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슈펭글러의 저서에 포함된 가정들은 과거의 분석과 현재의 평가 를 기반으로 한다. 슈펭글러는 인류 역사상 총 8개의 문명이 있었 다고 주장하며, 문명을 탄생-성장-쇠퇴-사망하는 생명체로 봤다. 문명은 이전에 존재했던 ‘고등 문화’의 결과로, 고등 문화가 완성 되고 끝나는 지점이다. 슈펭글러는 로마 역사와의 비교를 통해, “몇 세기에 걸친 보편적 역사의 한 단계”인 서구 문명은 이미 전성 기를 지났고, 종말에 가까워졌음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제는 종말 이후 무엇을 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펭글러가 이런, ‘조기 몰락’이라는 진단을 내린 근거는 무엇일 까? “인류가 살아있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에서 멀어지고 있으 며, 우주적인 감정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슈펭글러가 내세운 ‘조기 몰락’의 근거다. 이는 ‘이성의 횡포’에서 비롯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이 문구를 통 해 자아성찰적 의식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을 통해 편견, 반계몽주의 등 자유 의지의 방해요소 들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하며, 인류를 운명의 길로 내몰았다. 그 들은 인류가 속한 생명체 전체에서 인류를 고립시켰다. 인류가 가 진 감성과 고유성을 무시하면서 인류의 본질을 훼손하고 변질시 키는 동시에, 인류는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명분을 내세워 인류 에게 역사를 만들어내는 고독한 의무를 지웠다. “지성이 삶의 무의식적인 경험들의 대체재”가 될 때, 인류가 자연, 우주, 그리고 자신이 속한 생명의 거대한 표현으로부터 단절되고 그 모든 것을 개념과 법칙으로 만들어 ‘이해’하려고 할 때, ‘죽음으 로 향하는 형이상학적 전환점’이 나타난다. 이것은 질은 무시한 채 양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속삭임을 분류하고, 변화시키고, 개 발해야 하는 현실로 바꾼다. 인류는 경이로운 대상이 뿜어내는 빛 보다 인과관계의 냉정함을 선호하게 된다. 그렇게 문명인은 아름 다움을 파괴하고, 자신을 메마르게 만든다. ‘정신적으로 해로운’ 추상의 승리는 이 문명의 쇠퇴를 의미한다. 과거에 “파우스트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힘과 생명 창조를 향한 가장 강한 의지를 표현”했을 때, 인류는 위대했다. 그러나 인류는 다양한 감성을 버리고 각종 법칙, 과학적 지식, 경제적 합리성을 선택했다. 인류의 행복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낸 운명적인 일탈 이었다. 그러나 사실 “인류는 동물학적 개념 또는 의미 없는 단 어”다. 슈펭글러는 인류라는 통일된 단위(추상적)는 없고 오직 민 족(구체적)만이 있을 뿐이며, “민족은 언어적, 정치적, 동물학적 단 위가 아니라 정신적인 단위”라고 말했다. 같은 ‘피’, 같은 ‘종’을 가 진, 그러나 유전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같은 피와 같은 종을 가진 단위를 뜻한다. 민족은 근본적이고, 유일하고, 비교 불가한 하나의 흐름이 구현된 실체로, 더 낫고 모자란 것이 없이 모두가 절대적으로 다르다. 다 시 말해, 자신이 속해 있는 주변 환경과 관련된 가치, 선호도, 살아 가는 방식과 느끼는 방식의 본능적인 총합체로서, 공동의 정체성 과 ‘혼’을 공유하는 단위다. 이 ‘혼’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다른 방식은 절대로 개입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방식을 결정한다. “유 럽인의 장점은 아랍인이나 일본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에서 사라진다.” 외국인은 열등하지도 우등하지도 않은 그저 외국 인일 뿐이다. 다른 인간. 극단적인 타자성을 가진 인간. “세상에는 문화의 수만큼 도덕의 수가 존재한다. 딱 그만큼이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모든 문화는 각자 완전하고, 독립적이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견고하고, 그리고 개방되는 순간부터 변질하고 타락한다. 외국인 에 대한 거부감은 증오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심지어 타자성에 대한 존중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모든 ‘종’에는 고유한 가치와 생 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그 것의 ‘진실성’을 논할 필요도 없다. 슈펭글러는 ‘문화들’을 서열화 하지 않고 다만 그 주기를 설명했으며,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자 면 각 문화가 ‘본질을 보존’할 수 있을지의 가능성을 주기와 관련 해 분석했다. 슈펭글러는 ‘생명론을 표방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상대주의자였다. 그리고 슈펭글러는 생명론자이자 상대주의자였 기에, 반민주주의자이자 반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몇 달 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자, 제도권 어용지식인의 종 결자로 통하는 칼럼니스트 자크 쥐리야르는 <피가로>에 사르트 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을 쏟아놓았다. “형편없는 소설가, 차 마 무대에 올릴 수 없는 망작만 내놓는 극작가, 말만 장황할 뿐 독 창성은 찾아볼 수 없는 철학가. 사실상 그는 모든 독재정권을 예 찬한 절대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모든 살육을 정당화한 고매하신 영혼이다. (...) 자유주의 정권을 엄혹하 게, 때로는 광적으로 대했으며, 작가로서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는 것을 마치 지적 안이함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처럼 여기던 자의 적 사기꾼이다. 사실상 사기는 그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 자들을 양산한 유일한 분야이기도 하다.” 대체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이 사르트르를 비판하는 것일까? ‘사르트르를 위한 정치적 변론’에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의 작품을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그의 작품이 지닌 오류나 극단성, 약점만이 아니라 탁월함, 타당함, 시의성까지도 고루 평가하는 것 이리라. 시의성이라니 뜬금없다고 생각하는가? 참여지식인이라 는 모델이 오늘날 시대착오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 자랑스러 운 일은 아니다. 1983년, 사르트르 타계 3년 후 피에르 부르디외 는 지식인의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지식인을 빛내주던 (...) 모든 시대적, 구조적 상황은 오늘날 사라 져가고 있다. 국가 관료주의의 압박, 언론과 문화시장의 달콤한 유혹은 지식인의 장, 지식인을 재생산하고 온전히 평가하는 고유 의 장으로부터 자율성을 빼앗았다. 이런 현실은 사르트르식 지식 인 모델에 담겨 있던 희귀하고 소중한 가치, 실질적으로 ‘부르주 아적’ 규범에 맞서는 가치를 위협한다. 그것은 세속적 특권(일례 로 노벨상)과 권력은 거부하고, 모든 한시적 권력에 맞서 당당히 ‘아니요’를 외칠 수 있는 지식인 고유의 특권은 긍정하는 태도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지켜볼 수 있는 사르트르를 향한 거부는 동전의 양면 처럼, 밝은 빛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TV 화면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비양심적 사이비 지식인들. 그런 이들 에게 사르트르는 오로지 자신의 사상과 연구, 저술, 결단에 의해 서만 지식인이 될 수 있을 뿐, 결코 잦은 방송 출연과 넓은 인맥으 로 지식인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 제는 시대가 변했다고, 사회 투쟁과 권리 주장은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용인할 수 있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에게 이 런 말을 해주고 싶다. 결코 나지막하게 ‘좋아요’를 속삭이는 것만으로는 공익을 위한 어 떤 변화도 끌어낼 수 없다. 모든 변화는 단호하게 ‘아니요’를 외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모든 투쟁의 시초에는 언제나 거부가 존 재했다. 사르트르를 거부하는 지식인과 언론인들도 내심 이 사실 을 잘 알고 있다. 사르트르의 말을 왜곡하고, 수치스럽게 억압하 는 것은 모든 관습과 권력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 를 훼손하는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말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게 만들어, 결국 본래 말의 뜻을 왜곡하려는 처사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했듯, 진정한 지식인의 책무란 때로는 말을 ‘장전된 권총’처럼 사용하는 데 있지 않은가.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2. 전제정과 민주정
민간분야에 대한 통제 강화는 시진핑 시대의 특징인 당의 주도권 강화 성향과 일치한다. 2017년 수정된 당의 헌장은 “정부, 군대, 사회, 학교, 중국의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당이 영도한다”라고 강 조했다. 이로 인해 공산당 기본 조직인 세포조직이 더 많은 기업 내부에 설립됐다. 2012년 3월, 공산당원의 인사를 총괄하는 중앙 조직부는 민간분야를 “철저하게 포함시킬 것”을 촉구하는 강령을 발표했다. 2018년부터 중국 내 상장기업은 사내에 공산당 세포조 직을 의무적으로 설립해야 한다. 이미 중국 대기업 500곳의 92% 에 세포조직이 존재한다. 공식적인 정확한 수치는 존재하지 않지 만 꾸준히 유출되는 자료들에 의하면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 내 부에 상당수의 당원과 세포조직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상황은 당국가 체제가 이미 통제하고 있는 광범위한 경제 영역을 넘어서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규 율감사위원회로 대변되는 중국 공산당 규율 기구는 당의 규칙을 위반하는 당원을 사법 제도의 틀 밖에서 처벌할 수 있다. 부패 척 결 운동으로 당 규율 기구의 권한은 더욱 강화됐다. 이런 시류에 발맞춰 비판과 자아비판의 장인 ‘민주생활회의’는 ‘부패한’ 또는 ‘당에 충성하지 않는’ 간부를 숙청할 권한을 갖게 됐다. 간부와 당 원의 ‘사상적 순수성’ 뿐만 아니라 조직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 을 확보하기 위해 이처럼 마오쩌둥 시절의 전통적인 관행이 재활 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세포조직은 기업 내부에서 조직원을 모집하고 자체 교 육 또는 사회·문화 활동을 조직하는 부차적인 역할만 수행했다. 하지만 이제 당의 강령은 “중국적인 특색의 현대적인 기업 시스 템”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이 인사결정권을 갖는 원칙에 찬성할 것”을 민간 기업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요구가 앞으로 어 떤 구체적인 형태를 띨지 예상하기는 이르지만 중국 공산당이 지 휘하는 중국공상업연합회의 예칭 부회장은 민간기업의 인사 관 리가 당에 귀속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예칭 부회장은 “경영자가 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승진시키는” 상 황을 막기 위해 고용과 해고 시 세포조직의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는 또한 기업 내부에 당이 지휘하는 감 독·감사 조직을 설립해 기업이 법을 준수하도록 살피고 직원들의 규율 위반과 “일탈 행동”을 관리하도록 권장했다. 이제 규율 기구 는 비당원을 포함한 모두에게 확대 적용될 것이다. 새 강령에 의하면 모든 상장기업은 세포조직의 선도적인 역할을 기업 정관에 공식적으로 명기해야하며 세포조직의 활동을 위한 전담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이는 당의 요구사항을 법제화해 당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기업에서도 강제력을 갖게 하기 위해 서다. 민간 기업의 운영 방식은 점점 국영 기업의 운영 방식을 닮 아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처럼 기업 내에서 존재감을 강화하는 한편 자본 주의자 영입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당의 생존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며 광범위한 실용주의 노선 혹은 사상적 공백 때문 일 수도 있다. 이 비대칭적인 동맹은 해외에서도 관찰된다. ‘일대일로(一 帶一路, 육·해상 신실크로드)’ 사업은 중국 민간기업과 국영기업 의 해외진출을 촉진시키고 있다. 이 기업들은 직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해외에 공산당 세포조직을 만들고 있다. 마오쩌둥의 국제주 의를 포기한 중국 공산당은 이제 조직 방식과 규율 수단을 수출하 고 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미국과 나토가 취하고 있는 이런 우크라이나 전략에 대해, 전문가 들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하나는 바이든 행정 부 스스로 ‘중국 문제를 미국이 직면한 ‘21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 적 시험’(블링컨 국무 2021년 3월)으로 규정하고도, 중국과 러시 아의 협력을 방치 및 조장함으로써 전략적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 이다. <포린 어페어스>의 편집장을 거쳐 칼럼니스트와 뉴스 진행자로 대중적 영향력이 큰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전쟁 직 전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략의 핵심 규칙 중 하나는 적을 분할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 외교정책은 반대로 가고 있다. 2월 초 러시아와 중국은 5,000 단어가 넘는 문서(2월 4일 베이징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한계 가 없는 우정(Friendship with no limits)’을 확인했다. 두 강대국은 반세기 만에 그 어느 때보다 친해진 것 같다.” 매튜 버로우스(Matthew J. Burrows)와 로버트 A. 매닝(Robert Manning)도 중러 협력은 중국과 러시아에게 ‘세계 질서를 바꿀 기회’를 준다고 주장해왔다. 스코크로프트(Scowcroft,전 국가안보 보보좌관) 전략 이니셔티브와 애틀란틱 카운실(Atlantic Council) 의 선임 연구위원인 이들은, ‘미국은 이중의 냉전을 감당할 수 없 다(The US can’t afford a double Cold War, FP, 28.Mar 2022)’라는 제목의 글에서, 80년대 말~90년대 초 소련의 해체, 독일의 통일과 같은 격변의 시기에 미국이 취한 정책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임스 베이커 (당시) 국무장관은 미국의 영향력 행사에 매우 신 중하고 정교했다. 미국은 상대방에 대한 ‘전략적 공감(Strategic sympathy)’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방이 인식하고 있는 이해관 계 △레드 라인 △최소한의 요구 사항 등을 파악하고 미국과의 차 이점을 조정하면서 지속 가능한 해법을 찾았다” (그에 반해)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것보다, 냉전 또는 러시 아와 중국을 상대하는 더 나쁜 냉전의 반복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로버트 죌릭 전 세계은행 총재(부시 2기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으로 대중 정책을 총괄함)가 미국의 대중 ‘결별 (Decoupling)’ 정책은 미국의 지도력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듯,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이 직면할 이런 딜레마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1972년 닉슨이 중국을 전략적으로 포용하기로 한 것도, 미국의 힘만으로는 세계 질서 유지에 한계가 있었기 때 문이며, “(미국이 중국과) 결별한다는 게 본질적으로 (미국이 기대 하듯) 중국의 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 은 미국이 요구하는 질서에 마냥 협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 조한 바 있다.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전략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착각’이다. 세계가 전쟁 반대와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단합돼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의 미국 담당 편집인 에드워드 루스 (Edward Luce)는 “서방의 착각은 처음이 아니다”라고 비꼬았다. 여기서 ‘착각’이란, 자신들의 통합된 대응을 세계적인 합의로 여 기는 것을 말한다. 루스는 3월초 유엔총회 결의 표결이, 서방과 미 국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말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유엔총 회 특별결의는 193개 회원국 중 141개국, 약 73%가 푸틴의 노골 적인 국제법 위반을 규탄했다. 하지만, 루스는 기권한 35개국과 불참한 12개국, 총 47개국 중 중 국, 인도, 베트남, 이라크,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은 지역 강국들이 며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국가들은 명분상 러시아에 반대하지만, 러시아와 대결하는 위험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스는 이런 ‘세계의 양면성’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무시한 채 도덕적 리더십과 단합된 대응을 외치는 미국 등 서구는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첫째, 미국의 위선에 대한 반발이다. 특히 이슬람 세계의 많은 사 람들은 이라크 아프간 등에서 그리고 코소보에서 미국과 나토가 벌인 전쟁과 우크라이나에서 보여주는 이중 잣대에 지지를 보이 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서구의 민주주의적 가치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서구의 편협적이고 성급한 판단에 불과하며, 비교적 중립적인 인도도 동의하지 않고 있다. 세 번째 미국 서방과 달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제재에 분개하고 있다. 루스는 푸틴에 반대하는 것이 미국 서방의 일방적이고 자의적이 며 이중적인 잣대에 근거한 제재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 했다. 실제로 전 인도 국가안보보좌관(former National Security Adviser to Prime Minister) 시브샨카 메논(Shivshankar Menon)은 ‘자유 세계라는 환상: 민주주의는 러시아에 맞서 진정 단결을 보 여주고 있는가?’라는 기고문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인도를 포함한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 중 상당수는 미국이 주도 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캠페인에 지금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심 지어 침략을 명시적으로 규탄하지도 않았다. 전쟁은 ‘자유 세 계’를 통합하기는커녕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냈다. 여하튼 세계 질 서의 미래는 유럽의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의 경쟁에 의해 결정될 것인데,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 지역에 대한 영향에서 제한적이다. 많은 국가들이 러시아를 비난했지만, 모두가 그 비난에 동참한 것 은 아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3. 존재와 당위
중국과 미국이라는 세계 자본주의의 두 거점은 (무역, 금융, 기술 분야에서)극도로 상호 의존적이지만 치열하고 지속적인 전략적 경쟁 관계에 있다. 중국은 “정치적 힘으로 경제 법칙을 수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라고 말하지만 미국은 국가 권력의 당위성을 회복중이다. 국가 안보 수단의 전략적 이해와 초국적 금융의 이 해, 이 둘 사이의 모순이 커질수록 미국은 내몰리고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대외 경제 정책의 핵심목표로 삼아온 ‘세계적 자유화’를 포기하고, 보호무역주의와 개입주의 국가로 회귀해야 하는 상황 으로 말이다. 지난 6월 3일, 조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이 복합체와 관련된 중국인 또는 중국 기업과의 거래를 범죄로 규정한 트럼프 행정부 의 행정명령 13959호를 갱신 및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앞 선 2021년 4월 8일,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은 “미국의 국내 안보 와 대외정책의 이해에 반하는 활동을 벌인” 단체 목록에 중국 슈 퍼컴퓨팅 기업들을 추가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공급망’에 대한 백악관의 한 보고서는 “반도체 생산과 어드밴스드 패키징 (Advanced packaging, 칩의 구성을 최적화해 면적을 줄이거나 성 능을 높일 수 있는 기술-역주), 전기자동차 배터리와 같은 대용량 배터리, 필수 광물 및 물질, 의약품 및 원료의약품(API)”분야에 대 한 미국의 취약성을 평가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경제 및 국내 안보의 기반을 이루는 6개 산 업분야 즉 방위산업, 공공의료, 생물학적 제제(생물체 유래 물질 이나 생물체를 이용해 생성시킨 물질을 함유한 의약품-역주), 정 보통신기술, 에너지, 농업용 원자재 및 식료품 생산을 위한 운송 및 공급망 분야”에 주목했다. 2021년 6월 8일, 미 상원은 ‘미국 혁 신경쟁법’을 가결했다. 미 양당이 공동 지지한 이 법은 5년에 걸쳐 첨단기술 분야의 연구개발에 2,500억 달러 지원을 예고한다. 자본의 논리(당위)와 국가의 논리(존재)의 대립. 이 상황은 19세기 말 최초의 자본주의 세계화를 막은 조건들을 상기시킨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의로운 엘리트들이 쫓겨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앤 애플봄의 저서 『저무는 민주주의(Twillight of Democracy)』(2020)에 잘 표현돼 있다. 세상이 엉망진창인 가운데 트럼프가 그 상징으로 부상한 사 태는 엘리트 지도층에게 일종의 종말적 사건이었다. 애플봄은 지 성인들이 함께 협력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세계화와 시장주의의 선한 목적에 동의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 최고조의 즐거움을 만장일치로 만끽했다. 하지만 오늘날 “지성인 들과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저자 자신 의 친구들까지 포함한 일부가 “지성인들과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 트들”에 맞서고 있다. 잘못된 사상이나 비정통 엘리트에 관한 문제는 복잡미묘한 일이 다. 애플봄은 1927년의 베스트셀러에 등장한 두 개의 단어로 이 문제를 묘사했다. 첫째는 “반역(Treason)”, 둘째는 “배반 (Betrayal)”이다.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뜻을 달리하는 것 이 잘못된 것인지, 또 중대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 만 지금까지 신성시돼온 “능력주의(Meritocracy)”와 관련된 문제 임은 분명하다. 한 사회가 엘리트를 선택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고 우리가 그 엘리트를 믿는 것은 애플봄의 믿음과 똑같다. <워싱턴 포스트>에 등장하는 논설을 얼마든지 찍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 다. 애플봄은 지성인들이 1999년 호황의 행복감이 아닌 다른 것을 신봉한다면, 지성인으로서 능력주의의 소명을 배반하는 것이라 고 주장한다. 위에서 내가 인용한 히스테리에 찌든 이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문제나 변화의 기류, 이로 인해 사람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 로 선택한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MAGA에 관한 저술활동이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활발했고, 지난 4 년간의 전반적인 추세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주로 ‘트럼프 지지 자들은 백인 노동자계층이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이었다. 트럼프 세력에 대한 분석은 TV 뉴스만 틀어도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들이었 다. 따라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트럼프 지지자를 심각한 문 제로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왜 문제 인가, 필자가 주장하는 반트럼프 히스테리 정서가 폭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보진영의 히스테리는 현실을 반영한 히스테리가 아니었다. 트 럼프 시대 진보진영이 가졌던 두려움의 특징은 판타지 소설과 같 았다. 러시아의 우위, 검열과 독재시대의 도래 등등. 트럼프 행정 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나르시시즘과 무능력이었지, 교활한 책 략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스스로 재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 다. 그 자리에 다른 정치인이 있었다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그런 기회였다. 한편 다수의 대형 신문사들은 트럼프 시대에 더 발전했 다. 이들은 뉴스의 객관성을 자랑스럽게 포기하는 것으로 진실이 더욱 드러난다고 믿었다. 또 진보주의자들은 지도자들의 감시국 가 체제를 용인했고, 주류가 아닌 정치적 시각을 철저히 외면했다 (당위). 민주당 지도자들은 지지자들 사이의 히스테리를 말뿐인 것으로 여기고 결코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또 트럼프 재임 기간 중 지나치게 방만한 국방예산을 승인했다. 그들은 트럼프가 제2의 홀로코스트를 획책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자살 행 위 같은 소리를 그만하라고 했다. 의사당 주변에 담벼락을 쌓는다 든가 경찰력을 늘린다든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민주당은 미래 에 발생할 수도 있는 권위주의 태동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양 당 합의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업의 돈줄을 퇴출시키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내가 말하는 히스테리는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TV광고에 의한 현상만이 아니다. 꽤 사려 깊은 사람들의 현상이기도 하다. 그 히 스테리적 두려움에 따른 실체적 악몽의 구성 요소들은 다음과 같 다. 무지함이 유행처럼 번진다는 두려움,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상 태, 사회기관 및 엘리트 집단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졌다는 두려 움, 하위질서에서 시작된 권위주의의 유혹이 문명국가를 위협한 다는 두려움 등이다. 이미 벌어진 것처럼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덮쳤다. 그리고 금융계, 언론계, 학계 종사자들 그리고 백인 엘리 트들 모두 타오르는 히스테리의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같은 현상은 너무나 자명해서 굳이 이해를 위해 독일 나치를 연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저서 『문제는 사람들이 아냐(The People, No)』에서 묘사했듯, 이미 벌어졌던 두 번의 히스테리 사례를 참 조하면 알 수 있다. 노동계층의 오만함과 더 정확하게는 포퓰리즘 에 대해 미국이 공황적 발작을 보였던 이유도 히스테리 때문이었 다(아래 두 사례는 당위). 첫 번째 사례는 1896년 여름에 찾아온 히스테리다. 당시 노동자를 위한 정당으로 창설된 인민당(Populist Party; 인민주의를 파생시 킨 정당)은 엘리트주의를 배격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윌리엄 제 닝스 브라이언을 지지했다. 믿음이 가는 좌파후보는 아니었지만 인민당과 민주당의 연합전선이 마련되면서 브라이언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매우 커보였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밑 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개혁하겠다며, 미국의 금본위제도 탈퇴를 공약으로 내세워다. 숨죽이는 상황이 초래됐고 드디어 히스테리 가 나타났다. 당시 언론계, 금융계, 학계가 한목소리로 “이제 미국 은 무정부 상태와 지불거부 상황에 직면했다”라며 야단을 떨었다. 이들은 브라이언을 악마처럼, 혁명 전사처럼, 자코뱅 당원처럼 묘 사했다. 또 정신병자나 다름없는 시골촌뜨기들을 상대로 한 인기 영합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브라이언을 후보로 선택한 민주당 내 의 고위 지도자들도 브라이언을 반대했다. 동부 엘리트들 또한 만 장일치로 브라이언을 미워했다. 이유는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정통금융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1930년대 중반에 되풀이됐다. 당시 미국은 사회주의 적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중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2년 대공황의 와중에 당선되면서 실직자들에게 직업을 제공 했고, 월가를 규제했으며, 노조를 합법화시켰다. 또 미국은 금본 위제도에서 탈퇴했다. 미국의 기득권들에 루스벨트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히스테리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언론계, 금융계 등 의 법률 및 경제 엘리트들이 힘을 합쳐 대통령에 대해 고소장을 이어갔다. 그들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공산주 의자이자 미치광이 선동가였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자유와 그들 이 향유해온 위대한 ‘노멀’, 즉 미국의 자유기업 시스템을 파괴한 사람이었다. 루스벨트가 속한 민주당 리더들도 비난에 동참했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대통령을 반대하기 위해 공포감을 조장하 며 1936년 대통령 선거일이 임박한 가운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X일 남았다”는 제목의 전면 광고를 매일 게재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임무 완성, 여정 끝인가? 그렇 게 여기고 싶은 듯하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 그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정치방식을 바꾸겠다”, “국가분열을 막겠다”, “청년들이 공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다” 등등. “변화는 더 빨리 이룰 수 있다”는 의지로 지나친 야심을 정당화했던 그는, 대통령 이 된 이후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변명을 계속 반복했다. 회 고록 초반, 사회운동가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버락 오바마는 감격 에 차서 말한다. “나는 산초 판사가 아닌 돈키호테였다.” 하지만 백악관에서는 그 정의의 사도는 사라진 채, 메마른 잔상만 남아있 었다. 버락 오바마가 자기 측근들의 선택을 정당화하느라 분주했던 챕 터는, 그의 임기가 어떤 식으로 요약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하 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경제위기와 금 융위기를 변화의 계기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시스템을 원래대로 고쳐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 았을까. ‘상황이 이미 너무 나쁘네.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길 원하 는 사람과 일해선 안 되겠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람 이 매뉴얼은 힐러리 클린턴을 지원했고, <월스트리트 저널>과 가깝 게 지내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하지 않았던가? 이때 상황을 오바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계경제가 추락할 때, 나의 첫 번째 임무는 세계경제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아니었 다. 더 큰 규모의 재앙을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위기를 관 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 패닉에 빠진 시장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 람이 필요했다. 이 사람들은 원래대로라면 지난날의 과오로 비난 받아 마땅한 이들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오바마 전 대통령은 단 순한 자본주의 체제 순응자가 아니었던 당시 재무부 장관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티모시 가이트너 당시 재무부 장관이 “람 이매뉴얼만큼 금융위기를 이해하고 세계 금융 자본가들과 함 께 친분을 맺으려면 몇 달이 필요했다. 당시 나는 몇 달을 기다릴 수 없었다”라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존재).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4. 자유의지론과 결정론
개인,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와 발전에 기반해 세상을 바라보 는 합리적 인본주의는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 적 권리, 자유, 평등은 문학과 추상에서나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의 분열, 욕망의 폭 발, 끝없는 물질만능주의, 들끓는 불안감을 먹고 사는 “돈의 힘을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 “지적 긴장감은 더 이상 이완과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가 아니다. 진정한 놀이, 삶의 즐거움, 기쁨, 취 기는 우주적인 접촉에서 탄생하지만(생명의 거대한 움직임에 합 류할 수 있는 능력), 이제 우리는 자연을 알지 못한다.” 본능에 충 실하던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녹아 사 라지고, 그 자리는 무색무취의 범세계주의가 차지한다. “진심으로 믿는 종교”는 사라지고 모든 것, 심지어 생명 탄생과 관련해서도 수지타산을 생각한다. 우리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찾 지 못한다. 문명인은 뿌리를 잃고 메말라가고, 자본의 노예로 살 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자유 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그것은 착 각이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언론이고, 언론은 돈을 위해 일한다. 결국, 문명인의 특성, 나아가 문명인의 합리성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시기가 온다. 끝없는 의심에 빠지고, 마지막 확신마저 사라진다. “문명에 최종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마지막 투 쟁, 즉 돈과 피의 투쟁이 시작”되는 시기다. 서구는 몰락하거나, 서 구를 재생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손에 넘어간다. 이것이 바로 슈 펭글러가 바라는 것이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5. 사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이들의 반응도, 이 같은 점진적 변화와 연관이 있다. 사회적 합의, 미디어 속 표상, 정치적 수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통해 정치 스펙트럼 전체의 우 경화를 위한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크라이 나 전쟁 자체의 여파와, 그것이 유럽 내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사 실 오래전 시작된 나토와의 통합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 것뿐이라고 봐야 한다.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그들 스스 로에게 중대한 결과를 안겨줄 뿐만 아니라 유럽, 나아가 전 세계 의 국제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나토 가입과 함께 북유럽식 진보적 국제주의가 막을 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핵심적인 국가 정체성으로 스웨덴은 중립주의를, 핀란드는 실용 주의 노선과 정치적 현실주의를 꼽는다. 과거 핀란드는 냉전의 극 복을 위해 한층 적극적이고 독창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해야 했다.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렸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준다.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은 자국이 동과 서를 이 어줄 가교 역할을 하리라고 확신했다. 두 진영이 통합될 때를 대 비한 규범적 기반 마련, 신뢰 구축, 무장해제를 통해 안보 딜레마 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냉전 시기 북유럽 국가들이 다자간 안보협의체를 구축해 대외관계에 대한 공동의 이해관계 및 연대성을 추구했던 것과, 오 늘날 나토 가입을 신청한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번 결정은 사회 를 군사화하고, 나아가 무력을 통해 전쟁을 예방할 수 있을 거라 는 새로운 신뢰 체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토의 확대는 분쟁 당사국들이 합리적 판단을 내릴 거라는 막연한 전제를 토대 로 억제 이론(특히 핵 억제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자리를 잃고 말았다. 오로지 억제력을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 남았다. 억제력 이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우리를 두려워하도록 만드 는 것이 아니던가. 궁극적으로는 ‘공포의 균형’을 잡겠다는 것이 다. 냉전 시기에는 인류를 위협하는 국제적 갈등을 무너뜨릴 대안 으로 중립주의(사실주의)가 손꼽혔던 것과 달리, 오늘날의 전략은 상호확증파괴(MAD)(이상주의)라는 편협한 시각에 갇혀 있다. 게 다가 그 상대는 러시아다. 그런 만큼, ‘악의 제국과 자유의 영웅 간 대립’이라는 단순화된 구도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1934년 앙드레 말로나 폴 니장, 블라디미르 포즈네르, 루이 아라 공과 함께 제1차 소비에트 작가 회의에 초대받은 블로크는 사회 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가해진 비난에 맞섰다. 그는 ‘언어의 일상적인 형태’를 사용하며 ‘새로운 형태’의 실험과 ‘직렬장치’와 함께 프로토타입의 개발을 옹호한다. 파시즘의 확산으로, 대중 연설의 필요성이 긴급하게 대 두되면서 블로크에게는 예술적 아방가르드와 정치적 아방가르드 의 유기적 결합이 중요했다. 에른스트 블로흐와 한스 아이슬러의 선언문, ‘아방가르드 예술과 인민전선(1937)’은 같은 선상에 있 다. 블로크의 총체극은 노동자들의 일상과, 자본주의에 위협받는 이 상적 도시의 유토피아로 이끄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여러 장(場)으 로 그려낸다. 노(가면을 사용하는 일본의 가무극)와 서커스처럼 관객 앞에서 무대장치가 바뀐다. 담당자들이 조율된 동작을 취하 면서 무대장치를 변경하고, 라디오 연사로부터 영감을 얻은 ‘화자 (話者)’가 마이크를 이용해 사건의 진행을 설명한다. 로제 데조르 미에르, 장 비네르, 다리우스 밀로, 아르튀르 호네게르가 음악을 담당했다. 영사 기술과 소리 확산 기술이 사용됐다. 2년 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배우 80명, 인물 2,000명 이 참여하는 공연을 올린 적 있는 피에르 알드베르가 연출을 맡았 다. 그는 그때 이미 현대적 기술인 전기, 증폭, 옹드 마르트노를 활 용한 바 있다. 블로크는 연극, 투우장, 오페라, 뮤직홀, 라디오, 경 기장, 집회가 한데 어우러진 공연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14m 망루, 진짜 비스트로, 자전거 경주, 100명의 승객이 탄 지하 철이 필요했다.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겪은 이 공연 프로젝트에 있 어 자금조달 상황이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블로크의 원 칙은 레제가 보기에 여전히 유효했다. 2차 대전 중 미국으로 피신한 레제는 밀로와 함께 쥘 쉬페르비에 유의 연극 ‘볼리바르 Bolivar(1936)’를 남미의 전설적 독립운동지 도자의 삶을 그린 총체적 오페라로 재탄생시켰다. 레제는 무대장 치 축소 모형 12개와 의상 700벌을 준비했다. 1950년 5월 12일 파 리 오페라 극장에서 이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화가인 레제는 ‘영 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상태인 무대장치의 사망을 선 고’한 것이었다. 레제의 영웅적 행위는 미술에서도 발휘됐다. 그는 회화의 틀을 깨 부쉈다. 그는 그림에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슬로건을 사용한 흔 치 않은 서구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이것이 ‘인민과의 단절을 인 정하는 것’이라고 1946년에 말한 바 있다. 레제는 1936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사실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토론에서 ‘신사 실주의’를 놓고 아라공과 대립했다. 아라공은 구상적 회화 방식에 대한 접근성을 요건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프랑스 버전을 장 려하고자 했다. 레제는 자유로운 색채, 형태, 구성을 접목한 동시 대 사람들, 산업 오브제, 현대적 도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사실주의’를 키워나가길 원했다. 이는 회화의 확장을 의미한다. 레제는 이를 벽, 거리, 도시, 구름 등에 확대 적용했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벽화 프로젝트를 구상했 는데, 우선 아파트, 맨션이 그 대상이었다. 이어 화가들의 도전의 식을 불러일으키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한 광고 포 스터의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예쁜 아기’와 대결하기로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관련 프로젝트가 실제로 실현된 것보다 훨씬 많다. 화가 아메데 오장팡, 작가 겸 비평가 장 카쑤(후에 파리국립근대 미술관(현재 퐁피두 센터 4~5층에 있는 국립 미술관) 설립 및 관 장 역임)의 후원에 힘입어 벽화 미술 사조가 활발하게 전개됐지만 해당 작품들은 모두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으로 시행된 연방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벽화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는데, 레제가 큰 호응을 얻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레제의 ‘신사실주의, 단색과 오브제’ 컨퍼런스의 내용이 1935년 예술 매거진, <아트 프론트> 에 선언문처럼 게재됐다. 당시 수천 개의 프레스코 사회주의 예술 이 공공건물의 벽을 뒤덮었다. 콜라주와 몽타주 기법으로 영화에 서 받은 인식을 재구성한 벽화는, 당대의 현실 변화를 호소하는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쉴 고르키나 스튜어트 데이비스 같은 미국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레제는 벽화 몇 점을 작업했는데, 대표적으로 넬슨 록펠러의 뉴욕 아파트,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의 에디슨 컴퍼니 ‘빛의 도 시’ 전시관, 1952년 UN 건물이 있다. 추상 요소의 다색 배합 또는 양식화된 오브제들(구름, 풍경, 인물, 산업장식 요소들 등)이 그 특 징이다. 프랑스의 경우 1937년 세계박람회에서 레제의 제안 상당 부분이 실현됐다. 레제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샤를로트 페리앙과 함께 농업 전시관과 교육 전시관을 거대한 합성사진으로 장식했다. 파 리 ‘발견의 전당’(과학박물관-역주)에 전시된 5*10m 크기의 기념 비적인 작품, ‘힘의 이동’은 전기에너지에 관한 그림으로 레제의 문하생들이 작업했다. 1939년 레제는 뫼르트 에 모젤의 브리예 소 재 인민항공센터의 장식에 전념했으나,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 서 이 작업은 중단됐다. 레제가 평생 동안 운영한 아틀리에에는 아스거 욘, 니콜라 드 스 타엘, 윌리엄 클라인 등의 문하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후에 레제 와 결혼하는 나디아 코도시에비치나 조르주 보키에 같은 몇몇 이 들은 레제의 전후(戰後) 관점을 보다 명확하게 받아들여 특정 사 건이나 행사, 정치단체(공산당, 프랑스여성연합, 평화운동)를 위 해 임시 벽화를 제작했다. 이렇게 거리예술의 위상을 공식화하는 파사드 페인팅(façade paintings)의 발전(특히 파리 13구에서)은 오늘날 벽화에 대한 문 제를 제기한다. 벽화는 장식적 이미지일까, 아니면 도시 질서를 뒤엎고 따라서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사회참 여일까?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추가침략에 노출되고 영토희생이 따르 는 평화를 수용할 수 없으며, 푸틴의 러시아는 이익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 전쟁의 논리는 이제 양쪽이 승리를 향한 길을 모색 함에 따라 모두에게 군사적·경제적·정치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 고 있다.” 미 허드슨 연구소의 월터 미드 연구위원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서 위와 같이 설명했다. 그는 정기칼럼 ‘글로벌 뷰’(2022년 4월 4 일)에서 “이제 바이든에게는 엄청난 모험이 따르는 한 가지 선택 지와 매우 나쁜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 상 이 세 가지 모두 ‘매우 나쁜 선택들(Ugly options)’이라고 본다. 애초에 푸틴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한 것을 ‘미국 역대 행정부의 정책 실패’로 보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병합 당시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세력균형론의 전략을 수립한 인물)를 비롯한 미국의 전 략가들이 예견했듯, 유럽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려면 “우크라이 나의 중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 하는 (러시아와의) 거래”가 필요했다. 50년대 이후 냉전전략을 수 립한 전략가 조지 케난도 1997년에 이미 “나토의 확장이 러시아 의 민족주의, 반서방주의, 군국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이미 전쟁이 일어난 현재, 좋은 선택지란 없다는 게 미드 연구위원의 시각이다. 그가 칼럼 제목을 ‘바이든의 우크 라이나에서의 나쁜 선택지들(Biden’s Ugly Options in Ukraine)’이 라고 한 이유다.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의견 도 다르지 않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월트는 “우크라이나 전 쟁이 더욱 비극적인 것은,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월트 교수는 전쟁 직전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2022년 1 월 19일)에 ‘우크라이나 위기를 일으킨 자유주의적 환상(Liberal Illusions Caused the Ukraine Crisis)’이라는 글을 썼다. 그의 주장 은 일관적이다.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이 오만과 낙관적 사고, 자 유주의적 이상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적인 통찰력에 따랐다 면, 현재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2014년) 러시아는 크름 반도를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크라이나는 오늘날 안전 했을 것이다.” 미드 연구위원이 말한 ‘나쁜 선택들’ 중 그나마 나은 것은 ‘우크라 이나에서 푸틴의 실패’일 것이다. 그러려면, 바이든 행정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볼 수 없었던 형태의 핵 벼랑끝 전 술을 포함하는 전시체제의 사고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미드는 이를 ‘냉전 시대 이후 미국 행정부가 직면한 최대 도전’이라고 했 는데, 이는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스티븐 월트 교수도 “러시아군이 무너지고 완전히 철수할 가능성 은 거의 없다”라고 봤다. 월트는 “평화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전쟁 은 교착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했지만, 미드는 보다 현실적인, 더 나쁜 두 가지 선택을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우선,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의 승리다. 이는 미국의 지위와 나토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따라서, 미국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타협 대신 결사 항전을 강요할 수도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러간 장기적인 ‘대리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전망하는 이 유다. 다른 하나는 ‘분쟁의 동결’, 즉 휴전 또는 정전이다. 이 역시 위험 하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름반도 병합 이래 훨씬 더 많은 우크라 이나 영토를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가혹한 제 재에 맞서기 위해 또는 크름반도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안 전 확보를 위해 적대적 조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미 랜드 연구 소의 사무엘 차랍 선임연구위원(정치학)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위 험한 체스에서 미국의 최선은 푸틴과의 타협”이라고 주장했다. 그 러나, 바이든의 미국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월 트 교수의 지적처럼, 서방의 의견과 논평은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 한 흑백논리에 의해 굳어졌다. 모든 것이 푸틴의 잘못이라는 합의 를 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3)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6. 이성과 법
『반지의 제왕』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이런 주제와 신념, 담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개념을 구현해낸 일례 정도 로 톨킨의 작품을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미적 가치를 포 함한 다양한 가치를 매개로 정치와 종교가 추구해야 할 비전을 제 시한다. 『반지의 제왕』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둠의 군주’는 절대권력의 도구로 강력한 힘을 지닌 반지를 만 들어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만, 절대반지는 그의 수중을 벗어난다. 반지 운반자 ‘호빗(Hobbit)’은 절대반지가 만들어진 곳에 반지를 던져 파괴하는 사명을 안고, 반지원정대의 동맹들과 힘을 합쳐 갖 은 위기를 헤쳐나간다. 이때 가장 힘겨운 난관은 다름 아닌 ‘반지 의 유혹’이다. 그러나 마침내 호빗은 임무를 완수하고, 왕이 잃었 던 왕국을 되찾는다. 이 소설은 악에 맞서 싸우며 영적인 탐구를 이어가는 이야기이자, 양심의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도록 해주는 끈질긴 사랑 의 힘(무릇 사랑의 힘이 자연을 되살리듯)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그리고 작품의 바탕에는 종교가 깔려있다. 톨킨은 예수회 지인에 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종교적 요소를 반영했다”고 밝혔다. 톨킨은 종교색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특유의 독창적이고 유 쾌한 역량으로 이상적인 세계, 즉 모험을 펼치는 하플링(Halflings, 소인족)인 호빗족의 세계를 그려냈다. 호빗족은 장구한 세 월 동안 변함없는 규범을 자발적으로 지키며 정부나 경찰력, 국경 없이도 겸손하고 유쾌하게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다(법). 톨킨이 만들어낸 호빗족 캐릭터는 이후 각종 ‘판타지’의 모티프가 됐다. 호빗족은 ‘중세적’ 세계관 내에서 마법은 수용하지만, 기술과 역 사의 발전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암흑의 군주를 상징하 는 검은 땅(Mordor)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은 계산적이고 이해타 산적인 삶의 태도를 배척한다. 행복을 만끽하면서 좋은 음식을 요 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재주꾼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호빗족 정원사’라고 할 수 있다. 호빗족 사회모델은 자주적 방어와 절제, 가이아에 대한 기억에 뿌 리를 두고 있다.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초록색 잎과 열매 를 맺는 식물에 관심을 쏟으며, 봉건적이지만 영주는 없는 이 사 회모델을 60년대 저항운동가들은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그 반대 편에 있는 네오파시스트 정당 ‘이탈리아 사회운동당(Movimento Sociale Italiano, MSI)’도 1977~1981년 ‘호빗 캠프’를 조직했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오늘날 생태감수성을 지닌 수많은 독자 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자연의 진리에서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반감, 자급자족하는 목가적인 전원사회를 향 한 열망은 현재 우리가 겪는 보건위기가 지나간 후에도 식지 않을 것이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이성(8번 참고)과 합리적인 사고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다. 즉, 세 상은 합리적이지 않은 무언가에 의해 움직인다. 즉 인간의 이성외 에 또 다른 것을 찾아 다니는 시기. 니체의 “힘”, 소쉬르의 “언어라는 체계”, 프로이드의 “무의식”, 리 비스트로스의 “구조” 등 다양한 철학자들이 이성이외에 또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노력하는 시기 결국 서양의 철학은 그리스에서 출발한 “이데아 사상”이 중세의 “신”과 결합되어 진행되다가, 신을 벗어나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 하는 흐름으로 바뀌고, 최근에는 이성이외에 또다른 주체를 찾아 다니는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이한 것으로 비트겐쉬타인 처럼 철학은 언어의 유희라는 사람 도 있고, 마르크스 처럼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세상에 마르 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다윈의 진화론도 인 류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체계를 제시한 사례이다.
7.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우리는 상식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이론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 각한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실패했으나, 현실에서 잘 실행되고 있 는 시스템이 있다면? 월마트가 바로 그런 경우다. 미제스가 그토 록 불가능성을 입증하고자 했던 계획경제의 눈부신 효율성을 보 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월마트이기 때문이다. 새뮤얼 월튼은 1962년 7월 2일 아칸소 주의 로저스에 1호 점포인 월마트 디스카운트 시티를 열었다. 이후 그 작은 상점은 세계 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월마트는 창립 이래 연평균 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개인 기업으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월마트의 경제 규모는 스웨덴과 스위스에 버금간다. 기업이 시장에서 활동하려면, 내부적으로는 계획경제의 대원칙 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각 부서와 점포, 화물트럭과 공급자들은 경쟁 대신 협력을 해야 한다. 냉전이 한창이던 중에, 이 미국 대기 업이 수립한 계획경제 모델은 소련 경제 수준의 규모를 달성했다. 1970년 소련의 국내총생산(GDP)은 현재 시세로 약 8,000억 달러 였는데, 2017년 월마트는 4,8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미제스 와 그의 동료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미국 대기업은 사라져야 했 다. 월마트는 1970년에 유통센터 1호를 열었다. 5년 뒤에는 IBM 370/135를 임대해 재고관리를 통괄했고, 디지털 방식으로 재고목 록을 상호연결하는 최초의 유통업체가 됐다. 이런 유통혁신 전에 는 매장의 재고관리를 유통업체가 아닌 판매자(소매업자)가 담당 했다. 이 운영방식은 수요 변동 증폭(AVD) 혹은 ‘채찍효 과’(Bullwhip effect, 상품 공급망에서 하위단계의 수요정보가 상 위단계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정보가 왜곡되고 확대되는 현상-역 주)로 인해 언제든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1961년 최초로 발견된 ‘수요 변동 증폭’은, 공급망에서 생산자 단 계로 올라갈수록 재고와 수요 변동이 점차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 다. 이런 현상은 매장의 상품과 고객이 요구하는 상품 물량 사이 에 발생하는 차이로 인해 나타난다. 즉, 재고 물량이 넘치거나 부 족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재고가 소진된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매장에서는 유통업체 에 주문량을 재조정한다. 매장들은 대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 해 ‘안전재고’를 비축해둔다. 유통업체는 도매업자 역할을 수행하 며, 이 경우 제조업체도 동일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 결과 각 체인 점마다 변동 폭이 커지고 안전재고가 늘어난다. 각 점포의 수요 변동 폭이 5%에 달하면 최상위 단계의 관계자들에게는 이것이 40%까지 급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월마트에서는 공급망의 전 구성원이 데이터 순환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정보기술을 구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정이 필요한 항목이 있을 때 각자가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월마 트가 책정한 가격을 승인하도록, 공급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는 말이 자주 들린다. 실제로도 그렇다. 공급자는 초대형 기업의 유통망을 통해 자사 제품을 판매할 수 있으므로, 어떤 희생도 기 꺼이 감수한다. 일단, 월마트라는 울타리로 들어가면 상당한 혜택 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월마트는 대부분의 공급업체들과 대규모의 장기적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따라서 공급망의 모든 관계자들은 투명하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마케팅 비용, 재고, 물류, 운송비를 절감할 수 있다. 일부 금융거래는 여러 업체들이 담당하겠지만, 자원 배분은 공급자, 물 류창고, 점포로 구성된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이런 공급망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개체로 보는 분석가들도 있 다. 월마트는 성공하고 시어스는 몰락한 이유 월마트는 모든 기업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바코드’를 최초로 사 용한 기업이다. 위성으로 연결된 초대형 데이터베이스 ‘리테일 링 크(Retail Link)’ 덕분에 공급자들은 수요를 예측할 수 있고, 모든 관계자는 현금 등록기에 축적된 실시간 판매정보에 접근할 수 있 다. 미제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 리 기술의 진보로 월마트에서 대규모 계획경제가 실현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월마트의 주요 경쟁사의 하나로, 120년 전에 설립된 ‘시어 스, 로벅 앤드 컴퍼니’는 월마트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접근법을 시행했다가 몰락했다. 백화점 체인이었던 시어스 홀딩스 코퍼레 이션은 2016년에 약 2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흑자로 실적 을 마무리한 마지막 해인 2011년 이후부터 계산하면 총 104억 달 러에 달하는 손실이다. 이 실패의 원인으로 CEO인 에드워드 램퍼 트의 결정이 지적된다. 그는 경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즉 내 부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회사를 세분화했다. 자본주의의 관점에 서 이 작전은 합리적이다. 기업가들은 ‘현대사회에서 부의 원천은 시장’이라고 늘 말하지 않던가? 램퍼트 회장은 운영방식을 새롭게 구성하고 그룹을 30개로 분할 한 후, 40개 사업체가 서로 경쟁하도록 유도했다. ‘의류’, ‘장비’, ‘전 기시설’, ‘인사’, ‘정보서비스’, ‘마케팅’ 부서들은 서로 협력하는 대 신, 사업체별로 사장과 운영위원회 및 회계장부를 두고 자율적으 로 운영해야 했다. 예를 들어 ‘의류’ 부서가 정보서비스를 이용하 거나 인사부에 요청을 하고 싶으면 관련 업체와 계약을 맺어야 했 다. 그러나 한 사업체의 재무제표를 좋게 보이려는 노력이 그룹 전체에 부담을 초래한 것이다. 차라리 외부 용역을 알아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각 사업체의 사장들은 회의 도중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다른 업체가 알 수 없도록 모니터에 개인정보 보호 필터를 설치했다. 수익률이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사내 경쟁은 더욱 가열됐고, 각 부 서는 최소한의 유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와 동시에 구조적 책임이 공유되지 않아서, 여러 관리 기능이 중복돼 각 사 업의 수익이 하락했다. 각 사업체의 경우 점포 유지를 위한 인프라 투자가 비용의 일부로 전락해 그룹 전체의 자본지출이 수익의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는 대다수 경쟁업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결국, 각 사업 체는 그룹 내 통합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먼바다로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배를 떠나고, 어떤 이들은 다음 사실을 확 인하며 무너졌다. 시어스 백화점 체인의 램퍼트는 자유무역에 건 내기에서 졌으며, 그의 모델은 모든 형태의 협력을 마비시켰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서양 근대 윤리 사상은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라는 새로운 철학과 더불어 전개되었다. 경험주의자는 주로 감각적 경험에 근거한 실 험과 관찰을 통해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홉스와 로크 의 사회 계약론과 밀과 벤담의 공리주의는 이러한 경험주의적 전 통을 이어받았다. 반면에, 이성주의자는 합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 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성주의의 전통은 칸트의 의무론, 헤 겔의 관념론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서양 근대 윤리 사상은 자 연권 사상과 인간 존엄 사상을 발전시켜,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 지하였다.
8. 칸트보편이성, 헤겔시대이성-패러다임, 계몽주의, 및 이상주의 대 실존주의
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인간 이성을 중시하는 시대이다. 인간의 인 식 능력과 합리적인 사고력을 신뢰하고 인간의 본질은 볼 수 없다 (=이데아 사상)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통해 인 간이 존재하는 근거를 찾았다 칸드 – 인간이 보거나 느끼는 대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그전까지의 생각에 대해 그 반대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에게는 인식 기능이 있으므로 보거나 느낄 수 있다 헤겔 –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인간의 의식은 물론 “역사”조차 도 “정신(이성)”이 움직인다. 즉 인간의 이성은 세계에서 가장 위 대하며 그 이성을 추구하는 주체가 인간이다. 반면, 실존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중시한다.
9. 루소, 마르크스, 탑다운과 로크, 존 스튜어트 밀, 바텁업
쇼의 독창성은 ‘사회’와 ‘감정’이라는 두 세계가 작품 안에서 하나 로 융합된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 빈곤은 배경으로 국한되지 않 고, 멜로드라마의 성립조건이 된다. 빈민가에서 나온 돈이 결혼자 금이 되지만,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결혼 자체가 깨진 다. 그리고 다른 혼담이 이어진다. 유쾌한 연극이든, 유쾌하지 않 은 연극이든, 작품의 결말은 대부분 처음의 현상유지로 귀결된다. 쇼는 중산층을 대중이자 연극소재로 삼아 한두 시간 동안 그들에 게 ‘불쾌한 진실’을 퍼붓지만, 적절한 전달방식과 장소 선택으로 무거움을 중화하고 수준 높은 재미를 선사한다. 평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강조하듯 “쇼의 작품이 동시대의 다 른 작품들을 압도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끈질기게 인간의 이해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쇼의 작품세계는 서로 다른 의견이 대면하면서 성립한다. 이견들은 각 등장인물의 운명이 된다. 쇼는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자기 생각을 효과적 으로 표현하고, 우리의 의견과 대조할 기회를 주는 장치를 줄거리 속에 심어뒀다.” 그렇지만 주역이 되지 못한 노동자 계층의 빈자 리는 크다. 노동자들은 하인이나 졸부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가끔 등장할 뿐이다. 이같이 의미심장한 노동자 계층의 희화화 또는 부재는, 부분적으 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1820~1903)의 사회 진 화론에 영향을 받은 쇼가 초인을 숭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숭배 의 감정은 특히 사극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운명의 사 람』(1895)의 나폴레옹, 『성녀 조앤』(1923)의 잔다르크, 또는 『인간과 초인』(1903)의 돈 후안과 같은 인물이 그렇다. 극 중 시 대와 의복을 통해 초인의 반낭만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성향, 군대 식의 노하우, 리더쉽이 드러난다. 이런 인물상은 『혁명당원 안내서』(1903)에서 허구적 인물의 목 소리를 빌어 이미 잘 정립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쇼는 “프롤레타 리아의 민주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초인의 민주주의”를 소 망한다. 요컨대 그의 작품은 강렬한 해방감을 선사함에도 불구하 고 자기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등을 주창하는 동시에 초인 에 매료된,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프롤레타리아를 간과한 사회주 의가 등장한다. 쇼의 이런 한계는 곧 페이비언 협회의 한계이기도 했다. 1880년대 전개된 영국식 사회주의, 페이비언주의의 영향으로 부르주아 계 층이 노동당의 지도부를 차지했고, 점진적인 개혁은 핵심이념이 됐다. 점진주의는 혁명보다 선거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페이비언(Fabian)’이라는 명칭 자체에서 점진주의 이념이 드러난 다. 페이비언은 쿵크라토르, 즉 ‘기회를 기다리는 자’라는 별명을 지닌 로마 장군 파비우스 막시무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그는 지구전을 유도하는 신중한 전략으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양의 탈의 쓴 늑대 모습을 한, 협회의 상징에 서도 잘 나타나있다. 1884년 페이비언 협회가 창립된 후 찍어낸 초기 선전물은 자본주 의식 생산원리를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잉여가치 창출이라는 마 르크스적 관점에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페이비언 협 회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주를 이뤘고, 경제불황으로 노동자들 의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등장한 동시대의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 과 흐름을 같이했다. 일일 근무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기 위해 공동전선을 펼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여권신장 운동가이자 특출난 페이비언주의자였던 애니 베산트는 1888년 벌어진 브라이언트 앤메이 성냥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1884년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한 쇼는 윌리 엄 모리스가 조직한 사회주의 연맹에서 연설가로서의 재능을 발 휘했고, 모리스와 함께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 후 쇼는 영국에서 윌리엄 제번스와 필립 윅스티드가 발 전시킨 ‘한계효용’이라는 경제학 이론(재화의 소비가치는 효용, 즉 재화를 소비하는 인간 욕망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생각을 바탕 으로 한다)을 접한다. 게다가 1887년 11월 13일, 반실업시위에 대 한 가혹한 진압이라는 쓰라린 경험까지 겪은 그는 두 가지 의미에 서 마르크스주의를 버릴 결심을 한다. 첫 번째,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와 잉여가치는 효용가치라는 개념에 밀려났다. 두 번째, 가혹 한 진압으로 ‘피의 일요일’이라는 악명이 붙은 11월의 시위에서, 그는 노동자 무리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목격한 후 노동자 계층은 사회변화의 주요 원동력이 될 수 없으며, 반항적인 방식은 실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쇼가 페이비언 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만큼, 협회의 변화는 곧 쇼의 변화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을 그만두고, 깨어 있는 관료체계에 권력을 위임하는 엘리트적 사회주의 노선을 취 했다. 이 같은 이념은 위험한 성향을 띤 우생학에 휩쓸리거나, 혹 은 1930년대 초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향한 존경심에 사로잡힐 위 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페이비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 은 생산수단의 공유화가 아닌 술책, 그리고 세금인상을 통한 토지 소득과 산업소득의 재분배였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쇼가 『혁명당원 안 내서』에서 예견했듯, 대다수 국민은 눈치도 채지 못한 ‘위로부터 유도된 변화’를 의미했다. ‘도시사회주의’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그 대로지만, 현존하는 자본주의 구조가 바탕을 이룬다. 이 같은 노 선의 사회주의는 20세기 초 페이비언 협회와 독립노동당의 합작 으로 탄생한 노동당에 이념과 행동강령을 제공했다. 1945년 노동 당의 승리와 페이비언주의적 국유화 정책의 도입(에너지, 교통, 영국은행, 제철산업)은 사기업의 종말을 초래하진 않았다. 1950년 쇼의 죽음은 좌파 페이비언주의가 쇠락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 다. 1년 후 페이비언 협회가 이를 구시대적 사회주의라 규정하고 선거의 패인으로 꼽으며 관계를 끊은 것이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식민제국이 발전한 시기에, 사회주의 조류도 구조화된 조직 형태 로 탄생하고 발전했다. 탈 유럽중심적 사고가 당시의 최우선 당면 과제는 아니었지만, 1895년에 프랑스 노동당은 다음과 같이 뜻을 밝혔다. “전력을 다해 식민지 침탈에 맞서겠다. 문제를 인식하는 사회주의자라면, 식민지를 옹호하는 인물이나 계획에 절대 동조 하지 않을 것이다.”(<르소시알리스트>, 1895년 9월 15일) 그 사이, 조레스는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그러나 식민지 정책에는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189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 한 이후, 조레스는 기록보관소에 틀어박혀 『프랑스 혁명사』 집 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1900~1904년 연작으로 출간됐다. 같은 시기 조레스는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옹호하는 운동을 벌이 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공화주의를 수호하고 나섰다. 아울러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자 서구 열강이 베이징에 병력을 파견했을 때, 프랑스가 연합군 자격으로 전쟁에 가담하자 조레스는 유럽이 ‘문명’의 중심이 아님을 깨달았 다. 그의 이런 경험과 시대적 상황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역사학자 이브 브노(Yves Benot)가 지적했듯 혁명 가치의 수호자 로서 조레스는 “식민지 문제가 혁명에서 비롯된 부차적인 사건이 아니라 혁명의 모순과 우유부단함을 드러내는 결과”라는 점을 간 파했다. 혁명의 역사를 다룬 19세기 출판물들은 식민지 문제를 부 차적인 사안으로만 취급했었다. 조레스 사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 에도 알베르 마리우스 소불(Albert Marius Soboul)이나 다니엘 게 랭(Daniel Guérin)처럼 혁명 연구로 업적을 남기고 정치적 탈식민 화 문제에도 조예가 깊은 역사가들도 산도밍고(현 아이티)의 독립 운동과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식민지 문제를 두루 고민했고, 식민지 정책에 점점 더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게 됐다. 이렇게 식민주의가 20세기 초의 쟁점으로 대두되던 시기에도, 프 랑스와 독일은 아프리카 대륙의 마지막 독립 국가인 모로코를 침 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모로코 위기가 한창이고 제1차 러 시아 혁명이 러시아 제국을 뒤흔들던 1905년이 전환기였다. 같은 해 사회주의 운동가 폴 루이(Paul Louis)는 근대적 의미로는 처음 으로 ‘식민지주의’와 ‘반식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정의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은, 병합된 국가 원주민의 보호, 존립, 생존에 필 요한 권리를 요구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연대(바텀업)를 구축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폴 루이는 쥘 게드, 장 조레스와 함께 프랑스 사회주의의 ‘제3인 자’로 불리는 에두아르 바이앙(Édouard Vaillant)의 측근이었다. 바이앙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공화주의를 결합해 프랑스 좌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으며, 식민주 의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지도자로 꼽힌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튀니지와 모로코의 식민지 탄압을 강하게 비난한 그의 생각은 틀림이 없다. 1904년 릴에서 열린 프랑스 사회당(이후 통 합된 다수의 분파 중 하나) 전당대회에서 바이앙은 모든 의원이 식민지 사업에 반대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의회에서 해당 주제에 대한 결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식민지 문제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었다. 골수 마르크스주 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반식민주의자가 아니듯, 공화당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식민주의 옹호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명백한 예가 바 로 1912년에 모로코의 ‘사회주의 식민지화’ 계획안을 구상한 사회 주의자 뤼시앵 데슬리니에르(Lucien Deslinières)다. 과거 ‘식민지 침탈’이라며 비난했던 쥘 게드도 이 법안을 끝까지 지지했다. 프 랑스 제국이라는 조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모로코를 식민지 화하는 방법을 이렇게 풀이했다. “모로코는 우리의 것이다. (…) 식 민지화를 통해 제대로 된 조직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법안은 결국 폐기됐다. 여러 사회당 의원을 설득해 법안 통과 를 저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이앙과 조레스의 동맹이 있었다. 공화주의 신념이 확고한 이 두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리 는 이들이 이런 법안이 일견 합당하다고 판단했다는 점에 격분했 다. 그렇다면 조레스와 바이앙을 타협을 모르는 반식민주의자이 자 식민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선구자라고 봐야 할까? 두 사람 의 행동방식은 같았더라도, 접근방식은 달랐다. 혁명을 추구했던 바이앙은 혁명을 이루려면 단절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 다. 조레스가 제도와 계획을 심층적으로 수정하는 편을 선호했다 면, 바이앙과 그 추종자들은 기존의 제도와 계획을 허무는 식으로 ‘평화적인 침입’보다 더 강력한 개입을 선호했다. 조레스 역시 프랑스의 사회, 정치적 투쟁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역사학자 압델크림 메즈리르(Abdelkrim Mejrir)는 1905년~1912 년에 총 9회에 걸쳐 개최된 사회당 전국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가 의제로 다뤄진 것은 1907년 낭시 회의뿐이었지만, 당시에도 의제 가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조레스는 프랑스 의 식민 지배에 따라 제기되는 문제점을 점차 깊이 인식했다. 설 령 ‘오리엔탈리스트’로 불릴 여지가 있다고 해도, 조레스는 비유 럽 문화에 대한 경멸과 보호를 가장한 간섭주의를 극복하고 진솔 한 관심으로 방향을 반전시키고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았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학살을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그런 발언이 여담 이나 빈말이었을까? 극우 민족주의자가 단도직입적으로 외쳤다. “조레스를 죽여라!” 조레스의 죽음을 원하던 이들은, 그가 프랑스 식민제국에서 일어 나는 일을 섣불리 비판했다는 점을 못마땅히 여겼다. 조레스는 1914년 8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발표할 제국주의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 보고서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조레스는 암살됐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의회 연설과 모로코 식민화에 관한 조레스의 연작과 언론 기고문을 보면 그가 가려던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조레스의 주장은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점차 체계적으로 이끈 공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도 일 맥상통한다. 그것은, 식민지 정책이 공화 사회주의 가치와 결코 양립할 수 없 다는 사실이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이제 나는 이번 파리 학생시위 사태가 왜 중요한지를 말하고자 한 다. 우선 이 시위는, 지식인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등감을 해소해 줬다. 학생들은 노동자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줬고, 노동자들은 학 생들의 슬로건과 행동방침을 따라줬다. 사실 파리 대학생들은 혁 명가가 아니라 아방가르드(미국식 히피-역주)에 가까우며, 이 사 태는 혁명이 아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들의 행동이 대규모 결집 을 이끌어 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3주 동안 파리에서 벌어진 일은 전격적인 유럽 전통의 부활이자 복귀였다. 20세기 초부터 유럽의 정신은 휴면상태에 빠졌다. 하지 만 이 사건은 그 혁명적 전통을 부활시켰다. 우리는 파리의 학생 시위가 자발적으로 더 커지고 강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학생들이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에서부터 주변 건물로까지 시위가 전파됐 다. 맨 처음 대학건물에서 시작된 시위는 극장, 공장, 공항과 방송 국 등으로 퍼졌다. 물론 학생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 들이 등장했고 직장인들까지 시위 주체로 참여했다. 시위 초반 공 산주의자가 주도하는 노조와 공산당 일간지 <뤼마니테 (L’Humanité)>는 시위대의 폭력적 상황을 비난했다. 그들은 학생 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비난하며 수십 년 넘은 계층갈등을 끄집어냈고 부르주아 아이들이라고 깎아내렸 다. 부르주아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했던 그들이, 부르주아의 지 시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 지만, 사태 초기 학생운동 반대 세력은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 학 내문제를 넘어 프랑스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식 사 회주의 건설을 반대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학생들을 부르 주아 아이들이라고 부를 만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노동자들은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간주되는 프 랑스 공산당 노선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것 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라도 수년간 정권을 잡을 듯한 정당이었다. 학생시위가 어떻게 전국적인 시위로 번졌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원래 학생시위는 대학 내 문제에 국한된 것 이었고, 요구사항도 대학 개혁이 전부였다. 즉, 이 시위를 통해 대 학은 전체 사회의 일부임이 인정된 것이다. 시위가 대학 문을 넘 지 못했다면, 전체 사회의 취약 부분을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학내 시위에 그쳤을 것이다. 이번 시위사태가 촉발되기 오래전부터 노 동자들은 노조의 시위금지 노선에 활발히 반대해왔고 그 벽을 넘 고자 했다. 학생들은 파리 주변 공장지대로 가서, 노동자들과 소 통하며 동조자를 만나고,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확보했 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갈 때, 노동자들도 함께하며 자신들의 요구사 항을 외쳤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학내개혁 슬로건이 나란 히 등장했다. 이 두 그룹은 자발적으로 연합했고 보조를 맞췄다. 이런 방법으로 학생시위 사태는 더 큰 사회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정치적 운동으로 전개됐다. 게다가 수십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 입해 파리 인근의 공산주의 노조가 주류인 공장들을 점거하자 프 랑스 노동총연맹(CGT)은 지지 성명과 함께 파업과 시위 동참을 공식 결정했다. 프랑스 노총은 시위사태가 자신들의 손을 벗어나 서 확대되자 더 이상 공산당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시위를 지지했고 시위 상황의 조직적 컨트롤 타워 역할을 자처했다. 이번 시위사태의 정치적 요구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며 대 학의 정치 활동을 보장하라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는 수업에서 배 운 것과 학교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연결하자는 신호였다. 중세 시대의 낡은 구조, 시대에 뒤떨어진 커리큘럼과 교실 밖에 존재하 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와의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대 학의 정치참여, 표현과 언론의 완전한 자유 등 매우 흥미로운 제 안을 했다. 콩방디는 미국 주도의 정책과 베트남 전쟁을 용인하는 것은 ‘언론 자유의 남용’이며, 언론 자유의 권리를 정책홍보를 위 해 남용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또한, “희미하게나마 세 상을 바꿀 마지막 자유의식이 남아있음에도, 프랑스 정부가 신식 민주의적 발상으로 이런 사회의식을 없애려 하는 것”이라고 덧붙 였다. 또 다른 학생들은 직장 창출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분노와 공포를 유발한 것은 전국적으로 높은 프랑스의 실업률이었다. 대학을 나 와도 취업과 생계 해결이 어려웠다. 이런 현상은 과학, 엔지니어, 기술 전공자들에게 더욱 심했으며, 청년들 모두 실업의 공포에 휩 싸여 있었다. 이들의 학내 개혁 요구가 정치적 요구와 맞물렸으며 이들의 시위는 기존 사회를 상대로 한 저항이었다. 시위사태는 갈 수록 자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주의적 양상을 띄어갔 다. 재차 강조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그 초기부터 압제적인 사회주 의 건설을 거부한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이 때문에 시위 학생들에게 마오 주의자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설명될 수 있다. 공산당 언론 역시 학생들을 주로 트로츠키 신봉자, 수정주의자 또는 마오주의자로 묘사하며 비난했다. 마오쩌둥은 어쨌든 사회주의 건설의 심볼이 었다. 이는 소련과 소련 위성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타난 스 탈린식 관료주의적 억압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차이점은 프랑스 학생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 다. 미국과 프랑스의 학생운동에 일맥상통하는 점은, ‘완전 저 항’이다. 분명한 악과 명백한 실패에 대한 저항이었다. 동시에 사 회 전체의 가치 시스템과 목표와, 기존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능력을 향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 사회문화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상황에 대한 거부였다. 경제 상황, 정치적 환경 그리고 뼛속까지 부패한 가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런 차원에서 프랑스 학생운동은 ‘문화혁명’(바텀업)이다. 전체 사 회의 도덕성을 포함해 기존 문화시스템 전체에 대한 혁명인 것이 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10. 유신론과 무신론, 회의론자, 나르시시스트, 아나키즘
구소련 붕괴로 나타난 극심한 가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세 계은행에 따르면, 전체인구의 20%가 국가 빈곤 이하의 수위에서 살아간다. 많은 조지아인들은 주변의 도움과 채소밭 경작으로 살 아남고, 은퇴자들은 한 달에 최대 220라리(55유로)로 살아간다. 실업률은 20%에 가깝고, 우리가 만난 모든 공장직원들과 고용인 들은 한 달에 800라리(220유로) 이상은 벌지 못한다. 보상금도 받 지 못한 채 갑자기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사회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정치 담론과 계획에서 찾아볼 수 없다. 2020년 9월, 한 달 최저임금을 20라리(5유로, 1999년부터 변하지 않음)에서 400라 리(100유로)로 올리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됐으나 채택되지 않았 다. “조지아에서 대부분의 정당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설립되는 게 아니라 권력과 인맥, 돈, 그리고 대중매체를 장악한 사람 중심 으로 구성됩니다(우파).” 좌파 정당을 설립하려고 했으나 성공하 지 못한 트빌리시 대학 정치학과의 지아 요르욜리아니 교수가 설 명했다. “주요 대중매체들은 정부 편이든 반정부 편이든 둘 중 하 나입니다.”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절망(혹은 통찰)을 보여주는 장면 이 있다. 지난 5월, 조지아 중부의 광산으로 유명한 대도시인 치아 투라 근방의 슈크루티 마을에서 ‘조지아 망간’ 회사의 터널 공사 로 주민들의 집에 금이 가고 갈라졌다. 담당 기관에 항의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자 이들은 이를 악문 채 트빌리시의 미 대사관 앞 에서 시위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이 나라의 권력이 거기 있 기 때문입니다.” 무너지기 직전인 자기 집 앞에 지어놓은 막사 안 에서 만난 르반 스킬라제씨가 대답했다. 조지아 정교회의 수장인 엘리아 2세의 총대주교관 앞에서 시위할 수는 없었을까? 조지아 정교회는 다른 정교회들, 특히 러시아의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적 으로 운영되는 독립 교회다. 엘리아 2세는 대부분의 조지아인들 로부터 신뢰를 받는 유일한 인물로, 그의 앞에서는 장관들과 대통 령도 머리를 숙인다. “사제들은 우리를 보러 왔습니다. 그들은 우 리의 고통을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 새로운 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해 정부와 신자들로부터 돈을 모으는 일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총대주교는 조지아에서 자유주의로 인한 참상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조지아에 정교 회가 도입된 1600년 동안 보다 더 많은 교회들을 지난 25년 동안 건축했다. “저희는 정부 결정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총대주교 엘리아 2세의 대변인인 안드레아 야그마이제씨가 부드 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희는 환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건 그 들을 치료하는 의사들과 같습니다.” 현재 종교 지도자들은 ‘동성 애 전파의 위험’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제 들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렌스젠더(LGBT)들의 입장을 대 변하는 활동가들을 공격하는 동성애혐오 자경단을 지지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조지아인들의 정신을 종교가 장악하는 것을 염려 하는 이들은 “어찌됐건, 교회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습니다!”라고 규탄한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가산 할와니는 다큐멘터리 영화 <지워진 자들의 흔적>에서 부동 산 계획으로 묻혀버린 내전의 공동묘지를 보여주면서 이런 대사 를 넣었다. “범죄는 2막으로 진행된다. 1막은 인간 살해, 2막은 증 거 살해다.” 그는 당분간 촬영을 하지 않고 있지만, 납치 및 실종자 유가족 협회 의장을 지낸 그의 어머니 와다드 할와니가 40년간 투 쟁했던 기록들(신문 스크랩, 사진, 전단지, 편지 등)을 디지털화하 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은 내가 새로운 세상을 위 해 밀어내는 많은 바위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흔적들을 보존하려는 이런 의지를 다른 데서도 찾 을 수 있다. NGO 우맘은 레바논 북부 체카에서 ‘트리폴리스코 프’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회는 트리폴리 소재 41개 영 화관 내 기록보관소들이 폐쇄, 철거, 용도변경(스포츠센터로) 되 기 전의 기록물들을 새롭게 해석한다. 전시회 간사인 나탈리 로자 부셰는 “레바논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이 집단적 기억은 사회적 지위가 종교보다는 출신 지역, 학교, 지지 정당과 더 밀접한 시대 를 증언한다”라고 썼다. 지식인이자 운동가인 로크만 슬림과 우맘을 공동 설립한 모니카 보르그만에게 기록물 수집은 늘 논쟁을 감수해야 하는 방법이었 다. “불씨는 아마도 사브라-샤틸라 학살에 관한 우리의 첫 영화 < 살육(Massaker)>이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국립 기록 보관소를 방문했을 것이다. 이곳 레바논에서는 기록보관소에 뭐 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2005년에 기록물을 수집하고 보 관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2005년이면 폭발사고 훨 씬 전인데, 당시 수백만 레바논 국민들은 총리 라픽 하리리 암살 과 관련해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요구가 실종자들 의 생사 규명 요구로 번지기를, 그래서 내전 관련 문헌들이 공개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20년 동안 우맘은 내전의 기억을 추적하며 분쟁에 얽힌 다양한 이 야기를 제안하려 애썼다. 아랍이미지재단이 레바논 관련 사진들 을 수집했다면, 우맘은 분야를 더 넓혀 자료를 수집했다. 신문사 와 정당들의 기록보관소는 물론, 1975년 4월 13일 총격으로 결국 전쟁의 도화선이 된 버스 같은 사물, 공식문서 및 개인 소장품까 지 가리지 않았다. 이어서 보르그만은 “우리의 접근법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해 과거를 파악하는 것이었다”라고 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갑자기 모호해졌다. “우리 의 프로젝트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에서 우리는 관찰자의 입장 에서 정치적 암살범들을 기록했다. 그러던 중 이 주제의 핵심을 깨달았다.” 2021년 2월 4일 로크만 슬림은 레바논 남부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2019년 12월, 이 지식인은 레바논 언론에 공개서 한을 발표했는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헤즈볼라 사무총 장인 하산 나스랄라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 다. 보르그만은 “로크만의 죽음과 현재의 붕괴로, 기록물들의 중 요성은 더욱 커졌다”라고 강조한 뒤, 현재를 위협하는 세 가지 위 험을 열거했다. “하나는 정치적 위험이다. 2019년 10월의 민중운 동 당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기록물들이 보관된 건물 앞에 불붙 인 타이어를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전쟁이나 폭발의 위험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위험이 있다. 누군가가 돈이 탐나서 이 기록물들을 팔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수집물들이 분 산될 위험이 있다.” 트리폴리로 향하는 도로에는 전력난과 민병대 존속을 규탄하는 ‘사와 리 루브난(레바논을 위해 함께하자)’ 운동 포스터가 붙어 있 다. 2019년 가을 울려퍼진 구호가 다시 메아리치는 듯하다. 당시 시위대는 ‘켈룬 야아니 켈룬(모든 것,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한 다)’이라고 외치며, 부패혐의를 받고 경기침체의 책임이 있는 지 도층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제 사람들은 지쳤다. 이런 포스터들은 또 다른 위험한 분열의 징후다. 발라만드 대학 교육심리학과 교수인 사메르 아누스는 “사 와 리 루브난은 바하 하리리가 지원하는 운동이다. ‘주권’으로서 의 혁명이라는 주제의 함의를 바꿔, 헤즈볼라에 대항하는 메시지 로 만드는 것”이라며 한탄한다. 그 옆에서 ‘한 국가의 시민(MMFD)’ 정당의 운동가인 오베이다 테 크리티는 2019년 10월, 베이루트에서 전쟁이 시작된 1975년 4월 1일부터 13일까지 발행된 모든 신문 기록물들을 당시 ‘혁명의 피 앙세’로 불렸던 순교자 광장으로 가지고 왔다고 기억했다. “제목 들은 지금과 같다. 전쟁 직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일어나는 일과 얼마나 비슷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피하려고 애쓰는 폭력 말이다. 현재 지도자들 대부분이 당시와 같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아나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예수의 윤리 사상은 고대 그리스의 윤리 사상이나 헬레니즘 윤리 사상과는 다른 도덕적 삶을 제시하였다. 예수는 무엇보다 신 앞에 서 모든 인간이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윤리 적 삶의 근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수의 윤리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중 세 초기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후기의 아퀴나스를 들 수 있다. 한편, 중세 후기에는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에 의해 도덕적 삶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더욱 풍부해지기도 하였다.
1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서양 윤리 사상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의 윤리 사상은 감각적 경험 과 현실에 주목했던 소피스트와 그들을 비판하면서 보편적인 도 덕적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였던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되었다. 소 크라테스의 윤리 사상을 이어받은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이 상적인 인간과 이상 국가의 모습 제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상적 윤리 사상을 비판하면서 좀더 현실적인 윤리 사 상을 제시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 르스 학파의 윤리 사상과 금욕주의로 알려진 스토아학파의 윤리 사상이 발전하였다.
12. manifest image와 scientific image
‘인간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경제성을 우선시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비난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기 반에 새로운 가치관의 자리를 마련할 ‘종’의 가능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성’이 확인되면 비로소 새로운 존재론은 그 모 습을 드러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 에 의하면 생물학은, 생명이 “상호관계성, 다양성, 협력, 항상성 및 공생”을 근간으로 하고, 박테리아에서 식물까지 생명체 전체가 존 재해야 인간의 생명도 존속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생명이란 하나의 협력체다.” (scientific image)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 상호의존성과 ‘상호연결성’은 “각 생명체가 서로의 미래의 가능성을 상호 강화하기” 위해 “다른 피조물과 유 기체(식물, 동물, 미생물)에 대해 일종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협 력관계를 바로잡고 구축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아에 갇혀 자신만이 특별하고 우월한 생명체라고 자만하며, 이 세상을 강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전쟁터로 바라본다. 이런 ‘프로메테우스 적’ 인간이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여기서 소위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에 맞서는, 오래된 개념을 내세울 수 있다. 그것은 ‘상부상조’와 ‘협동심’이다. 지금까 지 과소평가돼왔으며, 심지어 자본주의 이념으로부터 무시당해 온 이 능력은 ‘지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인류에도 존 재하는 한 가지 특성에 불과하다. 이 주장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반대되며,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사회의 자연선택 이 론을 새로운 인간의 관점으로 바꾼다. 즉 경쟁을 선호하는 인간의 성향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협력의 힘을 재평가하는 관점이다. 이 런 주장은 흔히 인지과학 및 생물학 분야에서 파블로 세르비뉴와 고티에 샤펠 같은 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들로 뒷받침된다. 이들은 ‘인간의 자발적 상부상조’ 정신이 생물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마르셀 모스는 모든 인간 사회가 시장이나 계약이 아닌 ‘주기, 받 기, 되돌리기’라는 3중 의무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하며, 알랭 카 예는 이 이론을 근거로 삼는다. ‘인간 본성’의 개념은 리처드 도킨 스 같은 일부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단호하게 반박하고, 더 이상 ‘선’과 ‘악’ 같은 도덕적 이분법으로 정의되지 않는다(상대주의). 대신 유전자를 포함해, 사회라는 틀과 이념을 작동시키는 잠재성 전체로 정의되는 개념으로 구상된다. 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19세기에 이미 상호의존과 연대의식 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눈부신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생시 몽주의라는 개혁주의 사상의 주창자인 생시몽 공작,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1760~1825)는 사회에 ‘유기체’라는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결속과 협력이라는 기관의 법칙에 따라, 어 떤 기관도 다른 기관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 피에르 르루(1797~1871)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 및 세계와 관계 를 맺는다. 한 인간과 연결된 타인과 세계가 그의 존재를 결정하 고 드러내며, 스스로를 드러내준다.” 그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정계에서는 이런 주장이 더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가령, 급진사회 당의 탁월한 당원이자 수차례 총리를 지낸 레옹 부르주아 (1851~1925)는 ‘연대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인간 집 단에 빚을 지고 태어나며 이 채무에는 권리와 의무가 포함된다.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가져야 하는 우애의 관계, 이것이 바로 연대정신이다. 레옹 부르주아는 누구나 권리를 행사 할 수 있는 평등하고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국가가 사회의 보 호원칙을 세우고 퇴직 노동자 단체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러나 이 개념을 대표적으로 반영하는 인물은 아마 표트르 크로 포트킨(1842~1921)일 것이다. 그는 무정부주의 전투적 이론가이 며 노동자 자주관리를 주창한 주요 사상가다. 크로포트킨은 각 종 에서 “상부상조가 일반적 법칙”이며 “자연을 지배하는 사실”이라 고 생각했다. 또한 “상호 공감의 본능”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 한 박애의 감정과 자신을 집단과 부분적으로 동일시하는 감정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감정이 정의, 평등, 헌신을 추구 하는 마음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자연에 관한 고찰로 돌아와서 이렇게 진단했다. “경쟁 은 없다! (…) 덤불과 숲, 강과 바다는 우리에게 이런 강령을 제안 한다. 단결하라! 상부상조 정신을 실천하라! 그것이 바로 개인과 모든 인간에게 최고의 안전, 신체적·지적·도덕적 진보와 존재를 최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크로포트킨은 현대 문명에 매우 비판적이고, 혈연 및 지연사회가 축적한 부에 촉각을 세웠다. 그런 그가 성공의 모범 사례로 제시한 것은 바로 길드를 통해 우애를 유지한 중세시대였다. 현재 수많은 주제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개념들을 모 든 생명체로 확장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반 서양 숭배 사상(Anti-occidentalisme)으로 낙인찍힌 것들도 있다. 이 주제의 공리적 ‘논거’와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 러나 상부상조 및 협력 정신을 넘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상호관 계성’이다. 상호관계성에는 계급을 구축하는 규범들을 재구성하 고자 하는 계획이 담겨있다. 상호관계성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계 급이란, 인간의 오만에서 양분을 흡수한 배타성이기 때문이다. 상 호관계성을 위해서는, 나와 남, 합리와 비합리, 개인과 집단, 현대 사회와 고대부족사회를 가르는 해묵은 대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상호관계성은 애니미즘을 숭배하는 집단이나 대지, 지구 등 계 몽주의가 무시해온 것들을 작동시킨다. 이때 중요한 것은, 브뤼노 라투르의 표현을 빌면 ‘행동의 힘’을 파악하는 것이다. 상호관계 성은 생명론을 표방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주목한다. 신자유주의 질서를 따르는 ‘세계화된’ 세상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대개 역동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사실과 발견을 집단적 정치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두가 행복한 해방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와 결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해방된 공간에서 자유 롭게 결정된 삶(결정론)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이 생산적 활동보다 우선시돼야 한다”고 본다. 이 해방된 공간에서 ‘나’는 자신을 ‘자기 자신을 넘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다수의 자손들로 구성된 존재’로 인식한다.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상호협력과 개별성 의 발현, 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우선 지역적 차원에 서, 소규모 공동체 내에서 조심스럽게, 하나씩 실현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이다. 그것 은 영적이고, 때로는 과학만능주의로 포장되는 범신론에 가까우 며, 극도로 서정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 다. 모든 형태의 생명과 상호연결성에 대한 존중은 무엇에 대해, 무엇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해방자 역할을 할 것인가? “매혹적인 낙관주의로 무장한, 인간중심에서 벗어난 이 전환점이 자본주의 가 결정한 상황들을 바꾸는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무능력의 증 상에 지나지 않았다면?” 두 에세이스트는 이 전환점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회의 불의, 착취, 소외에 맞선 투쟁은 상호관계성을 찬양하는 목소리에 가려 자취를 감춘다. 정신의 고양, 알랭 카예를 인용하 자면 ‘이해타산의 공리’를 거부하는 이런 선동의 목소리는 진보를 거부하는 회의론자, 감정적인 몽상가, 계급투쟁을 희석하는 생명 공동체에 소속된 열성분자들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반면, 유 물론적 시각은 이런 목소리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상 생하는 세상을 향한 열망이 담긴 이 목소리는, 진보주의 세력의 쇄신에 일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브뤼셀의 레오폴드 공원에는 2017년 5월 6일 개관 이후 지금까지 50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독특한 박물관이 있다. 우리가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자 경비원들이 신원을 확인하고, 개인 소지품을 엑스레이로 촬영하고, 열화상 카메라로 체온을 쟀다. 관람객은 오 디오 가이드 헤드폰을 쓰고 유럽연합의 24개 공식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유럽의회의 프로젝트인 유럽 역사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보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이 전시는 유럽 각국 의 역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 대륙의 지리와 그리스 신화 관련 유물 전시로 시작되는 상설 전시는, 시대적 배경이 18세기로 접어들면 나치 정권과 소련을 연 상시킨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시민들은 여러 세기에 걸 쳐 자신들을 지배해온 절대군주제를 전복했습니다. 하지만 자유, 평등, 박애라는 숭고한 이상은 곧 공포정치로 더럽혀집니다. 공포 정치의 시대는 폭력 탄압, 대량 처형, 정치적 숙청의 시대입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적을 진압하고자 단두대를 선택한 것입니 다.” 오디오 가이드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칼날같은 소리가 울리고, 해 설이 계속 이어진다. “이상적 목표(scientific image)가 잔혹한 수 단을 정당화하는 일은, 유럽 역사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일어났 습니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 경찰국과 독일의 나치 정권이 그랬지요.” 이 첫 번째 비유가 전시의 일관된 주제다. 19세 기 전시실에서는 빅토르 위고와 1905년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 등 친유럽 평화주의자들 앞을 조용히 지나간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산업혁명에 대한 “열정적 반 응”임을 알게 된다. 오디오 가이드 해설자는 “(노동자들의) 생활환 경 및 노동조건은 비참했습니다”라면서 “그러나, 19세기 말 투표 권을 점진적으로 획득하면서 개선됐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전혀 없다. 게다가 오디오 가이드는 이렇게 강조한다. “노동계급은 어떤 동질적인 전체를 이 룬 적이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은 동일한 특성을 공유한 적이 없었죠. 그들의 특성은 국가나 산업에 따라 변화했습니다. 반면, 부르주아들은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촉진하고(manifest image) 현대 민주주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윌슨은 절대론에서 상대론으로 정책정환함 (절대론) 브렉시트 움직임은 유럽 건설을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 이념보다는 자유 지상주의 이념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자유 지상주의는 사유재산의 보장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국가개입을 제한하고 집산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경제논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이념은 국가 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유 지상주의 옹호론자들은 보호주의가 아닌 고립주의를 취한다. 국 가규제를 거부하듯, 국가 간 관계에서도 제도화에 반대하며, 경제 적 이익에 상응하는 통상 협정은 당사자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자유 지상주의론자들은 개인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방편으 로 아무런 규제가 없는 자본주의를 유일한 사회체제로서 옹호하 며, 사회관계에서도 모든 강제권을 금지해야 한다는 정책적 대안 을 편다. 더 나아가 개인의 도덕, 정치, 경제 주권의 틀 안에서만 사회적 집단성이 성립해야 한다고 보기도 한다. 1975년에 설립된 자유주의 싱크탱크 프리마켓파운데이션(Free Market Foundation)의 연구원 크리스 해팅은 2019년 12월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무역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급진적인 정책이다. 아무런 규제 없이 사업체 설립을 허용하는 것도 급진적 인 결정이다. 사람들을 저마다의 합리적 의사결정에 따라 행복을 추구하는 개별 주체로 이해하는 시각도 급진적이다.” 질 도스탈레르가 다음의 글에서 설명하듯이 자유 지상주의론자 들은 신자유주의자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역할을 축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시설이나 운송설비 등 특정 기반시설 구축뿐 아니라 화폐를 발행하는 역할에서도 국가를 배제하자고 한다. 프리드먼 밀턴의 아들 데이비드 프리드먼은 경찰, 사법부, 군대를 민영화하자고 말한다. 무정부 자본주의는 모든 기능을 민 영화해 국가를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보기에, 애덤 스미스가 국 가의 역할로 남겨 둔 군대, 경찰, 사법부까지 민영화 대상에 포함 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유 지상주의는 개인의 행동과 공동선이 어떤 연관이 있 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주의는 민주 적 절차에 따라 결정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권적 개인들이 실현 한 이익의 총합은 곧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같다고 본다. 밀턴 프 리드먼이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주장한 신자유주의는 경제 영역 내에서만 공동선을 논했지만, 경제 논리 의 지평을 지속해서 확장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사유재 산과 부의 축적을 철저히 옹호했으나, 그 안에는 사회 전반의 부 의 증대를 가져와 사회적 진보로 이어진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반면, 자유지상주의는 자유가 공동선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유에 대한 윤리적 접근만을 옹호하며, 결과가 무엇이든 자유 증진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자유방임식 자본주의를 정당화 하는 논리는 자본주의가 우월하고 다른 어떤 생산 방식보다 더 많 은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유 지상주 의 윤리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 체제라는 이해에 근거한 다. 자유를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나 신자유주의자 들과는 달리, 자유 지상주의자들은 의무론적인 해석을 한다. 그 결과, 부를 축적할 자유는 그 자체로 당위성을 획득한다. ‘터프톤가(Tufton Street)’는 사실 애틀러스 네트워크(Atlas Network)의 일부다. 애틀러스 네트워크에 속한 400여 개 조직은 자유 지상주의와 영국의 친 브렉시트 보수주의, 미국의 알트라이 트(alt-right·대안우파)와 연계돼 있으며, 정치적으로 일관된 하나 의 연합체를 형성한다. 아울러 이들 조직은 자유 지상주의, 대처 주의 후속 과제, 유럽 회의주의, 친미주의, 권위주의, 기후변화 회 의주의 등 대체 금융권의 정치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각종 이념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대체 금융권을 지향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 군림하는 데 민주주의 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들은 민주 공화국이 부르주아 지 배에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라고 본 마르크스주의 사상마저 거부 한다. 신흥 지배계층의 권력 행사를 저지할 만한 다른 엘리트 집 단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19세기에 접어들 무렵, 신흥 부르 주아지는 일부 지방에서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봉건 세력과 귀 족에 맞서 피의 정당성이 아닌, 또 다른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했 다. 부르주아지는 약 천년에 걸쳐 지배권을 유지해온 지주 귀족과 농민 계급이 합심해 연대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주권적 국민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부 르주아 혁명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부르주아지와 경쟁하는 권력 계급이 없다. 군주제나 사회주의라는 위협요소가 사라진 마당에,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에 달리 관심을 쏟을 필요 가 뭐 있겠는가?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절대론<-> 상대론) 공개토론에서 정체성 논쟁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이 젊은이들 중 일부가 종교, 출신, (피부색으로 정의되 는)인종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최우선으로 내 세움으로써, 자신들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거부를 표현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불행히도, 그들 중 가장 가 난한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소속 공동체 및 귀속 집단을 다양화할 수 있는 자원을 박탈당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왜 세계를 ‘우리’(도시의 흑인청년들, 아랍인 들, 배제된 사람들, 혹은 ‘우리 무슬림들’) 대 ‘그들’(부르주아, 프랑 스인, ‘갈리아인’, 백인, 무신론자 등)로 이분화하는지 말해준다. 인 종차별과 끝까지 싸우려면, 이런 정체성의 구속과도 싸워야 한다. 이 정체성의 구속은 젊은 반항자들에게 그들이 대중계급에 속해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피부색을 시민들의 모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관행을 결정하는 변수로 제시하는 인종차별의 언어는 복잡하고 미묘한 사회 속 권 력관계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학적·통계학적· 민족지학적 조사는 사회적·민족적 변수가 항상 서로 다른 강도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과학의 모든 기술은 (지리적·역사 적·상호작용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행동변수들의 작용을 정교하 게 밝혀낸다. 하지만,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으로 결정되는) 정체성의 여러 차원들로 인해 사회계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모 른다면, 그 무엇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사회적 이동성 덕분에 중산층(교사, 교육자, 사회복지사, 연예계 종사자 등) 또는 상류층(방송기자, 작가, 가수, 영화배우 등)의 삶에 접근 할 수 있게 된 이들을 보자. 이 ‘계급 상승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자원을 정서적·직업적·문화적 네트워크를 넓히는 데 활용한다. 그것이 더 많은 자유를 위한 투자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노동계급에 속해있는 식민지 출신 이민자 의 후손들은 왜 희생자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왜 그들은 해방의 열쇠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그런 정체성 담론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노동계급 내 분열을 유발한다. 이는 1980년대부터 좌파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기 위해 보수세력이 추구한 목표였다. 모든 ‘백인’을 특권층으로 간주하면서 정치적 투쟁을 인종적 차원에 묶 어두는 것은, 특권층이 같은 논리로 자기방어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백인’이 대다수인 만큼, ‘백인이 아닌 이 들’은 영원히 소수로 남게 될 운명에 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 조스 스타일의 참회가 ‘백인’으로 정의된 개인들이 ‘특권’을 포기 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 교훈으로 환원하 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이런 경향이 이제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인종문제를 논할 때는, 미국의 사례가 항상 언급된다. 그 렇기 때문에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을 아직도 미국의 핵 심적인 문제로 남아있게 만든, 미국 흑인차별 반대운동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가 최근 발표한 분석을 참 고하는 것이 유용하다. 왈저는 1960년대 초 학생 신분으로, 아프 리카계 미국인이 주도한 시민권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50 년 후 그는 자신의 정치참여의 기반이 된 그 순간에 다시 초점을 맞춘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왈저는 미국 북동부의 명문대 학(하버드대, 브랜다이스대)의 학생들, 특히 자신과 같은 유대인 학생들과 흑인 목사들, 활동가들 간에 형성된 연대의 힘을 상기했 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절대론에 대한 비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종차별적인 모 욕도 대상을 범주(Catégorèmes)에 따라 구분하는 행위에 속한다. 즉, 별다른 기준이나 일관성 없이 대개 암묵적으로 작용하는 범주 화 원칙에 기초한 분류 행위인 셈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정치 적 존재론(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에서 시 도한 철학장의 분석에 따르면, 하이데거 연구의 주된 철학적 명제 몇몇에서는 상반된 상식적 개념이 범주화돼 등장한다. 가령 ‘유일 한 것’ 혹은 ‘희귀한 것’의 개념이 ‘보편적인 것’이나 ‘통속적인 것’과 대비되고, ‘고유한’ ‘실재적 주체’ 등이 ‘대다수’의 ‘세인(世 人)’, 범인(凡人) 등과 상반된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귀한 이들’과 ‘저속한 자들’이라는 차별적 대비는 이를 교묘한 철학적 대비로 둔갑해, 철학 교수자의 눈도 속인다. 제아무리 민주적인 교수자도, 고도의 인종주의가 그 기저에 교묘하게 깔린 표현임을 미처 지각하지 못한 채, ‘실재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주체 ‘세인 (世人)’에 관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글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