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 스탈린,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 표단, 왕밍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 동북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코민테른의 인민전선론과 왕밍 의 항일민족통일전선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940 년부터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중공 중앙의 당적·군사적 지도와 사상적 영향으로부터 단절되었다. 반대로 중공 중앙과의 단절은 1940년 전후 동북항일연군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이후 소련 영내에서 활동하면 서 내부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내부적 변화 는 조선인 집단의 출현과 조선인 지휘관들의 위상 변화 이다. 소련으로 입경한 이후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 은 처음으로 동일집단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만주 시 절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각각 제1로군·제2로군· 제3로군에 분산되어 활동하였다. 물론 이들은 일부나마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군사활동은 각 부대 별로 전개하였다. 그런데 남만·동만·북만에서 각각 활동 해 온 조선인들은 1941년 초 소련에 들어오면서 처음으 로 동일한 집단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입소 이후 정치·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받으 면서 점차 교도려위원회와 소련극동군으로부터 일제 패망 후 한반도에 파견할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주보중 은 극동군 지도부에 보낸 서한에서 김일성에 대해 ‘가장 좋은 간부이며 중공의 고려인동지 중 가장 우수한 분 자’라고 평가했으며, 소련극동군 지휘부도 김일성이 ‘규 율준수, 모범성, 그리고 부하 통솔력에서 뛰어남을 보였 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김일성 은 1945년 7월 말 일제 패망 후 교도려위원회가 한반도에 파견하기 위해 조직 한 ‘조선공작단위원회(朝鮮工作團委員會)’에서 군사정 치책임자 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25일, 소련 극동군이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하 기 위해 편성한 제1대대에서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전후 소련 입경은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공산 당 중앙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하는 전환점이었다. 동 북항일연군은 중공 중앙뿐만 아니 라 코민테른 주재 중 공대표단과도 연락이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 연군의 당간부들은 자체적으로 당생활을 지속하기 위 해 교도려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항일 연군의 조선인들은 당적으로 동북 항일연군교도려위원 회와 소련공산당 당조직의 지도를 받고,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소련극동군의 지휘를 받았다. 한편,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1940년 전후 중국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던 또다른 조선인 무장부대는 조선의용 군이다. 동북항일연군이 지속적으로 중국공산당과 코민 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반면, 조선 의용군은 부대 계통과 사상의 측면에서 중국 관내(關內) 조선인 독립운동세력과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함께 받 았다. 2개 무장부대 모두 중국공산당의 노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 노선의 계통도 다르다. 민족전선연맹은 조선의 혁명무력을 건설하기 위해 중 국 국민정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 다. 조선의용대는 조 선민족전선연맹이 조직한 혁명무력이었다. 조선 의용대 는 설립과정에서 공동전선체인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의 국제의용 군(國際義勇軍)으로 구상되기도 했으나, 조선 인들의 노력으로 민족전선 연맹의 군사조직으로 결성 되었다. 따라서 조선의용대는 민족전선연맹이 지향한 전 민족적 통일전선론에 따라 민족혁명을 위해 활동하 는 군사조직 이었다.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1940년 3월 부터 새로운 단계로 전환되었다. 1940년 3월부터 1941 년까지 조선의용대의 절반 이상이 화북(華北)지역으 로 북상하였다. 북상 이유는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는 화북 에 투쟁근거지 를 구축하고 동북(東北)지역의 조선무장 부대와 연합한다면 조선혁명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끌 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의 동 북항일연군이 1940년부터 소련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연합투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조선 의용대는 중국 공산당지역으로 이동한다. 조선의용군(조선의용대의 후신)의 혁명론은 조선민족 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부터 이어져 온 민족혁명론에 입각해 있다. 이 혁명의 일차적 목표는 중국혁명이 아니 라 조선혁명이었다. 그리고 동북항일연군의 통일전선론 이 코민테른 의 인민전선론에 근거한 반면, 조선의용군 의 통일전선론은 관내 조선인 독립운동세력의 민족통 일전선론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 민족통일전선론은 동 북항일연군이 영향을 받은 왕밍의 항일민족통일전선론 과 달리 조선인 독립운동세력 간의 통일전선이었다.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설립될 당시 조선의용군은 독립동맹의 영도를 받는 군대였다. 그러 나 조선의용군은 1943년부터 내부적·외부적 요인에 의 해 변화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변화요인은 조선독립동 맹·조선의용군에서 전개된 정풍운동이다. 이 정풍운동 은 마오쩌둥이 1942년 2월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전개한 정풍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정풍운동을 거치면서 조선의용군 내부의 사상적 경향 은 크게 변화하였 다. 중국공산당의 노선에 충실한 무정 이 점차 조선의용군을 장악하면서 내부적으로 마르크 스·레닌주의를 중국화한 마오쩌둥의 혁명론이 확산 되 었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노선에 입각한 왕 밍의 혁명노선 과 항일민족통일전선론은 조선의용군에 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 다. 또한 관내의 국민 당지구에서 활동해온 북상파가 점차 주도권을 상실하 면서 조선민족전선연맹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통해 계승된 민족혁명론과 민족통일전선론은 약화되었다. 1943년의 정풍운동과 지휘권 이양에도 불구하고, 조선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은 무정 등 마오쩌둥의 혁명론·계 급연합론을 주장하는 세력과 최창익 등 조선독립운동 의 민족혁명론·민족통일전선론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분 리되어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1944년부터 군정학습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화한 마오쩌둥의 신민주 주의혁명론과 계급연합에 기초한 통일전선론을 수용하 게 되었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과 달리 코민테른·스탈 린의 노선에 입각한 왕밍의 혁명론과 항일민족통일전 선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아가 조선의용군 은 신민주주의혁명론을 민족혁명의 정치노선·조직노선· 군사노선으로 설정하였고, 마오쩌둥의 혁명론과 영도 방식을 민족혁명의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조선 의용군은 1940년 이후 조선독립운동세력의 군대에서 중국공산당의 군대로 변화하였다. 이후 모택동은 친소 파와 친중 한인 독립군 잔재를 한국전에 투입하여 계파 정리를 완수하였다.
6.주보중, 가오강, 김일성—친소계
소련군 88여단의 총사령관(여단장)이자 김일성의 상관 이었던 주보중(周保中)의 이력서와 관련 문서도 이번에 구소련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주보중은 88여단에 서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서철 등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던 중국인 상관이다. 1939년부터 시작된 일본 관동 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관이었던 양징위(楊靖宇)가 전사한 뒤, 소련 경내로 흘 러들어간 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의 지휘권을 잡은 인 물이었다. 당시 그는 2로군 사령관이었다. 김일성이 북 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주보중의 후한 평 가가 결정적이었다. 와다 하루키 교수에 따르면, 주보중 은 김일성에 대해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중국공산 당 고려인 동지 가운데 최우수 분자”로 소련 측에 보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소 련공산당과 소련군 수뇌부는 88여단 총사령관이었던 주보중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적잖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주보중은 모스크 바의 국제공산당 간부 양성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에 유학했을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혀서 한 차례 출당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주보중은 마적단 출 신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장쉐량(張學良) 부자가 이 끌던 동북군의 잔당인 왕더린(王德林)의 구국군(救國軍) 에서 복무할 당시 ‘일본간첩’ 혐의로 체포됐다가 무죄석 방된 적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국군은 김일성이 자 신의 이력서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고 밝힌 부대다. 주보 중은 동료들로부터도 그다지 후한 평가를 못 받은 것으 로 보인다. 이번에 주보중의 이력서와 함께 발견된 ‘주 보중에 관한 최신 정보’란 제목의 문건에 따르면, “동북 민주연군(동북항일연군의 후신) 지도부는 주보중의 정 치적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의심한다”고 적고 있다. 이 문건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 사(니콜라예프로 적혀 있음)가 1947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은 주보중의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의심 하는 근거로,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작전 기간 중 무전기 200대를 가진 부대원 6만5000명이 국민당 부대 로 투항한 사실을 거론하며 “국민당이 주보중의 부대에 잠입했으며 주보중의 묵인하에 이런 일이 이뤄진 것 같 다”고 기술했다. 당시 주보중이 만주를 놓고 경쟁을 벌 이던 국민당과 내통했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 문건에 따르면, 주보중은 전쟁이 끝나면 사실상 만주를 중국 본토와 분할해 통치할 구상도 세웠던 것으로 보인 다. 문건은 “우리는 만주를 통치해야 한다” “마오쩌둥과 주더(朱德)는 남중국을 통치할 것”이란 주보중의 발언 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문건은 동북항일연군의 후신 인 동북민주연군에 중국을 배신한 인사가 여단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거론하며, “가오강(高崗)이 적시에 개입 한 덕분에 이들을 해임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소련 이 고평가했던 대표적 ‘친소파’였던 가오강은 후일 동북 인민정부 주석으로 만주를 사실상 장악하면서 ‘동북 왕’이란 칭호를 들었던 인물이다. 6·25전쟁 때는 만주에 서 중공군의 후방 보급을 책임지기도 했다. 반면 주보중 은 1949년 국공(國共)내전이 끝난 후 만주를 떠나 윈난 성 부주석 등 한직을 맴돌았다. 주보중과 가오강의 지위 가 뒤바뀐 데는 주보중이 중국의 소수민족인 ‘백족(白 族)’ 출신이란 점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윈난성 출신 주보중이 백족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문건 에서 스스로 밝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자필 서명 이력서에서는 자신의 민족을 ‘한족(漢族)’으로 적 고 있어 눈길을 끈다.
7.한국전 참전과 가오강 숙청
국공내전 기간에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려고 했다. 북한 은 중공군을 위해 물류이동을 지원하고 무기를 공급하 며, 부상병을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 군대도 일부 파견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 지도부의 천윈(陳雲)은 “그 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이 발발했다. 중공은 베이징에서 정권을 수립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고, 동해안과 남해안에선 국민당 잔여세 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어 안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중공 은 북한을 도울 여력도 없었거니와, 전쟁 초기에 북한군 이 파죽지세로 남하했기 때문에 한반도 상황을 지켜만 보았다. 6·25 발발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반 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내전에 중립을 유지하던 미국은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개입, 한반도에 유엔군 을 투입하고 대만해협에 미 7함대를 배치했다.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면서 중공 지도부가 당황해 했다. 순망치 한(脣亡齒寒)의 오랜 명분이 다시 부상했다. 입술이 없 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이 속담은 한반도가 적에게 넘어 가면 만주가 흔들리고 중원이 위협받는다는 중국의 지 정학적 위치를 비유할 때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는 임 진왜란 때 명군이 항일원조전쟁을 벌인 명분이 되었고, 마오쩌둥에겐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할 이유를 제공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베이징의 중공 지도부에 한국전 참전 여부에 대한 팽팽한 논쟁이 벌어 졌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중공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았다. 외교부장 저우언라이, 베이징 군구사령관 예젠 잉(葉劍英)은 참전을 반대했다. 항일 전쟁과 내전으로 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인민들이 지쳐 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 이었다. 만주를 책임지던 동북 제4야전군 사령관 가오 강(高崗)도 적극 반대했다. 그는 참전시 자기 휘하의 군 대가 한반도에 투입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펑더화 이(彭德懷)는 소련군의 지원이 있다면 참전할 수도 있지 않느냐며 마오쩌둥의 의향을 찔러보았다. 마오의 생각 은 참전이었다. 마오의 지론은 미군이 북조선군을 끝까 지 추격하면 동북(만주)이 위태로워지고, 동북이 전쟁터 가 되면 자산가 계급이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므로 출 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생각은 결론이나 다름 없었다. 참전을 반대하던 주더(朱德)도 순망치한론을 받 아들이고 참전으로 돌아섰다. 10월 8일 마오쩌둥은 펑 더화이를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100만 지원군을 한 반도로 출격할 것을 명령했다. 마오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첫 번째 이유는 순망치한이었다. 어쩌면 신생 중공 정권에 대만보다 한반도가 중요했을 것이다. 대만이 중 국영토가 된 것은 정성공(鄭成功)의 정벌 이후 300년에 불과하지만, 한반도의 역대왕조는 1,500년 동안 제1의 조공국의 위치를 유지해왔다. 마오쩌둥의 그 다음 의도 는 중국인들의 애국주의를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마오 쩌둥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을 참전 구호로 내걸었다. 국민당 정권 시절에 오랫동안 중국인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미국 숭배(崇美) 사상을 제거하 고, 미국에 대한 두려움(恐美)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중공은 공장을 풀가동해 대포와 총을 생산하고, 노동자 들에게 애국, 반미 감정을 부추겼다. 마오의 또다른 목 적은 만주에 웅크리고 군벌화하고 있는 가오강을 제거 하는 것이었다. 한국전 지원을 빌미로 만주의 군부세력 을 한반도로 빼돌려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 였다. 청나라가 멸명한 직후 만주 군벌 장쩌린-장쉐량이 대를 이어 세력화했던 사실을 마오는 예의주시했다. 가 오강은 산시(陝西)성 출신으로, 1927년 산시성 북부에 서 혁명운동에 참여하며 공산당 서북 근거지를 창시했 다. 그는 마오쩌둥의 군대가 대장정 끝에 옌안에 도착하 자 마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지칠대로 지쳐 있던 마오쩌둥에겐 가오강의 지지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가오강은 친소파였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 련의 도움을 받고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국민당 과의 내전시기에 마오는 그를 필요로 했다. 소련이 만주 를 점령하자 마오는 소련에 우호적인 가오강을 보내 만 주가 국민당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선수를 쳤다. 가오 강은 소련을 뒷배경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2차 대전 종전후 만주는 일본이 대륙침략기지로 산업화시 킨 덕분에 중국내에서 산업시설이 발달한 유일한 지역 이었다. 소련군이 관동군에 빼앗은 무기도 가오강 휘하 군대가 물려받았다. 국공내전에서 가오강의 군대가 결 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북3성의 제4야전군은 중국 전역 의 6개 군관할지에서 최대, 최고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 었다. 가오강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오의 입장에선 어제의 동지가 견제세력이 된 것이다. 1949년 8월 베이징의 중앙 정부는 만주 행정기구를 동북 인민 정부로 개편하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부주석으 로 승진한 가오강은 지역군벌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북지역의 관공서에는 마오의 초상화 대신 에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렸다. 베이징 정부가 마오 초상 화를 걸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1949년 12월 마오가 선 양에 들렀을 때 자신의 초상화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한 다. 외지인들에겐 동북3성이 중국 땅이 아니라 소련령 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북한의 김일성이 눈치챘다. 소련의 배경으로 북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 은 베이징 정부보다는 동북 제1서기인 가오강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마오로서도 국민당과의 전쟁에 주력하 기 위해 더 이상 만주에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이 후원 하는 북한의 일을 모른척 했다.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패주하면서 마오쩌둥은 참전 여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한국전 참전을 경쟁자이자, 친 소파였던 가오강의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기회로 활용 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국전에 가오강이 지휘하 는 제4야전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가오강에게 파병군의 총책임을 맡기지 않고, 그의 위에 팽더화이를 올려 놓았 다. 가오강은 자기 휘하의 군대를 한반도에 보내 팽더화 이의 지휘에 맡기고, 자신은 병참 지원을 맡았다. 제4야 전군은 한국전에서 20여만명이 사망했다. 한국전이 끝 날 무렵인 1952년 가오강은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에 지 명되면서 베이징으로 불려 들어갔다. 가오강과 동북군 근거지를 차단한 것이다. 한국전 종전 직후 1953년, 중 국 공산당 내에선 건국후 첫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만주 의 지도자였던 가오강과 화동(華東)의 군정 주석이자 상 하이 시장인 라오수스(饒漱石)가 연합해 소련의 경제발 전제도를 받아들이자며 당 지도부의 지도체제를 비판 했다.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당이 기업에 개입하지 못하 도록 해 기업을 독자책임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 며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 류샤오치(劉少奇) 등 지도부가 추진하는 집단지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군 벌화한 지방 세력과 중앙지도부와의 첫 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중공의 첫 정치투쟁에서 마오의 중앙당이 승리 했다. 마오 세력은 가오강과 라이수스를 숙청했다. 이유 는 이들이 소련과 연계해 만주 지역을 ‘독립왕국화’하려 는 기도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갓 태어난 중공 의 입장에선 청나라 말기에 지방이 군벌화한 것을 경계 했고,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던 지역 권력을 회수할 필 요가 있었다. 그 타깃이 가오강과 라이수스였다. 중공 초기 군대 관할구역을 여섯 개 지구로 개편했는데, 가오 강이 제4야전군으로 동북지역을 장악했고, 라오수스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동지역을 맡고 있었다. 두 지역 이 연대하면 중국이 다시 분열될수 있다고 마오의 당 지 도부는 생각한 것이다. 가오강은 1954년 체포되자 자살 했고, 라오수스도 실각한후 구금되었다. 가오강의 숙청 은 중국 동북지역 만주가 친소 기지화하는 것을 막으려 는 시도로 볼수 있다. 이 사건은 또 마오쩌둥이 중공의 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마오 쩌둥의 입장에선 가오강의 막강한 군대를 한국전 전선 에 투입, 약화시킨 후에 가오강을 전선에서 떼어 중앙으 로 불러 들였다가 사상투쟁을 거쳐 제거한 것이다.
8.6.25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절망 상태에 빠진 김일성은 9월 28일 노 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적군이 38선을 돌파하게 되면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줄 것과 소 련군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중국과 기타 공 산 국가들로 국제의용군을 조직, 원조하여 줄 것”을 요 청하는 서한을 스탈린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스탈린 은 10월 1일 새벽 2시 50분에 9월 29일자 김일성 박헌영 공동명의 전문을 받은 후 3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 게 “최소한 5~6개 사단의 중국의용군을 38선 방향으로 진격시켜 북한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 송했다. 상기 스탈린의 중국 참전 요청 전문을 받은 마 오쩌둥은 10월 2일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국 은 당초에는 적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의용군 4개 사 단을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지도자들과 세부 검토를 한 결과 (1) 중공군의 준비 부족, (2) 중공군 참전 시 미·중 전쟁이 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중· 소 동맹조약에 의거, 소련군의 참전 불가피하며, (3) 중공군 참전 시 미국이 중국 내 반동세력의 준동을 사주할 가능 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당분간은 의용군을 파견치 않고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군은 유격전 형태로 투쟁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스탈 린은 이에 대해 10월 5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국은 현 상태에서는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일본은 군사적 잠재력은 있으나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다. 소련을 배후에 둔 중공의 용군 참전은 한반도 문제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 국이 양보토록 압박하고 한반도가 대륙 침략의 도약대 가 될 가능성을 사전 방지할 수 있고 미국이 대만을 포 기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전쟁 참전을 촉구했 다. 스탈린은 이어 10월 8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에 서 “마오쩌둥이 10월 7일 9개 사단을 조만간 북한에 파 견할 예정임을 자신에게 알려왔음”을 통보하면서 김일 성이 적군과의 전투에서 결연히 임할 것을 촉구했다. 마 오쩌둥도 10월 8일 밤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중공 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10월 9- 10일간 중국의 북한 지원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가 여러 이유를 내세워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을 번복하려는 태 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최후 카드를 제시했다. 10월 13일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지원에 대해 미국이 중국을 공격 보복할 가능성이 없다. 지금 중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북 한은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붕괴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 은 중국 동북지역에 북한 인민군을 재배치하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계 소련인과 부상병, 노약자를 이동 시켜 북한 재진입을 위한 피난처를 각기 제공하자”고 하 면서 북한을 포기하는 최종 제의를 중국 측에 하고, 같 은 날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북한군 철수 계획을 김일성 에게 실제로 제시했다. 이는 마오쩌둥의 남침전쟁 참전 최종 결심을 유도하는 마지막 카드였다. 스탈린은 이와 같이 중국을 남침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도록 노 력을 했으며 마지막에는 북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제시해 중공의 남침전쟁 참전을 얻어냈다. 1950년 11월 미 공군이 미그기를 격추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스탈린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무렵 유엔군 전투 기들로부터 중공군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 전투기들을 남침전쟁에 파견했다. 소련은 참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투기에는 중공 국적 표지를 하고 조종사들은 중공 공 군복을 입게 했다. 그들은 주로 청천강 이북~압록강 이 남지역인 소위 ‘미그회랑’에서 유엔 전투기와 치열한 공 중전을 벌였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때까지 소련은 14 개 전투비행사단 2만6000명의 병력을 중국의 선양, 안 산, 안둥(현재 단둥) 등 중공군 기지에 주둔시켰고 총 6 만3229회 출격해 1790여 회의 공중전을 벌였으며 모두 335대의 비행기와 12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도 공개된 소련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한양대 평화연구 소는 2018년 6월 20일 김동길 북경대 역사학과 종신교 수의 ‘1950년 10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원인으로 본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시했다. 게 시된 논문은 짧았지만 중공이 6·25전쟁에 참전한 원인 과 경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소개하고자 한다. 스탈린 은 무력통일을 위한 김일성의 남침은 중국 지도부가 이 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다는 조건부 승인에 마오쩌 둥을 끌어들였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야 남 침전쟁에 참전하고 참전하더라도 중국은 북한 인민군 으로 위장해 지원군으로 참전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후 중국 내 경제적 혼란에 더해 9 월에 중·미 간 3차 대전이 일어나 중국이 필패할 것이라 는 소문이 확산되고 일본군이 만주지역으로, 국민당군 은 화남(華南)으로, 미군은 화중(華中)지역으로 진격해 중공 정권이 망하고 국민당 정부가 대륙으로 다시 돌아 온다는 변천사상(變遷思想)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중 공의 통치 기반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안보관의 영향과 북한이 우세를 점하는 기회를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7월 2일 마오쩌둥은 “미군 이 38선을 넘을 경우 파병할 것”을 스탈린과 합의하고 7 월 12일 “만일 북한이 원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할 수 있고 이를 위하여 32만 명 4개 군단이 동북아에 준비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김일성의 결정을 8월 10일까지 알 려줄 것”을 북한군 부총참모장 이상조에게 요청했다. 그 러나 앞에서 스탈린이 7월 중 중공군 파병을 촉구했다 는 비밀전문과는 달리 김동길 교수는 스탈린이 6·25전 쟁 초기 북한의 승리에 크게 만족해 마오쩌둥과 김일성 의 중공군 조기 파병 요구에 침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하자 참전에 대한 중국의 적 극성은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10월 2일 밤과 10월 3일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출병 보류를 각각 통 보했다. 그러나 10월 5일 마오쩌둥은 소련의 공중 엄호 와 무기 제공 조건으로 출병을 재결정했다. 10월 11일 스탈린이 즉각적인 공중 엄호 제공과 무기 제공에 난색 을 표하자 중국 측은 지체 없이 참전 불가를 결정했다. 중국에 있어 북한은 완충지대도 아니었고 아시아와 세 계로 공산혁명을 확산시키기 위해 출병한다는 것은 거 짓이고 오로지 중공군의 안전이 출병 결정의 핵심이었 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두 가지 일로 파병을 재차 결정 하게 되었다. 10월 10일 베빈 영국 외상이 “중국 국경과 인접 지역에는 한국군 이외의 어떠한 부대도 배치되지 않을 것”을 저우언라이 외상에게 통보했다. 이어 10월 13일 오후 개최된 정치국 긴급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 懷)가 10월 12일 연안파인 북한의 박일우 내무상으로부 터 청취한 군사첩보, 즉 맥아더 장군 지휘 하의 미군이 9 월 26일 미 합동참모부의 지시에 의거, 9월 28일 맥아더 장군이 설정한 평양 이북의 정주-군우리-영원-함흥으로 이어지는 맥아더 라인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하면 서 참전을 주장했다. 이 경우 중국은 싸우지 않고 국경 선을 압록강에서 평양 이북지역까지 확대할 수 있고 동 시에 북한군의 만주로의 전면적 철수를 방지함으로써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고 만주지역에 집중된 기간산업 을 보호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10월 19일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펑 더화이 중공지원군 총사령은 10월 20일 아침 김일성·박 헌영을 함께 만났다. 펑은 이 자리에서 소련군의 공군 지원이 없더라도 반드시 적을 섬멸해 한반도의 공산혁 명, 즉,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중공 지도부의 의지를 전달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바로 그날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점령을 완료하고 선봉대는 각 방면에서 한·중 국경 30∼40마일 전방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마오쩌둥은 10월 21일 “미군과 남조선 군대가 신속하게 대거 진격하여 중·조 국경까지 가까이 접근해 왔기 때문 에 원래의 방어 중심 계획을 포기하고 기동전을 벌여 적 을 섬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하도록 펑더화이에게 지시했다. 이로써 2년 9개월의 ‘항미 원조’ 전쟁이 벌어 지게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을 한 후 9월 28일 한국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고 북한 군이 밀리게 되자 스탈린은 9월 30일 소련공산당 정치 국회의를 소집, 협의를 한 후 외무성으로 하여금 유엔에 제출할 소련 측 정전결의안을 초안하도록 지시했다. 스 탈린은 10월 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국제 감시 하 총선 등 요지의 초안을 마오쩌둥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 련대표부로 타전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 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 치위원회는 10월 4일 상기 소련 측 결의안을 부결시켰 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 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 자주 민주국 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 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 장군의 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10월 19일 밤 중국군 이 압록강을 도강해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초 유엔주 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했 다. 이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12월 7일 한반도에서의 모 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 철 수, 한국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 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 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 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조건을 스탈 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했다. 같은 날 스탈 린은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회답과 소련 공산당 정치국 의 유엔주재 비신스키 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기 위한 시간을 벌 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우언라이가 제시한 정 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스탈린은 이어 12 월 9일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문에서 “서울이 아직 해 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 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저우언라이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요구하는 전략을 택하라”고 제안했다. 유엔 측이 다시 1951년 1월 11일 정전 제안을 해왔을 때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에게 문의, 그의 권고에 따라 유엔 측 제안을 거부했다. 1951년 6월 5일 스탈린 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반도에서 장기전 은 중국군이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트루먼 정부를 흔들고 미·영국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속도를 빠 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마오쩌둥 은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높이고 중국 내 혁명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수락할 만한 조건을 확보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 었지만 전쟁 종료 시까지 입을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상 기 스탈린의 장기전 요구에 대해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 패는 유엔군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스탈린을 압박했다. 1951년 6월 5일 말리크 주유엔 소련대사는 평화를 원한다면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 휴전협상을 가 질 것을 주소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케난에게 제안했다. 며칠 후 김일성과 가오강(高崗, 만주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의 친소인사로서 1955년 숙청됨)은 동 문제를 협의 하기 위해 스탈린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가오강을 통 해 6, 7월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는 의견을 스탈린에게 제시했다. 스탈린은 협상 개시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 대사에게 지시했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휴전 협상의 초기 단계에 마오쩌둥은 중국 측이 만족할 조건 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 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 측은 서두 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 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했다. 스탈린의 의견에 따라 조속 한 시일 안에 종결되지 않고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 상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스탈린이 죽은 지 2주일 후인 3 월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6·25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 정했다. 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던 스탈린이 죽은 뒤에 야 비로소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 체결을 위한 조 치들을 취하게 되었다. 6·25전쟁은 스탈린이 총감독으 로서 연출을 하고 김일성이 주연역, 마오쩌둥이 조연역 으로 공산국가들이 대한민국을 불시에 공격한 남침전 쟁이다. 6·25전쟁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흉계와 중 국을 적극 이용해 세계전략 차원에서 일으킨 남침 전쟁 이다. 1949년 3월 이래 1950년 1월까지 김일성이 48차 례나 남침 승인을 간청했으나 스탈린이 개전 승인을 한 후라야 남침 준비와 남침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6·25전 쟁은 ‘김일성의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전쟁’이라 할 수 있더라도 김일성이 동포에게 저지른 죄과와 책임은 가벼워질 수 없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선 상의 포성은 멈췄지만 김일성을 이은 북한 지도부가 적화통일을 공 언하고 끊임없이 각종 무력 도발을 하고 있어 6·25전쟁 은 진행형이다. 6·25 남침전쟁의 첫 번째 교훈은 대한민 국은 공산화 통일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북한의 정체를 똑바로 알고 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북한 만 바라보는 좌파정부의 친북유화정책과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주술에 홀려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의 기강이 매우 해이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집 단적으로 북한의 정체를 잊거나 잘 못 인식하고 있고 6·25전쟁 이래 그렇게 속고도 속은 줄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6·25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이들은 배우지 않았거 나 잘 못 배워 70년 전의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후대 들이 북한의 정체와 6·25전쟁을 제대로 알도록 학교와 가정에서 올바른 교육을 해야 한다. 1952년 발간 ‘대한 민국 통계연감’에 의하면 6·25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 전 사자는 22만7800명, 부상자는 71만7100명이었고, 인민 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총 12만2799명, 납북자는 8만4532명에 이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 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학 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 반 가까운 7914명이다. 최소한 그 지역에 사는 후손들은 김일성이 6·25 남침전쟁 때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고 우 리민족끼리 주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북한은 전쟁 을 통해 적화통일을 성취하지 못하자 북한에 대해 유화 적인 한국의 좌파정부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한 이후 대한민국 체제 특히 군사적 대비체제를 허 물어 적화통일을 하려는 협상을 추진해 왔다. 2018년 ‘9 월 평양선언’과 ‘판문점 선언 이행 위한 군사분야 합의 서’로 대한민국 국군은 육지와 바다의 군사분계선 인근 에서 제대로 군사훈련도 하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이후 미·북한 간에 ‘비핵화’에 대해 원칙적 합의를 했다고는 하나 용어 해석마저 달리했고 구체적 진전이 전혀 없다. 둘째, 6·25전쟁은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일본군 무장 해 제와 한반도 분단 관리를 위해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 이 1949년 7월 임무를 마치고 철수한 후 스탈린-김일성 간에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5 월 27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워 싱턴 DC의 싱크탱크 퀸시 연구소의 화상 세미나에서 주 한미군의 점진적 감축이 북한의 신속한 비핵화 이행을 위한 협상 카드의 일종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 변했다. 북한이 핵폐기를 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 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북한의 남침을 초래해 대한민국 의 안보와 발전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어 극히 경계해 야 할 일이다. 지난 6월 16일 북한이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공동연락사무소룰 폭파하 고 ‘말 폭탄’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좌파 정부가 북한과 의 각종 교류를 제시하고 정부 고위인사가 주한미군 철 수를 제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대한민국에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유비무환의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 이 남침전쟁 승인을 48차례나 간청했을 때 중국을 약화 시키려는 전략에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후 자 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승인했고 마오쩌 둥도 스탈린과 김일성의 남침전쟁 지원을 요청했을 때 이데올로기적 유대와 실질적 국가이익이 충돌하지 않 을 경우 이데올로기적 유대를 내세워 정책 결정을 내세 웠으나 충돌할 경우 자국의 이익을 내세워 남침전쟁 파 병을 거부했다. 6·25 남침전쟁 전쟁 개시와 협상을 통해 확인된 것은 모든 국가에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고 국가 안보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대 한민국과의 평화적 공존을 거부하고 공산화 통일을 포 기하지 않은 대남전략 하에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협하 는 대량살상무기를 실전배치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위협을 막을 수단이 충분치 않다. 한국군 당국에 의하면 지난 해부터 증대되고 있는 이른바 ‘신종무기 4종 세 트’로 불리는 북한의 새로운 방사포(다연장로켓)와 미사 일을 막을 ‘한국형 아이언돔’ 개발이 3~4년 늦어져 2026~2027년까지 요격할 수단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당 연히 스스로의 힘을 강화하면서 우방 동맹국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 한국 정부는 6·25전 쟁에 참전한 피아를 모르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문 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시 진핑이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18차 대회에서 총서기 로 선출된 직후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의미한 뜻 으로 선언한 중국몽(中國夢)이 중국만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꾸는 꿈이 되기 바란다고 하면서 친중 정책 인상을 줬다. 중국은 중국몽을 발표한 이래 주도면밀하게 경제 력과 군사력을 꾸준히 구축했다. 위협을 느낀 미국은 2018년부터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견제에 나섰다. 동년 10월 4일 펜스 미 부통령은 제 2의 대중국 냉전을 선포했고 2020년 중국 우한발 코로 나 사태로 미·중 간의 신 냉전체제는 격화되고 있다. 신 냉전체제가 격화되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고 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 기 대응 위주의 연합방위체제와 전략자산의 조기 전개 등 미국의 확장 억제책(Extended Deterrence)이 적시성 있게 실행되도록 구체적 협의를 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우리 역사넷
자유시 참변 이후 박효원
해방 후 세계사 교과서 중국근현대사 관련 서술 변천 손 준 식
80년 만에 찾아낸 6·25 전범들의 이력서 이동훈
한국전 참전과 가오강 숙청 김현민
스탈린, 중공군 참전을 끈질기게 설득 송종환
1940년 전후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의 변화와 중국· 소련 관계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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